‘법의 정신’으로 민중과 함께 피어난
가시덩쿨 속 한 송이 금잔화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김지섭 의사의 니쥬바시 사건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다. 그의 변호를 맡아주었던 일본인 변호사들이다. 이들은 총독정치의 잔학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김지섭 의사의 폭탄 투하는 미수에 그쳤으며, 어떤 피해도 준 것이 없다고 변호하며 그의 무죄를 외쳤다. 김지섭 의사를 변호해주었던 변호사 중에 ‘후세 다쓰지(1880~1953)’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본인 중에 유일하게 우리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사람이다. 그는 독립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 조선총독부의 미움을 샀다. 또한 후세 다쓰지는 1919년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서 피체되었던 최팔용과 백관수의 변론을 맡으면서 조선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지지한다.
기울어진 법의 저울 위 놓여진
김지섭 의사의 의거
김지섭 의사의 니쥬바시 사건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다. 그의 변호를 맡아주었던 일본인 변호사들이다. 이들은 총독정치의 잔학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김지섭 의사의 폭탄 투하는 미수에 그쳤으며, 어떤 피해도 준 것이 없다고 변호하며 그의 무죄를 외쳤다. 김지섭이 제국주의 식민지 치하의 백성이라서 그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는 것은 ‘법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법의 저울에 올려놓으면 그의 신분의 고하, 인종, 재산, 학벌 등 어떤 이유로라도 차등 있게 법이 적용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법철학에 의한 것이었다. 진실과 정의를 말할 줄 아는 양심적인 그들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김지섭에겐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죽여 달라”고 요청했던 김지섭의 요구도 “무죄”라는 일본인 변호사들의 변호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판결이었다. 감히 황거에 침입해서 왕에게 폭탄을 던지려 했던 식민지 나라 조선의 청년을 그들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강점 이후 죽인 수많은 조선인들과 관동대지진 학살로 죽인 6,600명의 조선인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왕(日王) 한 사람의 목숨은, 그들에게 매우 존엄했다.
후세 다쓰지,
양심과 정의의 불꽃
김지섭 의사를 변호해주었던 변호사 중에 ‘후세 다쓰지(1880~1953)’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본인 중에 유일하게 우리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사람이다. 그는 3·1운동 때에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일본 검찰에 기소된 적이 있다. 독립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 그는 조선총독부의 미움을 샀다. 일본 정부는 1933년과 1939년에 두 차례 그를 투옥시켰고 그의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기도 했다. 1919년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서 피체되었던 최팔용과 백관수의 변론을 맡으면서 조선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지지한다. 물론 그 시대에 일본의 양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괴롭히느냐?”고. 다쓰지 변호사도 ‘아카호’ 창간호에서 “한일합방은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며 비난했다.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본의 양심 있는 사람들과 변호사들이 조선의 독립을 감정적, 정신적으로 지지했었다는 것도 함께 강조해 둔다. 어느 곳에나 양심과 정의의 불꽃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정신의 불꽃.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줄 아는 후세 다쓰지, 아름다운 사람들은 어디에나 살고 있다. 가시덩쿨 속에서도 한 송이 금잔화가 피어나듯이.
핍박 속에도 조선인의 인권과
독립운동의 정당성 변호
후세 변호사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김지섭 의사에 대해 공부하면서였다. 그가 일본인이면서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가장 처음,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는 것도….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 사람이면서 왜 그는 식민지 백성들을 변호해주었을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본래 미움을 받게 마련이다.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미움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하고, 그의 행로에 먹구름이 끼기도 했지만, 그는 그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조선인의 인권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변호해주었다. 박열 부부의 일본 왕 암살 미수 사건(1923년), 의열단 단원 체포사건(1923년), 김지섭 의사 변호 등이 그것이다. 그는 1926년 전라도 궁삼면의 농지를 수탈하려던 때 직접 현지조사를 마치고, 합법적인 사기라는 것을 밝히고 총독부가 농민과 협상하도록 했다. 1920년에서 30년대 계급타파를 외치던 형평운동(백정들의 신분해방 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조선민중에 대해 애정이 깊었다. 그는 1933년과 39년에 두 차례나 일본 정부의 미움을 사서 투옥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부인의 종교인 ‘남녀호랑개교’에 몰두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의 위패가 상재사에 모셔져 있다는 기록을 읽고 갔으나, 그의 위패를 찾아 확인할 길이 없었다.
평생 정의를 위해 싸운
그를 모신, 도쿄의 ‘상재사’
나는 지난 2월말, 도쿄에 갈 일이 있었다. 그곳에 갔으니, 그의 묘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는 ‘상재사’에 가보고 싶었다. 도쿄 전철 노선도를 찾아보니, 그곳 전철 노선이 매우 복잡해 보였다. 우리나라는 지하철 안에서 노선이 모두 연결되어 갈아타면 된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노선마다 철도 회사가 다르다. 그래서인지, 갈아타려면 밖으로 나와서 다른 개찰구를 다시 찾아 들어가야 한다. 일본어에 서툰 나로서는 찾아가기 힘든 여정이다. 그래도 찾아보자고 길을 나섰다. 갓바바시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가다가 택시를 타기로 했다. 전철역 역무원에게 물으니,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근처에는 상재사라는 절이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에는 나와 있는 것이 실재로는 없다는 것이 의아한 일이다. 택시를 타고 갓바바시로 가려다가, 기사에게 주소를 보여주며, “혹시 상재사를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기사의 말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전철역 역무원이 모르는 것을, 택시 기사는 알고 있었다. 7분 여 만에 우리는 상재사 앞에 내렸다. 한국의 절집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도시 시가지 안에 지어져 있는 현대식 건물에 지붕만 기와를 얹은 일본식 건물이다.
계단을 올라가니 불경을 외우는 소리가 힘차게 들린다. 경내에 들어가서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그의 위패를 찾을 길이 없다. 그를 위해서 날마다 불경을 외무며 제를 올려드린다는 기록을 읽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까지 찾아간 보람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일본인이면서 식민지배 하에 있는 조선인들을 ‘법의 정신’으로 변호해주었다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영혼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리고 싶었던 도쿄 나들이. 그의 묘지라도 찾아보고 싶어서 절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시내 한복판에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일본의 무덤 문화는 봉분을 만들지 않는다. 돌단을 몇 개 쌓아놓고 그 앞에 위패와 꽃장식이 전부다. 번화한 시가지 안에 검은 돌들의 무덤들.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어 얼른 그곳에서 나와 버렸다. 그 무덤 가운데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아름다운 영혼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그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다.
힘들게 찾아갔으나 그곳에 머문 시간은 40여 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절 주변에는 고성(高聲)의 염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그들의 기원의 염(念)은 오직 한 가지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죽은 자든 살아있는 자든 모두에게 평화와 안식을 달라는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지칠 줄 모르는 고성의 염불 소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그곳을 벗어나 갓바바시로 이동하여 소꿉장난 같은 종지 몇 개를 구입해 오다이바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해가 지고, 신주쿠로 이동하여 저녁 식사를 하면서 도쿄타워를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남산 타워처럼 도쿄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도쿄타워.
야경 속에서 도쿄타워가 뿜어내는 불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김지섭 의사가 니쥬바시에 던졌던 대추알 세 알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저렇게 역사에 빛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변호를 맡아주었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정의로운 영혼도 저렇게 빛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