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03] 김마리아 회관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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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난초처럼 올곧던, 당당한 신여성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9년 전부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글을 써왔다. 서울에 독립운동가 유적지를 알아보다가 “보라매공원에 가면 김마리아 동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리아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게 온갖 고문과 성폭행까지 당해도 끝없이 독립운동을 했고, 그때마다 고문당하곤 했다는 이야기. 어떤 고문이었을지는 짐작이 가는 일이었기에 외면하고 싶은 인물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분노가 치밀 것 같았다. 그러나 글도 인연이 있나 보다.
9년 전부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글을 써왔다. 서울에 독립운동가 유적지를 알아보다가 “보라매공원에 가면 김마리아 동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리아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게 온갖 고문과 성폭행까지 당해도 끝없이 독립운동을 했고, 그때마다 고문당하곤 했다는 이야기. 어떤 고문이었을지는 짐작이 가는 일이었기에 외면하고 싶은 인물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분노가 치밀 것 같았다. 그러나 글도 인연이 있나 보다. 스코필드 선교사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스코필드 선교사와 김마리아의 고리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코필드와 함께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노순경이 서대문감옥에 갇힌다. 스코필드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8호 감방을 찾게 된다. 그곳에서 스코필드는 김마리아, 유관순, 어윤희, 방순희 등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구절을 글로 정리하다 보니, 미뤄두었던 보라매 공원의 김마리아가 기억 저 너머에서 손짓한다. 정신여고에 김마리아회관이 있다고 하니, 찾아가 보기로 한다. 정신여고 김마리아기념관 마리아의 유품을 만나다 교감 선생님의 친절한 안내로 김마리아기념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기념관 안에는 김마리아에 관한 신문기사들이 액자 속에 전시되어 있다. 안창호 선생과 김구 선생이 마리아에 대해 평한 글도 액자 속에 들어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이 마리아의 애국심을 예찬하여 지은 시 구절도 전문(全文)이 전시되어 있다. 그녀가 남겼다는 유품은 수저 한 벌이다. 은수저인지 시커멓게 변해있다. 1944년 3월 13일에 사망했다고 하니, 수저 주인이 사용을 멈춘 지도 77년이 되었다. 그리고 정신여고 동창회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두 번째 유품인 한복을 보여주셨다. “개인에게는 아무에게나 보여드리지 않는데…”라는 말씀을 교감 선생님은 여러 차례 하신다.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3권에 김마리아 선생에 대한 글을 써서 넣으려 합니다”라고 했더니, “유관순 열사는 이화여대(梨花女大) 제단에서 밀어서 서훈도 올라갔는데, 김마리아는…”이라며 말끝을 흐리신다. 그 말씀 앞에 미안한 마음이 인다. “저도 이대를 나왔지만, 이화학당 출신인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는 아직 글을 쓰지 않았어요. 너무 많이 알려지셔서….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남이 안 보는 각도에서 참신하고 독창적인 시각으로 글을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김마리아 선생에 대해서 잘 써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어떤 여자분이 한복 상자를 들고 들어오신다. 하얀 한지를 여러 겹 풀어놓으니, 치마저고리가 나온다. 하얀색 명주 한복이다. 그런데, 저고리가 범상하지를 않다. 안섶보다 겉섶이 훨씬 길다.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2cm 정도는 길다. 짝짝이 한복이다. 목에 깃 부분-동정은 누렇게 절어 있다. 77년의 세월 동안 누렇게 변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명주 저고리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모든 것을 짐작하게 했다. 고문을 당해서 오른쪽 젖가슴이 없어졌다는 것. 불에 달군 인두로 가슴을 지져서 모두 타버려 쪼그라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은 조선인을 죽여서, 남자의 귀를 베어 갔고 여자의 가슴을 베어다가 몇 명을 살상했는지 대장에게 보였다고 한다. “앞섶과 겉섶을 똑같이 만들어 입으면, 왼쪽 어깨가 올라가 있어서 옷섶이 들리게 마련이다. 옷섶이 붕 떠서 옷매무새가 없게 되었다”라는 배학복 씨(마리아의 수양딸)의 말이다. 마리아가 남긴 수저와 치마저고리를 배학복 씨는 정신여학교에 기증을 했다. 고뇌와 질곡의 짐 짊어진 53년의 여정 강당 앞에는 김마리아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쪽 찐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다. 한복 차림이다. 아마도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원산에서 신학을 강의하던 때의 모습일 것으로 짐작된다. 흉상의 표정이 밝질 않다. 김마리아 선생은 흉상 등 뒤에 진흙을 잔뜩 지고 있다. “등 뒤에 진흙은 김마리아 선생의 고뇌와 질곡의 짐-나라 사랑과 독립운동의 짐을 상징하는 겁니다”라고 교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말씀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1892년에 태어나서 독립을 1년 앞두고 1944년 3월 13일에 사망하기까지, 마리아의 53세의 여정이 어떠했는지를. 만석꾼 딸로 태어나 스스로 십자가를 지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주고, 시부모 공경 잘 하면 현모양처로서 편안하고 무난한 삶이었다. 대가댁 마나님들은 폐물을 하나하나 늘려가며 그것으로 만족하면 되었으리라. 그런데 부잣집 딸, 마리아는 폐물이나 모으며 살아도 되는 무난한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왜 갔는지? 그것도 그녀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고문으로 평생 비상악골축농증, 메스토이병 신경쇠약으로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몇 번씩 입원하여 외과 수술을 받아야 했다. 서울 세브란스 병원, 상해, 미국에서도 여러 차례 입원과 수술을 반복한다. 여성의 상징이라는 젖가슴 한쪽을 잃은 것도 모자라서, 불에 달군 인두로 음부를 화침질하는 고문까지 당한다. 애국부인회 회장이었던 김마리아가 대구감옥에서 받은 모욕적인 고문이다. 마리아 28세 때였다.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까지 마리아는 독립운동에 매달렸다. 결혼할 수도 아이를 출산할 수도 없는 몸이 되었다. 대구감옥에서 마리아는 옥중 병고가 심해지고 병보석으로 풀려난다(1920년 5월 22일). 마리아가 정식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조용히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본다.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서 거기까지만 했더라면…. 정신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의 자존심과 민족의식이 마리아로 하여금 좌시(坐視)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동경유학을 통해 세계 정세를 파악하게 된 마리아다.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이 침묵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치밀어오르는 정의감-선각적인 여성의식이 독립을 위해, 여성도 동등하게 역사의 주인으로 참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대구감옥에 수감되기 전에, 마리아는 이미 1919년에 서대문감옥에 6개월간 수감된다. 이화, 정신, 진명, 경성여고보 등 시내 여학생들이 상복차림과 짚신을 신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1919년 3월 5일의 일이다. 이때 돌진하던 한 처녀의 두 손이 일제에 의해 끊어졌다. 독립운동사에서 첫 피를 흘린 건 여학생이었다. “동지의 피를 보면, 흥분한다는 말이 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앞뒤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얌전하게 있어 주었으면 좋았을 여학생들의 만세 운동과 두 손이 잘려나간 동지의 피. 분노는 들끓기 시작했고, 여학생들의 독립운동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번져나갔다. 반만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여성들. 그들의 분노의 질주가 폭발했다. 그들은 끌려가서 성폭행과 치욕적인 고문을 받았으나, 풀려나면 비밀문서를 인쇄, 등사, 배포와 통신 대부분은 여자의 손으로 이뤄졌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독립신문사 터를 찾기 위해 배재학당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배재학당에서 정동교회 가는 길에 여학생들을 형상화해 놓은 조형물이 바로 그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학생 두 명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한 명은 초롱불을 한 손에 들고 있고, 한 명은 등사기로 뭔가를 등사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 위해 일제의 눈을 피해 숨어서 작업을 하는 것이리라. 여성 또한 ‘역사의 주인’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 다시 김마리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3월 5일 여학생들의 만세 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김마리아, 황에스더, 박인덕, 나혜석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지금의 필동 왜성대-총독부 경무총독부, 종로경찰서에서 심문 후 서대문감옥으로 보내졌다. 이들에게 가해졌을 고문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때 일본 검사는 마리아에게 “쓸데없는 일을 그만두고, 현모양처가 돼라”라고 했다. ‘현모양처’라는 낱말은 참 좋은 말이다. 유교적인 윤리관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여인의 지고지순한 존재감이 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동경유학을 통해, 큰 세계관을 접하게 되었기에, 마리아가 현모양처가 되는 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러 떠났던 일본 유학. 1919년 10월 19일, 마리아가 애국부인회를 만들게 되었던 정신적 동기가 되었던 것도 일본 유학에서였다. 나라를 잃고 동경에 유학을 온 남녀학생들의 결속력은 대단했다.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서 그들은 한마음으로 뭉칠 수 있었다. 조국의 앞날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인 것에 비분강개(悲憤慷慨)했던 수재들. 그들은 2·8 독립을 계획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마리아는 여성의 정체감을 직시하게 된다. ‘조선 여자유학생 친목회장’의 자격으로 자금 30원을 헌납했음에도 남학생들 대표 11명만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다. 여학생은 종이 귀퉁이에조차 이름 한 글자 끼워주지 않는다. 나라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은 여학생들도 한마음인데, 여자는 동등하게 거사에 참여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마리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따돌림”, “소외감”, “역사에 주인이 되지 못하는 여성의 사회, 존재적 지위” 등으로 자존심이 무너졌을 것 같다. 이 자존의식이 마리아로 하여금, 졸업을 두 달 앞두고 귀국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2·8 독립선언서를 미농지에 열 장 베껴서 오비(띠)-일본 여자 옷을 매는 커다란 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긴다. 그 옷을 입고 부산항에 무사히 내린다. 광주 서석 의원(고모부 병원)에서 수백 장을 복사하여 서울로 나른다. 조선의 잠자고 있는 여성들에게 2·8 독립의 의지를 전하고 동참을 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조선에 있는 어른들께도 2·8독립선언서를 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마리아는 1919년 3월 6일 정신학교 교무실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난다(1919년 8월 4일). 이 일에도 B.W.Billings 박사가 보석금 15불을 냈기에 박인덕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마리아는 석방된 지 두 달 만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회장을 맡는다. 조직한 지 한 달여 만에 회원이 2천여 명이 되었고, 간도와 하와이까지 지부를 설치했다. 군자금 6천 원을 임시정부에 보낼 정도로 적극성을 띠었다. 서대문감옥에서 김마리아가 받은 고문은 마리아에게 어떤 영향도, 독립운동에 대한 행보를 멈추게 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더욱 박차를 가했는지도 모른다. 1919년 11월 1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앞으로 군자금 2천 원과 부인회 취지문을 김근포(金槿圃) 명의로 보내는 당찬 모습을 보인다. “1919년 9월 11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 헌법에 인민 평등-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 인민 전체에 재함(제1장 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하다(제1장 제4조)”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으므로 그 조항에 힘입은 행보였을 것이다. 남녀가 평등하므로, 애국부인회에 속한 회원들도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며 항일 민족운동을 함께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방일 것이다. 그러나 조직한 지 한 달 10여 일 만인 11월 18일에 핵심 간부 18명을 포함하여 52명 등이 일경에 연행되어 실제적인 활동은 막을 내린다. 정신학교 동문이며, 애국부인회 회원이었던 동지 오현주의 밀고에 의한 것이었다. 예수가 가룟 유다에 의해서 팔려가듯이, 동지의 배반으로 마리아는 씻을 수 없는 고문으로 고통을 받는다. 사실, 여자들에겐 많이 가르치지 않던 가부장 사회. 여성이 남성과 의무와 권리가 동등하다고 주장하던 김마리아의 애국부인회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국권까지 빼앗긴 당시에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동등한 평등권이 있다는 마리아의 주장은, 마리아의 온몸이 부서지는 희생이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었을 것이다. 마리아 선생은 목련꽃을 좋아하셨을까? 장미꽃을 좋아하셨을까? 피우지 못한 꽃송이의 아픔-꽃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몇 주 전, 정신학교 교정에 들어서서 교감 선생님을 뵈러 1층 로비에 들어섰다가 김마리아의 초상화를 보았다. 벽에 걸린 그녀의 초상화. 짧은 서양식 커트 머리에 서양식 복장을 하고 있다. 두툼한 입술과 겸손한 눈빛. 그러나 어딘지 우수에 찬, 애련한 표정이 안타깝다. 다 펼치지 못한 소원-꿈이 눈망울 속에 가득 들어있는 듯한 애잔함이 느껴진다. ‘일본, 중국, 미국 여러 대학에서 공부를 많이 한 당당한 신여성-그러나 일제에 의해 맘껏 나래를 펼치지 못한 이 여성’이 난초처럼 고결하게 이 학교에 피어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해본다. 강소이 지금 당신이 어떤 세상에 계신다면, 그곳에서는 저고리 섶이 짝짝이가 아닌 자태 고운 한복을 입고 계시면 좋겠어요. 그 나라에서는 예쁜 꽃향기도 맡으시며 평안하시길 여기저기 아프지 마시고 고통도 통증도 없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당신을 꽃으로 지으신 조물주께서 당신의 꽃잎을 떼어내고 짓이겼던 그들을 용서하실까요? 당신이 꽃들의 평등을 이루고 싶었던 일들은 우리 후손들이 할 거니까요 인간은 남녀가 평등하지요 누구나 인간은 존엄하지요 정신학교에 김마리아 열사도, 이화학당의 유관순 열사도 서훈의 등급에 의해 독립운동의 무게가 기려지는 게 아닐 거예요 마리아님이 행했던 행보, 품었던 포부를 우리들은 아니까요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고 기릴 거니까요. 당신의 값진 고생에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당신 동상 앞에 분홍빛 꽃바구니 한가득 놓으렵니다.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아프지 마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