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03] 항일독립운동의 성지 밀양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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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의 만세운동, 김원봉·윤세주 그리고 의열단
해천 물줄기 따라
뜨거운 역사 장엄하게 흘러
글 | 편집부 사진 | 의열기념관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가 말한 이 짧은 대사는, 신기하게 뇌리에 깊게 박혀 밀양과 김원봉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밀양 여행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3·13만세운동에 이은 8번의 만세시위, 김원봉·윤세주와 의열단 등 항일투쟁의 뜨거운 역사가 해천(垓川) 물줄기를 따라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015년, 천만 영화 ‘암살’이 인기를 얻으며 밀양은 다시 우리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극중 약산 김원봉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를 찾으며 했던 짧은 대사 덕분에 김원봉과 의열단,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밀양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생가지가 밀집해 있는 해천을 따라 ‘항일운동테마거리’가 조성되었다.
의열투사들이
태어나 자란 해천(垓川)

해천가의 내일동과 내이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배출한 역사적 공간이다.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인 의열(義烈) 투사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의열단장 김원봉도 여기서 태어났다. 김원봉의 절친이었던 윤세주와 황상규, 김대지, 권삼술, 홍재문, 윤치형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어린 시절을 해천에서 보냈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는 태극기의 종류와 변천사를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하천 양쪽에는 태극기를 비롯해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알리는 깃발들이 당당하게 나부끼고 있다. 김원봉과 그의 아내이자 동지였던 박차정, 의열단 창단멤버이자 3·13만세운동의 주역인 윤세주 벽화가 나란히 있다. 밀양지역 독립운동가 80여 명의 명패도 보인다. 그 명단에는 오직 한 사람, 약산 김원봉만이 아무런 훈장도 표창도 없다. 남한에서는 월북을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언젠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길 바라본다.
큰 벽을 가득 채운 조선의용대의 사진과 항일 선전구호는 유독 시선을 압도한다. 사진 속 투사들의 희미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매순간 죽음의 벼랑 끝에 서서 불꽃처럼 살았던 그들의 삶이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독립무장부대였던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국 한커우에서 김원봉, 윤세주를 비롯한 100여 명을 중심으로 창립되어 전시공작 활동, 일본군 적진탐지 및 정보수집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3·13만세운동을 그린 만화도 흥미롭다. 밀양 만세운동은 3월 13일 밀양 장터에서 시작해 4월 10일 청도면까지 8번에 걸쳐 이루어진 영남지역 최초 독립만세운동이었다.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굴하지 않았던 밀양시민들의 항일독립운동이 놀랍고 또 눈물겹다. 해마다 3월 13일이 되면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여 3·13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연다고 하니, 내년에는 꼭 한번 들러보리라 기약해본다.
남북에서 모두 잊힌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의열투쟁의 역사와 배경을 정리한 연대표가 관람객을 맞는다. 1906년 2월 기산도 선생의 의거를 시작으로 1945년 경성부민관 폭탄투척 의거까지 총 40여 건의 투쟁 기록이 있다. 그 옆에는 밀양 출신 3인이 서명했던 대한독립선언서가 전시되어 있다.
밀양이 의열투쟁의 본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지역적 특성과 원동력을 알려주는 코너도 흥미롭다. 안중근·윤봉길 의사 등의 의열투쟁과 조선의용대 시절 김원봉의 연설 영상도 감상할 수 있다. 학창 시절부터 웅변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는 당찬 목소리와 눈빛은 여전히 뜨겁다.
1898년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 57번지(현재 밀양시 노상하길 25-12)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일찍부터 항일 독립의식이 투철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일본 왕의 생일축하 행사를 위해 나눠준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버렸다니 배포가 어른 못지않다. 그로 인해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그는 자퇴해야 했다. 당시 이 거사를 함께한 인물이 세 살 어린 이웃동생 윤세주였다. 훗날 두 사람은 의열단을 만들면서 평생 동지가 된다. 의열기념관 바로 옆 공터가 윤세주의 생가 터다. 그의 집 앞에는 손수 지은 항일가 ‘최후의 결전’이라는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마침내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세운 김원봉은 만주로 떠나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밀양에 남아 3·1운동을 주도한 윤세주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만주의 약산을 찾아갔고, 그해 11월 중국 길림에서 조선 청년 10여 명은 “천하의 의(義)로운 일을 열(烈)렬히 실행하기로 맹세”했다. 이름만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의열단이 탄생한 것이다. 의열기념관 2층에는 당시 이들이 모여 의열단을 결성한 ‘반씨 주택’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
1920년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의사의 석고상과 밀양경찰서 폭탄의거를 웹툰 형식으로 제작한 동영상도 볼만하다. 조선의용대와 박차정 열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약산의 아내 박차정은 결혼 전부터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고 의열단원 오빠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망명, 자신도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과 결혼했다. 이후에도 박차정의 항일운동은 지속되었으나 해방 1년을 남기고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