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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04]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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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면 오늘이 보이고  

내일 할 일이 보인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옥바라지 골목은 서울 종로구 무악동 46번지 일대에 있었던 골목이다. 서대문 형무소 및 그 후신인 서울구치소의 수감자들을 옥바라지 하기위해 가족들이 머물렀다. 일제 강점기 때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 여사도 그곳에 머물렀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도 그랬다. 옥바라지 골목은 고급 아파트 단지가 되어 사람들의 둥지가 되었다. 아프고 고단한 역사의 흔적은 글과 사진으로만 남을 것이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니, 지난 것은 지우고 없애고 사라져버리는 것이리라.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아팠던 역사의 페이지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몸을 어디에 누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주로 여인들이 몸을 누이고 머무르곤 했던 골목이 있다. 독립문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커피전문점, 옷가게, 만두가게, 미용실도 눈에 뜨인다. 그 상점들 뒤편에 여관 골목이 있다. 어둡고 쇠락해버린 뒷골목의 모습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여관 골목은 여인들로 성시를 이뤘었다. 


 일제 강점기 때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 여사도 그곳에 머물렀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도 그랬다. 그 여인들이 여관에 머물면서 두 다리를 편히 뻗고 몸을 눕혀 편한 잠을 청할 수 있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우리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독립투사들의 아낙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 당시 독립투사들의 대부분이 남성들이었고, 남편이나 아들이 형무소에 투옥되면 그들을 면회하는 여인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열흘이고 한 달이고 몇 달씩 머물던 곳이 서대문형무소 건너편 옥바라지 골목이었다. 


 종로구 무악동이다. 그곳을 재개발 지역으로 묶은 것은 2004년의 일이다. 2011년 11월에는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골목길 해설사의 해설 코스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지 오래다.  


아들·남편들을 먹여 살렸던

옥바라지 골목의 풍경화


역사의 흔적과 자취가 사라지기 전에, 그 골목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사진을 찍으러 간 적이 있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때 김구 선생 모친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작은 키의 억척스러운 황해도 여인, 곽낙원 여사가 골목을 바삐 오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었다. 그때 사진을 찍어두고 그 골목길을 둘러보지 않았다면,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옥바라지 골목은 고급 아파트 단지가 되어 사람들의 둥지가 되었다. 아프고 고단한 역사의 흔적은 글과 사진으로만 남을 것이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니, 지난 것은 지우고 없애고 사라져버리는 것이리라.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아팠던 역사의 페이지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역사를 알면 오늘이 보이고 내일 할 일이 보인다”고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 감옥)에 투옥되었던 김구 선생을 그녀는 찾아온다. 황해도 안악의 가산을 팔아 수백 리 한성으로 와서 아들에게 밥을 넣어준다. 그 때 그녀가 머문 곳이 옥바라지 골목이었다. 그 당시 일본이 독립투사들을 투옥해 놓고 밥을 제대로 주었겠는가? 어느 어머니가 자식을 굶기려 할까? 곽낙원 여사뿐 아니라 옥바라지골목의 모든 여인네들이 그랬을 것이다. 차가운 형무소 바닥에서 쪽잠을 자며 고문을 당할 지도 모르는 남편, 아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었을 여인들. 그들은 삯바느질과 가정부 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들의 아들, 남편들을 먹였다. 그것이 그 당시 옥바라지 골목의 풍경화였다. 


 그 여인들 중 한명이었던 곽낙원 여사는 1939년 중국 중경에서 사망하여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48년 고국으로 이장된다. 정릉 산골에 누워있던 그녀는 지금 대전 현충원에 큰 손자 김 인과 함께 누워있다. 그녀의 묘비에는 ‘애국지사 곽낙원의 묘’라고 쓰여있다. 지금은 두 다리를 쭉 뻗고 편히 누워계신지 묻고 싶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녀의 묘가 현충원에 모셔진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한 독립투사들이 한둘이었겠는가? 독립투사들에게는 모두 어머니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들이 모두 현충원에 묻히지는 못했다. ‘애국지사 000의 묘’라는 묘비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곽낙원 여사에게는 그것이 주어졌다.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에 대한 예우였을까? 그 예우로 ‘건국훈장 애국장(1992년)’을 국가에서 그녀에게 수여했을까? 독립운동가들 중에 거성(巨星)인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유관순 등의 어머니들에게는 어째서 그런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백범 어머니에서 독립투사로…

회초리 내리치며 일벌백계


1875년에 황해도에서 출생, 14세에 결혼하여 17세에 김구 선생을 낳았다는 사전적인 지식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 김구만을 바라보며 살았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시대 모든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그러나, 아들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룬 이는 곽낙원 여사밖에 없을 것이다. 남편 김순영과 함께였다. 남편이 세상을 뜨기 전의 일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치하포에서 일본인(츠치다)을 맨주먹으로 때려 죽인 이가 있었다. 김구 선생이 한 일이다. 의분과 의협심이 그 일을 하게 했을 것이다. 그 일로 김구 선생이 체포되어 형무소를 전전할 때 매일 아들을 면회하며 격려하던 그녀였다. 형장에 이슬로 사라질 아들에게 “나는 네가 경기 감사하는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라고 격려하며 의로운 일을 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녀였다. 김구 선생이 감옥에서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탈옥하는 데 성공하여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일본은 김구의 부모를 피체하여 투옥시켰다. 


 의협심이 강한 그녀가 감옥에서 어찌 지냈으며 어찌 출옥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알 길은 없다. 모진 심문과 고문에도 김구의 행방을 털어놓지 않았다. 곽낙원 여사와 부친 김순영은 아들대신 고문당하다가 처형되더라도 아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목숨을 건 일본과의 항쟁이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생은 평범한 아낙을 넘어서 일제에 항거하는 의지의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이 11년 형을 받았다가 고종의 특사로 5년만에 석방이 되지만, 김구 선생과 그의 모친은 요주의 인물로 늘 일제의 감시를 받았으며, 김구 선생이 몇 차례 투옥될 때마다 그녀의 옥바라지 고생은 이어졌다.


모든 투사들의 아낙들

‘애국지사’ 칭송 받아야  


  1939년 80세의 일기로 중국 중경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아들의 독립운동에 동행하는 동지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항저우-충칭으로 숨어 다닐 때마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함께 했다. 아들을 사랑하여 아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모성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그녀가 보인 몇 가지 사건들은 한 어머니의 모성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구 선생을 따르는 청년들과 김구의 동지들이 돈을 모아 생신상을 차려주려 하자, 그 돈에 쌈짓돈까지 보태어 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운동에 쓰라”고 했다는 일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생일상 차리기를 포기하고 총을 사온 그녀의 선택은 모성을 뛰어넘은 독립투사의 의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서 그녀를 애국지사라 칭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 야채상들이 버린 쓰레기장에서 먹을 만한 것을 추려 배추 시래기죽을 끓여 임시정부 요원들을 먹였다는 일화도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당시 임시정부의 재정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임시정부 월세 돈을 밀리기 일쑤였고, 요원들은 굶주렸다. 곽 여사는 구걸을 하기도 하고 모금을 하기도 하고, 쓰레기장을 뒤지기도 하면서 그들을 먹였다. 자식을 먹이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본능이라고 해두자. 그녀는 아들 김구와 임시정부의 어머니가 되어 그들 모두를 먹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이 50이 넘은 김구 선생의 종아리를 때리며 아들을 다스렸다.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하기 며칠 전이었다. 나 의사는 자신의 옷을 저당잡힌 돈으로 고기와 반찬거리를 사서 곽 여사에 전했다. 김구 선생의 생일상에 놓으라고… 손님이 돌아가자 곽 여사는 아들의 종아리를 호되게 때리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사사로운 생일상을 받느냐?”고 야단을 쳤고, 김구 선생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했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후, 하와이 교민과 각계에서 군자금과 기부금이 들어와 궁핍을 면하게 되었다. 어느 젊은 임시정부 요원이 “돼지고기라도 좀 사서 먹었으면… 라고 말하자 곽 여사는 “동지의 피값으로 고기를 구워먹자고? 독립군의 자격이 없다”고 하며 그 청년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쳤다고 한다. 서슬퍼런 그녀의 회초리는 굶주림과 궁핍한 가운데서도 독립운동을 하게 했던 상해임시정부의 혹독한 호랑이 선생님이기도 했다고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어머니를 회고했다. 임정이 호남성 성도 장사(長沙)에 잠시 머물렀던 시절 불만세력으로부터 김구 선생이 저격을 당해 입원 가료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때도 곽 여사는 김구 선생을 혹독하게 야단친다. “왜놈 총에 맞아죽어야지 동포의 총에 맞는다는 것이 왠 말이냐? 무슨 잘못을 했기에 동포의 총에 맞았느냐?”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원로 위치였던 이동녕, 이시영 선생도 곽 여사 앞에서는 꼼작을 못했다. “영감들 그만 입 다물고 다들 나가시오.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일할 수 있도록 놔두란 말이요.” 이렇게 원로들을 나무랐고, 그들은 곽 여사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로서 아들을 먹이고 후원했던 그녀. 그 당시 상해임시정부 요원으로 와있던 이들을 따라오거나 뒤늦게 찾아온 그들의 아내들이 있었다. 곽여사는 그 여인들을 규합하여 상해, 충칭, 난징 등에서 여성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도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 가난하여 장가를 못가고 있는 가난한 김순영에게 시집을 갔던 가난한 집 아낙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독립운동을 하라고 강요한 이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 곁에서 아들을 돕고 뜻을 같이 하며 점차 의식화되어 아들과 아들의 동지들까지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된 것이리라. 그래서 그녀를 김구 선생의 어머니를 넘어 임시정부의 어머니로 보는 것이다.


  자식을 버리는 여인이 있다고 간혹 들은 적이 있다. 곽낙원 여사는 아들을 버리지 않았다. 아들이 가는 곳이면 인천교도소이든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이든 상해임시정부이든 중국 남경, 중경… 의로운 일에 동행하며 뜻을 다하여 버팀목으로 김구 선생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김구 선생의 모친만이 ‘애국지사’라는 칭송을 얻고 기려질 일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김구기념관에 청동상으로 서있는 곽낙원 여사 - 치마끈을 질끈 동여맨 고단한 여인, 한 손에는 아들에게 먹일 밥박아지를 들고 있는 여인상(女人象) - 는 그 시대 모든 독립투사들의 아낙들의 모습이라고, 옥바라지 골목의 여인들 모두가 다 독립투사들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 여인들의 질곡의 골목은 우리들에게 기억되어야 한다. 들꽃 향기 짙은 무악재 고개 너머 저 멀리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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