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Inside

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04] 서울 강북구 수유리 순국선열묘역 순례길

페이지 정보

본문

역사를 가슴에 품고 북한산 숲길을 걷다  


오늘의 봄날이 더 소중한 까닭


글·사진 | 편집부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는 애국지사와 민주열사 등의 묘역이 많다. 국립4·19민주묘역은 물론 후손이 없는 17위 무후 광복군 합동묘역, 이시영·이준·신익희·신하균·김창숙 선생 등 조국독립에 목숨 바친 순국선열의 묘역이 북한산 둘레길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 안내 표지판이 잘 정리되어 있어 모처럼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도 크다. 청명한 계곡 물소리,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빛나는 북한산 숲길은 더없이 상쾌하다. 


4·19카페거리에는 봄날을 즐기러 나온 이들로 제법 북적였다. 테라스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연인들 얼굴 위로 따사로운 봄 햇살이 반짝였다. 기분 좋은 봄날이다. 백련사 가는 길 계곡물이 어찌나 맑은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연둣빛 작은 잎사귀들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산수유 꽃이 봄의 전령사인 듯 노란 꽃망울을 터트렸다. 계곡 모퉁이엔 개구리 알들이 빼곡했다. 수백 마리 올챙이가 태어나겠구나. 어디 올챙이뿐이랴. 봄의 온기를 머금고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있을까.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봄은 얼마나 소중한가. 문득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떠올랐다. 1901년 4월 5일 봄날에 태어나 해방을 앞둔 1943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난 봄의 시인.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빼앗긴 들에서 봄을 기다렸던, 36년이라는 기나긴 일제강점기 폭압 속에서도 끝끝내 봄을 포기하지 않았던 순국선열을 생각하니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봄날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아있는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배우고 느끼다


  아름다운 봄날, 순국선열 묘역을 찾아 나섰다.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에는 순국선열의 묘역이 많다. 백련사 쪽으로 향하면 심산 김창숙 선생, 동암 서상일 선생, 현곡 양일동 선생, 상산 김도연 선생, 강재 신숙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또한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향하면 이시영 선생과 인근에 무후 광복군 합동 묘역, 김병로 선생, 이준 열사, 신익희·신하균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통일교육원 내에는 이명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오늘은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시작해 ‘초대길’을 따라가며 ‘초대(初代) 4인방’을 뵙고 북한산 둘레길 2구간인 ‘순례길’을 걸으며 순국선열 묘소에 참배하는 코스로 정했다. 초대 4인방은 우리나라 초대 검사인 이준 열사(1세대 검사)를 비롯해 초대 국회의장 신익희(입법부),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사법부), 초대 부통령 이시영(행정부) 선생을 일컫는 말이다. 


출발지인 근현대사기념관 앞 보행로 언덕에는 14명의 순국선열·애국지사 흉상이 놓여 있었다. 각 특징을 잘 살려 정성스레 빚은 흉상과 정갈하게 업적을 정리한 문구에서 만든 이의 진심이 엿보였다. 가끔 순국선열 관련 유적지에 갔을 때 존경과 사랑을 담지 못한 조형물을 보며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 일렁이곤 했었는데, 모처럼 흐뭇하고 만족스러웠다.   


코로나19로 인해 근현대사기념관은 닫혀 있었다. 아쉬웠다. 근현대사기념관은 동학농민운동부터 의병전쟁과 3·1독립운동, 4·19민주혁명에 이르는 우리 근현대사의 다양한 사료와 유물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으로 2016년 개관했다. 기념관 옆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디테일이 돋보이는 ‘독립민주기념비’다. ‘독립’과 ‘민주’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일제강점기 때 조국독립을 위해 싸운 순국선열·애국지사의 모습과 광복 후 독재 정권에 항거한 이름 없는 열사들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기념관을 지나 올라가면 북한산 둘레길 2구간인 ‘순례길’ 입구와 노란색 ‘초대길’ 표지판이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면 아카데미하우스 오른쪽으로 아카데미탐방지원센터가 있고 ‘북한산국립공원 독립유공자 묘역 안내도’가 보인다. 전체적인 묘역 위치를 미리 체크해도 좋고, 그냥 표지판을 따라 걸어도 무방하다. 길 표시가 정성스럽고 묘역 정비가 잘 되어있어 찾기가 쉽다. 


아주 특별한 초대, 

‘초대길’을 따라가다


  계곡물이 고불고불 산길을 따라 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랫소리는 더없이 청아했다. 봄을 잉태한 숲의 생명력에 온몸 가득 푸른 기운이 솟구치는 듯했다. 대자연의 축복이요 희망이다. 무엇보다 자원봉사 조끼를 입고 바지런히 숲길을 걸어 다니는 이들 덕분에 숲길 어디를 가나 너무 청결했다. 후손들의 정성을 보며 순국선열들이 미소 짓고 있으리라. 


어느덧 신익희 선생 묘역에 다다랐다. 선생의 업적을 써놓은 안내판과 ‘큰 산 신익희’라는 시 한 편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익희 선생은 임시정부 내무부장·외무부장을 역임했고,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공헌했다. 묘역 근처에는 장남 신하균 선생의 작은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란색 초대길 표시를 따라가니 이준 열사의 묘역이 나왔다. 1895년 최초 설립된 대한제국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1세대 검사로, 부정부패와 비리척결에 앞장섰으며 신민회를 조직해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되어 일제 침략의 불법성과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치 못하자 연일 애통해하다가 7월 14일 순국했다. 1963년 헤이그 공동묘지에 있던 유해를 옮겨와 이곳 선열묘역에 안장했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숲길 양쪽에는 조국을 향한 열사의 충정이 담긴 새겨진 빗돌이 놓여 있다.


세 번째 묘역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 선생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순창읍 일인보좌청을 습격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이후 광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원산파업사건 등 독립운동 관련 사건의 무료 변론을 도맡아했다. 해방 후 초대 대법원원장을 지냈다. 


  김병로 선생 묘역에서 오른쪽 계곡을 건너면 길게 뻗은 계단길이 나타난다. 그 길 끝 언덕 위에 이시영 선생이 잠들어 있다. ​17세 때부터 형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형제들의 재산을 몽땅 정리해 만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한인자치와 독립군 양성을 위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해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시영 선생 묘역으로 오르다보면 색다른 조형물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애국선열 17위를 모신 ‘광복군 합동 묘역’이다. 1967년 광복군 동지회에서 조성했고, 1985년 국가보훈처에서 새롭게 단장했다.


순국선열의 얼이 아로새겨진 

‘순례길’을 거닐다


순례길 2구간을 따라 산길을 내려가다 섶다리를 지나면 단주 유림 선생의 묘가 나온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손가락을 잘라 ‘충국애국’의 혈서를 썼으며, 1946년 아나키스트당인 독립노동당을 창당해 초대 당수로 취임하기도 했다. 


백련사 쪽으로 가면 서상일 선생의 묘가 나오고, 근처에는 양일동 선생과 김창숙 선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동암 서상일 선생은 1909년 국권회복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과 1910년 광복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후 제헌국회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현곡 양일동 선생은 1930년 중동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해 퇴학을 당했고, 1931년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연맹과 1932년 조선동흥노동연맹에 가입해 각종 출판물을 통해 항일의식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광복 후 3대·4대·5대 민의원과 8대·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반대와 을사오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려 옥살이를 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파리장서를 알리는 데도 주력했다. 이후 1925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이승만 정권에 항거, 부정선거를 규탄하기도 했다.


김창숙 선생 묘에서 조금 내려와 왼쪽으로 300미터쯤 가면 김도연 선생의 묘와 신숙 선생의 묘가 나온다. 상산 김도연 선생은 1919년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서에 참여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이다.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제헌국회 의원을 거쳐 초대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3대·4대·5대 민의원과 부의장, 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강제 신숙 선생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교정 및 인쇄해 배포했다.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도 활약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