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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2021/04] 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진경시대 산수화·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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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 주목하며 한국의 독창적인 미 창조  


문화민족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다


글 | 편집부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도, 6·25전쟁 중에도 예술을 꽃피워낸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민족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피란수도 부산에서 제1회 현대미술작가초대전이 열렸다 하니, 예술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때 고희동, 김은호, 이중섭, 김환기 등 현재 대한민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대거 참가해 예술혼을 불태웠다. 과거 중국 화풍을 모방해온 한국의 회화가 새로운 독창성과 자주성을 표방하며 비약적 성장을 이룬 시기는 ‘한국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조선 후기였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진경시대, 한국 회화의 찬란했던 전성기를 감상해보자.    


진경(眞景), 

참된 경치에 눈을 돌리다


18세기 조선 후기는 새로운 양식을 구축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르네상스’라 불린다. 그중에서도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이 활동했던 진경시대는 한국 회화가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전성기였다. 진경시대는 숙종 대에서 영조 대까지로, 조선 후기 사회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문화인 진경문화를 이루어낸 시기를 의미한다. 


우리에겐 ‘진경산수화’가 더 친숙하지만, 진경시대에는 산수화와 풍속화가 함께 꽃피웠다. ‘진경(眞景)’은 말 그대로 참된 경치를 뜻한다. 그렇다면 참된 경치란 무엇일까. 진경시대 화가들이 생각했던 진경은 바로 우리의 산천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었다. 


이전에는 우리의 것을 그린 작품이 적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유형화된 표현법으로 그렸기 때문에 우리만의 독창성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조선의 그림인지, 중국의 그림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세태를 회의적으로 바라본 당대 문인과 화가들은 점차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 경관과 소박한 조선의 생활상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중국의 화풍을 모방해오던 조선의 회화는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경험하며 그 양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양란의 여파로 1644년 명이 청나라로 교체됨에 따라 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붕괴되었고, 명을 숭상하고 그 외의 종족을 오랑캐라 칭하고 배척하던 조선의 정체성까지 크게 뒤흔들었다. 


조선 사회는 전란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침략자인 청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고취하는 것으로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조선이야말로 예의를 숭상하고 인륜을 지키는 도덕적 문화 국가의 핵심이라 자부하면서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임을 천명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며, 회화사적으로는 중국풍의 산수와 단절하고 우리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산수화, 조선의 대자연을 그리다


조선의 문화적 고유성은 산수화에서 시작됐다. 당대 화가들은 대체로 양반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서민들의 삶을 다루는 풍속화로 발전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먼저 등장한 진경산수화는 점차 중화풍의 산수 표현법을 탈피해갔으며 조선의 기후와 지형에 걸맞은 화법을 새롭게 정립해나갔다. 대표적인 화가는 진경산수화의 화법을 완성한 겸재 정선이다.


진경산수화가 겸재의 손에서 완성되기까지 조선의 독자성을 형성하기 위해 고심한 여러 인사의 사상적, 문화적 움직임이 있었다. 문학에서는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이 가사문학으로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열었고, 글씨에서는 석봉 한호(韓濩, 1543-1605)가 송설체를 뛰어넘는 조선 고유 서체인 석봉체를 이루어냈으며, 그림에서는 창강 조속(趙涑, 1595~1668)이 전국을 유람하면서 경개 절승의 감흥을 읊고 그림으로써 진경시화의 기틀을 닦았다.


겸재 정선은 이상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어 오던 중국의 여산이 아닌 조선의 금강산을 선택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 <금강전도>에서는 고정된 시점이 아닌 다양한 곳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풍경을 한 장면으로 조합해 이전의 형식화된 중국식 산수 배치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더불어 토산과 화강암 산이 공존하는 조선 산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중국의 남·북방의 화풍을 융합한 양식은 진경산수화의 독특성을 드러냈다. 

 

풍속화, 

우리의 삶을 화폭에 담다


  산수화에 이어 사람들의 생활상이 담긴 풍속화가 성행하면서 진경시대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이 시기의 풍속화는 농사일과 같은 생업활동, 빨래를 하는 여인들처럼 주로 서민들의 생활 속에 담겨있는 재미있는 소재를 포착해 해학이 넘치는 미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양반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일반 서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후기 풍속화는 대체로 왕실이나 양반 등 지도자층의 행사를 소재로 다루던 기록화 성격의 전기 풍속화와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 후기 진경시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는 단원 김홍도였다. 당대 문화적 부흥을 이끌었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그는 서민과 사대부를 아우르는 계층의 평범한 일상을 그렸다. 그중에서도 서민층의 생업 장면과 민속놀이를 주로 포착하고, 공간감이 느껴지는 구도와 익살스러운 표정 묘사를 통해 역동적이고 활기가 느껴지는 순간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중 <씨름>은 대표작이다. 씨름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래위로 호를 그리는 원형의 구도는 감상자에게 안정감을 주면서 화면 중앙의 씨름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유도한다. 또한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이 모두 달라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는데, 서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씨름꾼들, 예측할 수 없는 경기에 입을 벌린 사람, 거기에 태연자약하게 엿판을 메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 젊은 엿장수의 모습은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단원이 그려낸 다채로운 표정들은 감정을 극도로 절제한 조선 전기의 그림들과 달리 삶의 현장과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김홍도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혜원 신윤복 역시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신윤복은 사람들의 즉흥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스타일에서 김홍도의 작품과 유사하지만, 소재의 선정이나 구성 면에서 또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는 양반층의 풍류와 남녀 간의 연애, 기녀와 기방의 세계를 도시적 감각과 해학으로 펼쳐 보였으며 가늘고 유연한 선과 원색의 산뜻하고 또렷한 색채 사용, 현대적인 구도와 독특한 상황 설정으로 조선시대 풍속화의 영역을 보다 다채롭게 넓혀 주었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무엇보다도 남녀의 애정행각을 다룬 에로틱한 표현의 춘의도가 많다. 이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폐쇄성에 반하는 획기적인 일로, 양반귀족들의 위선과 불륜을 대담하게 파헤치고 풍자하면서 그동안 은폐되었던 인간의 본성을 화폭에 담아냈다. 또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존재감을 얻지 못했던 여성들을 작품에 등장시키고, 더욱이 조선시대 가장 천한 신분에 속했던 기녀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끌어냈다. 


신윤복은 풍속화를 통해 시대를 고발하거나 비판하기보다 현실을 긍정하고 낭만적인 풍류와 해학을 강조했다. 그의 작품은 조선시대 사회풍속의 숨겨진 이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미술사 연구뿐 아니라 동시대의 생활사와 복식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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