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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05] 소녀상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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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아픔 보듬고 

하얀 나비야 훨훨 날아라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앞모습은 단발머리의 15~17세가량의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등 굽은 쪽찐 할머니의 모습이다. 가슴엔 하얀 나비가 한 마리 날아오르고 있다. 할머니의 가슴에서 피어오르고 싶은 자유와 평화. 비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소녀상은 두 주먹을 꼭 쥐고 있다. 힘없는 소녀가 울분에 차서 여린 손으로 주먹을 꼭 쥐지만 그 주먹으로 가슴에 맺힌 한을 다스릴 수 없는, 차라리 처절한 모습이다. ‘얼마나 가슴이 탔을꼬. 할머니들의 아픔이 얼마나 쓰라렸을꼬.’ 


지난 2월 초, 마산 여행에서 허당(虛堂) 명도석(明道奭, 1885~1954) 선생의 기념비를 찾으려고 길을 물었다.


“코어 4거리에 가면 ‘소녀상’이 있으니, 거기 가서 물어보면 알 것이네요.”


‘소녀상? 소녀상이라니….’


소녀상이란 말에 새삼 놀라며, 몇 차례 더 물어 마산형무소 터에서 50여 미터쯤 내려가는 순간, 마산 오동동에서 소녀상을 보았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어린 소녀들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지방으로 끌고 간 줄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소녀상을 보니 뜻밖이었다. 


2015년 겨울, 한일 외교부장관 회담에서 ‘위안부에 대하여 보상금 100억을 일본에서 부담하고, 다시는 이 문제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은 민간 사회단체에서 건립한 것이니, 협의하여 철거한다’는 주된 내용의 보도를 들었다. 이런 보도에 우리들 모두 공분(公憤)했었다. 2016년 12월 28일 부산 시민단체들이 모은 성금(8천 5백만 원)으로 소녀상을 세웠으나, 동구청은 몇 시간 만에 소녀상을 철거하고 철거 반대를 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연행해간 사건이 있었다. 뜻 있는 이들의 분노감이 치달을 대로 치달았다. 일본의 눈치를 보는 구청장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울함과 아픔을 치유하며,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하는 정의(justice)는 공권력에 의해 자꾸 짓밟힐 것인지. 분노감을 갖고 떠났던 마산 여행에서 마산의 소녀상이 내 눈길을 잡았다. 소녀상은 하나의 예술품에 불과한 것이라고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소녀의 맨발, 노란 털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가슴을 후벼 파며 통증과 분노가 더 치솟았다.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상처

하얀 나비는 언제쯤 하늘을 날까


  마산 여행을 다녀온 지 40여 일이 지나도 여전히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뭔가에 이끌리듯이 마침내 필자는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을 찾아갔다. 대사관 앞에 소녀상도 맨발이다. 도망갈까 봐 신발을 빼앗았을까. 허겁지겁 끌려나오면서 신발을 못 신었나. 덧버선을 신고 있지만 발꿈치가 들려있다. 일본이 패망하고 그녀들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마음 편하게 정착할 수 없었던 것을 형상화한 것인가. 


‘왜 냉대와 비난을 그녀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받아야 했을까?’


광복이 되었지만, 그녀들이 받은 육신과 영혼의 상처는 씻어지지도, 치유되지도 않은 채 사람들에게 혹독한 대접을 받았다. 아니, 그들은 침묵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했기에.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기까지 그 일은 덮어둔 짐 덩이로 한·일 사이에 풀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었다. 


다시 소녀상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앞모습은 단발머리의 15~17세가량의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등 굽은 쪽찐 할머니의 모습이다. 가슴엔 하얀 나비가 한 마리 날아오르고 있다. 할머니의 가슴에서 피어오르고 싶은 자유와 평화. 비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에서 나비가 날아오르는 것으로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것과 유사하다. 나비의 이미지는 언제나 자유와 부활, 재생을 의미하고 있음이다. 


소녀상은 두 주먹을 꼭 쥐고 있다. 원한에 가득 찬 듯한, 맺힌 한이 주먹 속에서 울고 있다. 그 시대, 힘없는 소녀가 울분에 차서 여린 손으로 주먹을 꼭 쥐지만 그 주먹으로 가슴에 맺힌 한을 다스릴 수 없는, 차라리 처절한 모습이다.


‘얼마나 가슴이 탔을꼬. 할머니들의 아픔이 얼마나 쓰라렸을꼬.’


‘따뜻하게 포근하게 위로해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필자는 울음이 나오려 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사진만 찍었다. 3월인데도 봄바람이 차갑고 매섭게 볼을 때린다. 셔터를 누르는 손이 시려서 몹시 고통스럽다. ‘소녀’가 겪었던 지난날의 고통을 생각하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다. 


 ‘희망나비’ 모임에서 나왔다며 청년들이 그곳을 지키며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저만치에 “한일 위안부 합의는 무효”라고 크게 쓴 피켓을 뒤로 한 채,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위안부에 대해 살펴보았다. 팔이 아프도록 공책에 빼곡하게 정리를 하며 공부를 해도 명쾌하지 않고 머릿속이 답답하기만 하다. 공부하던 중, 부산에 ‘민족과 여성연구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가서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여행 가방을 챙겨 부산행 기차를 탔다. 해녀들 이야기를 쓰려고 제주도로 향하기도 했었는데, 부산은 더 가깝지 않은가. 


아프지만, 꼭 들어야 할

‘소녀들’의 이야기 


 이른 아침에 부산역에 내렸다. 마중 나온 친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었다. 여정에서 그곳을 먼저 보아야 한단다. 

그곳에 도착하니 건물부터 먹색이다. 마치 석탄을 쌓아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의 조형건물이 특이했다. 어디나 그렇듯이 관람객들이 거의 없다. 해설을 부탁해도 해설사가 없다는 답변이다. 우리들은 바닥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계단을 올라 아픈 역사의 페이지를 더듬었다. 강제로 동원되었던 일제강점기 ‘소녀’들에 관한 자료와 함께 그들이 남긴 체험들이 어제 일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에 시달렸던 위안소의 모습도 재현되어 있다. 자그마한 침대와 구석에 놓인 놋대야, 대야 속에 일본군 정액과 함께 소녀들이 흘린 핏물, 비좁은 방마다 나무로 된 소녀들의 일본 이름표는 문패 같다. 부산에 가기 전에 <귀향>이라는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또 아픔으로 다가왔다. 보고 싶지 않은 광경, 보고 싶지 않은 물품들…. 

‘외면하지 말고, 역사를 똑바로 보자’ 고 마음을 달랬지만,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고야 말았다. 


유엔공원 앞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한 후 우리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찾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역사관과는 다른 외관이다. 1층에는 자그마한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그 위 상가 건물 2층과 3층이 역사관이다. 아마도 개인이 운영하는 곳인가 보다 하는 짐작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역사관에는 두 분의 여자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온 여행 작가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자세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왔어요.”라고 말했지만, 어디에도 안내해 줄 만한 청년들은 보이지 않았다. 부산에 사는 친구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알아보려면, “김문숙 선생은 꼭 만나보아야 한다”고 했었다. 


  그날은 운이 좋았는지 거기에 계셨다. 김문숙 선생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시고 최근까지 수십 차례 일본을 다녀온 이야기와 함께 위안부에 대한 재판기록을 보여주셨다. 일본에 재판을 하러 갔었다는 이야기도 생소했지만, 유리관 속에 전시된 재판기록에 관한 설명을 들으니, 놀랍다. 6년 동안 23번 재판을 했다니…….

제2 전시관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 판화 등을 보여주셨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인데, 조그마한 것을 내가 이렇게 확대해서 액자에 넣어 전시해 둔 거예요. 학생들이 더러 공부하러 와서 보곤 해요.” 


그곳에서 본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그림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했다. 화가들의 그림보다 더 강렬하고 통절한 영혼의 외침이 담긴 듯했다.


역사관을 나오려 하니, 김문숙 선생은 필자에게 책을 쥐어주었다. 


짧은 만남이었다. 며칠을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 같다는 소회가 느껴졌다. 부산과 밀양, 양산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는데도 미수(米壽)를 넘긴 김문숙 선생이 자꾸 생각난다. 양산에서 보았던 통도사의 풍경이 아른거릴 때도 김문숙 선생의 표정과 모습이 겹쳐졌다. 미수를 넘길 때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을 위해 일해 오셨다는 것. 남다른 그분의 삶을 보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해 본다. 


  그녀가 준 『들리나요? 열두 소녀 이야기』는 414쪽이나 되는 두툼한 책이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열두 명의 소녀들과의 상담 내용을 그대로 구술(口述)해 놓은 생생한 기록이다.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몰려오는 아픔과 분노를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분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일종의 숙제같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전체 내용을 읽고 나서야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의 전모가 이해되었다.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이해와 함께 김문숙 선생의 노고에 감동되었다. 자신의 사비(私備)를 털어 70년 전 소녀, 할머니들의 아픔을 보듬고 있는 김문숙 선생. 그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정한 친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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