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06] 백정기 의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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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눈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아나키스트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지배와 통제, 압력에 반대하였으며, 일제와 대항하려는 신념을 표출했다.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의 공로를 널리 인정받지 못하여, 민족주의 계열에게도 사회주의 계열에게서도 도외시되었다. 아나키스키들의 직접 행동(의열 투쟁)이 성공하지 못한 거사가 대부분이었기에, 더욱 독립운동사에서 묻혀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나키스트로, 백정기 의사의 사진 속 표정은 분노와 분개, 적개심으로 가득 찬 포효하는 사자의 눈빛이다. 양손으로 허리춤을 짚고 있다. 싸울 기세다. 서대문형무소 담벼락에 붙어있던 여러 열사의 사진 중에서 선생의 눈빛이 매우 반항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눈빛보다 강도가 다른 매서운 표정이다. “던지지 못한 게 억울하다”를 얼굴 표정과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정읍을 찾아가는 길은 온통 눈밭이다. 세상이 하얗다. 그를 찾아 나서는 정읍여행이 두 번째다. 지난 2016년 초가을이었다. 순천에 있는 송광사와 갈대숲을 보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정읍을 지나게 되었다. 정읍에 백정기 의사 기념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도착한 시각이 5시가 넘어서였을까. 해설사의 설명을 요청해도 부재중이고, 기념관도 문을 닫은 상태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주변 풍경만 사진기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관리실에서 나이 드신 분이 나오시더니,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거예요”라고 하면서, 양장본으로 된 두꺼운 책을 내준다.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글을 쓰는데 한참 심취해 있던 시절이라, ‘백 의사에 대해서도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그분에 관한 책을 몇 장 읽다가 미뤄두고 말았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 ‘아나키스트’라는 낱말이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져서 책을 미뤄둔 채 몇 년이 흘렀다.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2015년에 윤봉길 의사에 대한 기행수필을 썼다. 상해, 충남 예산 충의사,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을 모두 둘러보고 쓴 수필이라 내용이 풍부해서 맘이 흡족했다. 2016년 1월에 도쿄 이치카와 형무소 터에 다녀온 후에 이봉창 의사에 대한 기행수필도 완성했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유적지를 더 찾아보기 위해 효창공원을 찾아갔다. 김구 선생 묘 밑에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로운 선비, 의사(義士)라는 것이다. 세 분의 의사 중에 맨 오른쪽에 모셔진 생소한 이름 “백정기”. 낯설다.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물통 폭탄으로 익히 초등학교 때부터 들어온 이름이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 천황을 향해서 폭탄을 던졌던 인물이다. 일본의 심장, 도쿄 경시청 앞에서 던진 폭탄으로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이 의열 투쟁 단체로 만든 한인애국단 1호였다. 윤봉길 의사도 이봉창 의사도 모두 김구 선생이 파견한 의열 투쟁자였다. 생소한 세 글자 “백정기”. ‘3의사 중에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 관련 유적지에 다녀와서 글을 썼으니, 백정기 의사에 대해서도 글을 써야지’라는 생각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채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2017년 3월에 일본 나가사키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나가사키 원폭기념관을 둘러보고, 평화공원을 걷고 있는데, “나가사키 형무소 터”라는 푯말이 눈에 띄였다. 사진을 찍고, ‘이곳이 3의사 중에 한 분인 백정기 의사가 갇혀있던 곳이구나’ 생각만 했을 뿐 글을 쓰는 것은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다른 일들로 분주한 나날이 흘렀다.
며칠 전 우당 이회영 선생에 대한 기행수필을 마무리했다. 우당 선생에 관해 공부하다 보니,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著, 역사의 아침出), 「운명의 여진」(이규창著), 「이회영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김은식著, 봄나무出)에서 백정기 의사가 우당 이회영 선생과 같은 노선-아나키스트임을 말하고 있었다.
억압과 통제가 없는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다
구파(鷗波)에 대해서도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몇 년 전 정읍에서 찍은 사진을 찾을 길이 없다. 매번 사진을 찾지 못해서 같은 곳에 또 가곤 한다. 해서 다시 나선 정읍 여행길이다. 이번엔 반드시 글을 완성하리라 단단히 맘을 먹어본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길이 막힐지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해 기념관을 열지 않아서 관람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기념관에 확인하니, “기념관을 특별히 보여줄 것이고, 해설사가 설명까지 해주겠다”라는 고마운 답변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정읍 여행길을 나선다.
여행은 언제나 기대로 맘이 부푸는 법이다. 새벽에 일어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명역에서 내렸다. 미리 나와 있는 친구의 차로 정읍을 향해 달린다. 다행히 고속도로는 밀리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산에 쌓인 눈들이 풍광을 더해주고 있다. 도로 옆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도 설경이다. 온 세상이 하얗다. 여행 전날까지 영하의 날씨였다. 염려를 뒤로하고, 포근한 햇살까지 내린다. 소풍 가는 어린애처럼 눈앞에 펼쳐진 하얀 세상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풍경 좋은 곳에서는 잠시 차를 세우고 사진기에 풍경까지 담아 정읍에 들어서니, 눈이 도로 한옆으로 가득하다. 태인 I.C에서 한참을 헤매어 기념관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기념관까지 4시간 30분이 걸렸다.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 이정표. 눈길을 헤매면서 백정기 선생을 만나러 가는 먼 길-구파가 동경, 상해, 천진, 해림, 북경, 남경, 광동 등을 헤매고 다니며 찾고자 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 구파가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얀 눈으로 덮인 논밭을 지나, 눈 쌓인 시골길을 지나면서 설경 속에 춥고 시렸던 구파의 인생행로를 생각해 본다. 눈 덮인 아름다운 세상, 눈처럼 하얀 세상-억압이나 권위와 통제가 없는 세상,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던 아나키스트 백정기를 생각해 본다. 아나키스트들은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평등을 주창한다고 해서 공산주의로 오해받기도 했다. 해서 구파의 행적이 독립운동사에서 그리 크게 주목받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안중근, 강우규,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에 대해서 그들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들의 독립운동 방법은 의열 투쟁이었지만, 그들은 성공 여부를 떠나서 많이 알려지고 기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조선총독부에까지 폭탄을 던지고, 일본 제국 요인을 암살, 기관 파괴, 친일파 처단, 영사관 폭파, 군수물자 수송선 폭파, 일본 대사 암살 시도 등을 행동으로 옮겼던 의열 투쟁, 흑색공포단의 폭력과 파괴가 평화지향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력으로 약소국을 찬탈하려는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에 맞섰던 투사들의 열혈 투쟁이다. 이들에 대해서 후손들이 어떤 잣대를 댈 수 있을지.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최고”라는 논리. “미친개를 머리를 쓰다듬어준들 무슨 소용이냐”는 논리였다.
공로 인정받지 못한 아나키스트
실패로 끝난 이야기들

1920년에서 1930년대 독립운동의 큰 주류를 이루었던 아나키즘-아나키스키들. 그들이 주장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외로 하고 싶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향해서 총을 쏘았던 안중근 의사를, 우리는 독립영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일이었고, 민족의 자존심을 보여준 의거로 인정하고 있다.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폭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으나 실패로 끝난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는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거사에 성공한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도모한 이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후손들은 많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1934년 6월 5일에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폭탄과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입장권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통행증을 구해주기로 했던 중국인(왕아초와 화균실)이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을 도모하고자 한 이가 구파 백정기 의사다. 해방 후, 구파의 동지였던 정화암(본명:정현섭)이 회고록에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하얀 눈 속에 덮인 논밭의 흙처럼 역사 속에 묻힐 뻔했다. 누군가가 기록을 해두면, 세월이 매우 많이 흐른 뒤에라도 후손들이 읽게 된다. 그리고 진실은 드러난다. 아무리 두터운 눈으로 덮인 흙일지라도 흙은 얼음을 뚫고 보리싹을 틔우듯이 말이다.
수류탄 한 번 던져보지 못한 채
독립운동의 마침표를 찍다
홍커우 공원에서 그렇게도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서 던지고 싶었던 백정기 의사의 폭탄. 윤봉길 의사와 백정기 의사는 홍커우 공원에서는 그렇게 운명의 길이 엇갈렸다. 그러나 이듬해(1933년 3월) 구파는 상해 육삼정 고급 요리집에 주중일본공사(駐中日本公使)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와 일본 거두들이 중국의 친일군벌들과 회합을 가진다는 정보를 얻는다. 구파에게 다시 찾아온 기회다. 1931년 11월에 백정기 의사 주도하에 만든 흑색공포단(Black Terrorist Party)에 속한 한국인들이 서로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일본 수뇌와 중국 친일군벌을 제거하겠다고 서로 나선다. 거사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은 일제에게 붙잡혀 사형에 처해질 것을 모르지 않을 그들이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서로 그 일을 맡겠다고 제비뽑기하는 사람들. 구파의 소원대로 제비뽑기의 행운은 구파에게 돌아왔다. 3월 17일 거사를 위해 김구 선생이 이들에게 무기를 마련해 준다. 육삼정에서 200m 떨어진 송강춘 2층에서 대기 중에 그들은 붙잡힌다. 회합이 끝나고 술에 만취되어 나오는 적에게 폭탄을 던지려 했던 계획은 허사가 되었다. 종업원으로 변장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미리 잠복하고 있었다. 밀고가 있었다. 이번에도 총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수류탄 한 번 던져보지 못한 구파의 운명은 그렇게 독립운동의 마침표를 찍는다.
분개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포효하는 사자의 눈빛
정읍에 있는 그의 기념관은 그리 넓지 않았다. 전시물들도 많지 않았다. 그가 남겼다는 유일한 유품이 친필 편지 한 장이었다. 1923년 7월 25일, 일본으로 떠나기 전, 지인 고필석에게 “여비를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세로로 쓴 국한문혼용체의 정갈한 글씨다. “진본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이다. 기념관 한쪽에는 <세계사상대전집>이 꽂혀 있다. 1923년 일황 암살 계획을 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동지들만 잃고 귀국하면서, 정읍으로 가져왔던 책들이다. 정읍 집 선반 위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일본 순사가 들이닥쳐 마당 바닥에 던져 불태웠다는 책이다. 구파가 사상전집을 독파하고 본인의 사상적인 번뇌와 나아갈 바를 결정했다고 한다. 기념관 측에서 그의 독서량을 보이기 위해서 똑같은 것으로 구해서 전시해 놓았나 보다.
백정기 의사의 거사 파트너로 지명한 이강훈, 안내자로 나선 원심창 세 사람의 사진이 실린 국내 신문 기사도 전시되어 있다. 사진 속, 이강훈과 원심창의 얼굴은 허탈한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다. 그러나 백정기 의사의 표정은 분노와 분개, 적개심으로 가득 찬 포효하는 사자의 눈빛이다. 양손으로 허리춤을 짚고 있다. 싸울 기세다. 서대문형무소 담벼락에 붙어있던 여러 열사의 사진 중에서 선생의 눈빛이 매우 반항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눈빛보다 강도가 다른 매서운 표정이다. “던지지 못한 게 억울하다”를 얼굴 표정과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병이었던 폐결핵이 악화되어 그 이듬해 6월 5일에 순국한다.
기념관에서 읽어보라고 내게 내어준 책 「항일혁명투사 구파 백정기」(조광해 著(사), 구파백정기기념사업회) 347쪽 내용을 모두 읽어내는 건 힘든 일이었다. 페이지마다 가슴 아픈 내용뿐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한 설명문이니, 딱딱한 건조체 문장을 읽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념관을 둘러본 것으로는 구파의 생애를 알 수 없는 일인지라, 책을 읽어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누군가 구파의 일생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하여 책을 써주면 좋을 것 같다. 그 시대 상황과 아나키스트에 대한 이해도 쉽게 말이다.
심문을 받으러 갈 때마다, 감옥의 복도에 구파의 기침 소리가 떠나갈 듯 들렸다고 했다.
그럴 때면, 이강훈과 원심창은 일본인 간수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괜찮으냐?”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곤 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안 구파는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 동지는 몸이 건강하니 자중자애하라. 출옥하거나 만일 독립이 안 됐으면 나를 조국 땅에 묻지 말고 독립이 됐으면 나의 유해를 조국 땅에 묻어주되 무덤 위에 꽃 한 송이만 꽂아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아나키스트인 박열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 낸다. 그의 분골은 1946년 6월 부산항에 도착한다. 김구 선생이 3의사의 유해가 조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게 힘썼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이 부산까지 가서 3의사의 넋을 맞이한다. 3의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효창원에 나란히 묻히게 된다.
눈먼 시어머니 봉양하며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나라 독립 위해 보따리 싸서
아나키스트의 길을 떠나다

그가 아나키스트로서 의열 투쟁을 어떻게 해왔는지 간략히 살펴보았다. 자금조달을 위해 중국에서 잠깐씩 일을 하기도 한다. 편집위원을 맡고 희곡을 쓸 정도의 문학적인 소양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평화로운 시대에 희곡이든 소설을 쓰는 것은 문학인으로 발돋움할 일이지만, 혁명과 의열 항쟁이 가슴을 꽉 메우고 있는 그에게 희곡 창작은 하나의 취미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우당 선생이 시름을 달래기 위해 단소를 즐겨 불었던 것처럼. 아나키스트 혁명가였던 백정기 선생에게도 문학적인 소양이 있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다. 그 시대 백정기와 같은 아나키스키들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 의존한 독립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해서 강대국에 기대어 독립을 쟁취하려는 이승만 노선에 반대하며, 무장 독립전쟁에 의한 독립 쟁취만을 추구했다. 어쩌면 아나키스키들과 이승만 노선의 극렬한 반대 노선이 팽배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 후에 이승만 노선이 정권을 잡았고, 미국의 신탁통치까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자신들과 노선이 달랐던 아나키스키들을 포용하며 인정과 상훈과 대접을 성대하게 해주었 리 없지 않은가. 이승만의 집권으로 더욱 소외된 아나키스키들이다. 나라를 위해서 몸을 던져 육혈투쟁을 해왔던 그들의 공로는 그렇게 눈 속에 파묻히는 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 찾았던 정읍의 백정기 의사 기념관은 눈 덮인 설경이 온통 하얀 세상. 멋진 광경이 펼쳐졌었다.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라는 무엇이 느껴졌다. 눈이 녹고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올 무렵, 눈으로 덮였던 흙에서 싹이 나겠지. 자연의 법칙대로 신록이 우거지는 여름이 풍성해지겠지. 이처럼, 이승만 정권과 같은 이들에 의해서 소외되었지만, 독립을 향했던 아나키스키들의 몸부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독립운동사에 큰 획이었다. 폭탄을 던졌든, 총을 쏘았든 그것이 명중이든 불발이든, 폭탄이 보따리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든….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보따리를 싸서 아나키스트의 길을 떠났던 정읍의 한 사나이. 불의를 보고 참지 못했던 백정기 의사는, 독립운동사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큰 맥이 될 것이다. 상해의 3대 의거-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 김원봉 의열단의 황푸탄 의거, 백정기의 육삼정 의거로 꼽히지 않는가.

“이제 기침은 하지 않으시나요? 무궁화 한 송이 꽂아주길 바랐던 백정기 의사님. 후손들이 한 송이만 꽂아드리겠는지요? 천만 송이라도 꽂아드리지 않겠는지요? 백정기 의사님을 기억하겠습니다. 제국주의 권력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싶어 했던 아나키스트여!”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가난한 농부의 아들 구파를 생각했다. 부유한 처가를 두어 편안히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매우 고단한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고속도로에 점점 어둠이 내린다. 쌩쌩 속도를 내며 서울을 향해서 달리는 차량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달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다 다른 목적을 갖고 살아간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시대 백정기 선생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을 거라는 생각만은 떨쳐지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