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06]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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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 동안 이어온 ‘한국정신문화 수도’
목숨보다 의(義) 따랐던 선비정신의 미덕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
역사를 알지 못했을 때 안동은 더없이 즐겁고 다채로운 여행지였다. 고즈넉한 산과 들, 많은 유적과 박물관, 입맛 돋우는 먹거리와 축제들, 마을사람들의 따뜻한 인정(人情)이 나를 ‘하회탈’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슴 뭉클한 ‘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자랑스러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로 한 단계 진화했다.
1894년 안동의병이 독립운동의 최초 역사로 기록됨으로써 안동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독립운동 발상지가 되었다. 항일운동의 역사는 그 후 51년 동안 쉼 없이 뜨겁게 이어졌다. 국가보훈처 공적조서(2019년 8월 15일 기준)에 따르면,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국민회의 의장인 일송 김동삼 선생 등 36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정부로부터 포상된 독립운동가 숫자가 국내에서 가장 많다. 포상이 안 된 독립운동가도 690여 명에 이른다.
특히 안동 선비들에게 독립운동은 의(義)를 행하는 유교 정신의 실천이었기에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이 많다.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자 곡기를 끊고 자정 순국한 선비가 열 명이고, 가산을 정리한 뒤 식솔과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한 선비들도 있다.
협동학교 터에 자리잡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한옥 형태의 정갈한 외관에서 선비의 고장 안동에 걸맞은 품격이 느껴진다. 전시실은 독립관, 의열관, 신흥무관학교, 추모벽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시실은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조국 광복 때까지 51년간 경북 사람들의 국내외 독립운동을 전시하고 있다. 의병항쟁, 국채보상운동, 자정순국, 만주지역 항일투쟁, 6·10만세운동, 의열투쟁, 한국광복군 등 항일투쟁 관련 자료들이 가득하다.
의열관은 안동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전통마을의 항일투쟁을 전시하고 있는 안동실과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경북 사람들의 51년 독립운동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추강영상실, 유아를 위한 체험공간인 새싹교육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과거 신흥무관학교의 정신과 교육과정·독립전쟁을 최첨단 장비와 시설로 재현했으며 독립군의 훈련과정과 전투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전시관 외부에 조성된 ‘1,000인의 길’은 안동·경북 지역 독립유공자 1,000인의 이름을 새긴 산책로다. 그 길 끝에는 안동광복지사기념비와 옛 협동학교 터에 복원한 가산서당이 있다.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인 가산서당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가산서당 외에도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인 공간이 백하구려(경상북도기념물 제137호)의 사랑채다. ‘백하구려(白下舊廬)’는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하 김대락 선생이 1885년에 지은 가옥으로, 선생은 이 가옥을 비롯한 전 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 건립 자금에 보탰다.
독립운동가 11명 배출한
오백 년 종택, 임청각

철길 때문에 생긴 굴레방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철길 아래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보행 길목이 보인다. ‘임청각’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그냥 강변길로 걸어간다면 철길 가림방음벽에 가려져 임청각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다. 1519년 낙향한 이명이 건축했고 1767년 이종악이 고쳐 지었다. 무려 500년이 지난 고성이씨 종택(宗澤)이다.
우물 옆 사당에는 조상의 신주나 위패가 없다. 석주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를 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며 조상의 신주를 모두 땅에 파묻어버렸기 때문이다.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에 전 재산을 처분한 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망명해 죽는 날까지 조국독립에 헌신했다.
하지만 임청각은 석주 선생이 만주에서 순국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반 동강이 났다. 일제는 항일독립운동 의지를 꺾고,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1942년 2월 부설했다. 이 과정에서 임청각 내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파괴됐다. 임청각 앞 철도 방음벽에는 “나라를 잃기는 쉽지만 나라를 되찾기는 백배 천배 더 어렵다”는 석주 선생의 불호령이 걸려 있다. 현재는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2025년이면 원형의 모습을 되찾는다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다.
퇴계에서 육사로 이어진
안동의 선비정신
낙강물길공원에서 물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월영교’에 닿는다. 지난해 JTBC 버스킹 프로그램 ‘비긴어게인 코리아’에 등장했을 때 그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던 기억이 난다. 월영교는 조선 중기 원이엄마와 남편 사이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미투리 모양의 나무다리다. 달빛 비추는 밤도 좋고, 안개 낀 새벽이나 햇살 눈부신 한낮, 어스름 저녁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월영교로 향하는 산책로를 걷노라면 이육사의 시비도 만날 수 있다.
발길을 옮겨 도산서원으로 향한다.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대표 유학자이자 선비인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현재는 퇴계 선생이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 앞쪽 건물들이 도산서당에 속하고, 뒤편이 도산서원이다. 도산서원에 들어가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비석이 방문객을 맞는다. 노(魯)는 공자의 고향이며 추(鄒)는 맹자의 고향이다. 추로지향은 공맹의 예절을 알고 유학이 왕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도산서원을 나와 3km 남짓 걸으면 퇴계가 살던 종택이 나오고 그보다 더 가면 퇴계 묘소가 있다. 묘소를 지나 고개를 휘돌아 넘으면 육사 이원록 시인의 문학관과 묘소, 그리고 생가 터가 나온다. 이육사는 퇴계 선생의 14세손(孫)으로 퇴계 후손들이 모여 살던 도산면 원촌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일제에 항거하는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일본과 중국유학을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에 나섰다. 일제에 의해 17번이나 투옥되었지만 단 한 번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이자, 죽는 날까지 저항의 시(詩)를 썼던 민족시인. 목숨보다 의(義)를 중시했던 안동의 올곧은 선비정신은 퇴계 이황에서 이육사로, 의병전쟁에서 항일독립운동으로 물 흐르듯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