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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07] 2·8 독립선언과 송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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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 동경에서 쏘아올린 화살 

우리 가슴에 무엇으로 꽂힐까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동경 땅, 남의 나라에서 감시 속에 일경(日警)의 눈치를 보며 공부를 하는 게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들은 유학생들끼리 서로 의지했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똑똑했다. 혈기 왕성한 동경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으로 영원한 혈전(血戰)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그들의 독립선언 준비는 체계적이었고, 조직적이었으며 치밀함까지 보였다. 신한청년당의 계획에 따라 이광수가 상해에서 와서 2.8선언서를 기초했다. 학생대표로 송계백을 국내로 파견했다. 국내 밀사였던 송계백의 임무는 참으로 막중했다.


  뜻을 같이하는 이의 억울한 죽음은 동지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법이다. 2·8독립선언에 집행위원으로 선두에서 참여했다가 억울하게 옥사한 송계백 학생에 대한 소문은 현해탄을 건너 조선에도 전해졌다. 학생들의 가슴이 들끓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은 용감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간다.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의 학생들이었다. 나이가 많아야 대학교 1, 2학년 정도였다. 어린 학생들이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알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줄 아는 게 그 당시 학생들이었다. 


다시, 동경 유학생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들의 용감성에 대해 한 가지 더 짚어볼 것이 있다. 1907년 3월, 와세다 대학에서 열린 모의국회 사건이다. 다부치 도요키치(田淵豊吉)라는 일본 학생의 의제 제안에 우리 조선의 유학생들은 분개한다. ‘한국 황제를 일본의 화족(華族)으로 대우하는 것’-한국 황실과 민족을 모욕하는-의제를 그대로 지나치지 않은 게 동경 유학생들이었다. 학교 당국에 다부치 도요키치의 퇴학처분을 요구한다. 학장이 사과할 것도 강력히 요구한다. 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학생 전원이 자퇴를 결의하여 동맹퇴학원을 제출하는 과감성을 보인다. 결국 대한유학생회(친목, 권익단체)의 지원으로 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이런 모의국회 사건에 대한 경험으로 유학생들의 자긍심과 용기가 충천해 있던 때였다. 조선 독립에 대한 요청이 일본정부에게도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하며 그들은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선봉에 나선 이가 최팔용(와세다대학 유학생)이었다.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 간행물 <학자광>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물론, 1912년 10월에 조직된 동경유학생학우회를 통해 강연회, 토론회, 웅변대회, 체육대회에서 유학생들 간의 친목을 다지던 그들이었다. 이런 활동과 모임에서 그들은 동경에서 하나로 뭉쳤고, 민족의식과 애국사상을 고취해 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동경 땅, 남의 나라에서 감시 속에 일경(日警)의 눈치를 보며 공부를 하는 게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들은 유학생들끼리 서로 의지했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똑똑했다. 


혈기왕성한 젊은 피로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다


 영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발행하는 「The Japan Advertiser」에 실렸던 한 보도기사도 그들을 자극했다. 한국 독립에 관한 보도였으니, 그것을 놓칠 그들이 아니었다. 재미(在美)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청원서(1918년 12월 12일 발)를 미국정부에 냈다는 보도도 그들 가슴을 뛰게 했다. 여기다 위에서 상해 등지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도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리라. 상해에서는 1918년 말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협상이 이루어지는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전달하고자 김규식 박사를 파견했다. 


그와 동시에 신한청년당은 국내와 만주 및 연해주, 일본에 밀사를 파견하여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려 국제여론을 환기하고자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피가 뜨거운 유학생들이 결집했다. 그들은 토론회, 웅변회 등을 표방하며 결속을 다졌다. 무오독립선언은 육탄전을 불사하고라도 독립을 완수하자고 하는 강경한 주창이었다. 그 강경함은 2·8독립선언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학생들의 혈기왕성한 젊은 피는 영원한 혈전(血戰)을 벌일 것을 선언하는 과격함까지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독립선언 준비는 체계적이었고, 조직적이었으며 치밀함까지 보인 것을 볼 수 있다. 신한청년당의 계획에 따라 이광수가 상해에서 와서 2.8선언서를 기초했다. 학생대표로 송계백을 국내로 파견했다.  


국내 밀사였던 송계백의 임무는 막중했다. 국문(國文)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려면 국문활자를 구해야 했다. 또한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어른들께 자신들의 움직임을 알리며 자금을 후원받는 임무를 띠었다. 여기서 우리는 상해로 파견되었다가 일본 동경 2·8독립선언 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이광수의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자. 그가 일경(日警)에 피체되지 않고 몸을 보존하여 훗날 [민족개조론]을 쓰게 되고, 조선인의 미개함을 강조했다는 것도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그가 ‘무정’과 ‘흙’과 같은 소설을 써서 문학의 대부(大父)의 자리를 얻은 것도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자. 그러나 그때 밀사로 파견되었던 또 한 사람 송계백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 같다. 


2·8선언과 3·1 독립선언

연결고리 된 송계백 열사


  우리들에게 송계백(宋繼白, 1896~1920) 열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나도 이번에 동경 YMCA회관을 여행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는 백제의 마지막 명장 계백(階佰)장군과 이름이 같다. 한자를 달리 쓰긴 하지만 발음이 똑같다. 해서 이름이 쉽게 외워지니 그의 이름을 이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점은 윤동주 시인과 똑같다. 


 사각모 속에 수건을 감추어 일본의 눈을 피해 현해탄을 건넜던 송계백. 그의 가슴은 조였을 것이다. 모자 속에 수건이 일본에게 발각되면 자신과 일본 유학생 600여 명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 않을 그였으리라. 거사(擧事)도 하기 전에 모든 것은 낭패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의 수건에는 잔글씨로 2·8독립선언의 초안문이 쓰여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무사히 현해탄을 건넜고 서울에 현상윤(보성중학교 선후배 관계)에게 독립선언서의 초안, 수건을 보인다. 현상윤은 동경 유학생들 계획에 감동하여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 최남선에게 그 수건을 보인다. 또한 송계백은 보성학교 은사였던 최린에게 보였고, 최린은 자신이 믿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에게 수건을 전달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손병희 선생에게 2·8독립선언서 초안이 전해진 것을 주목해야 한다. 손병희 선생은 기미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 중에 첫 번째로 서명을 했던 분이다. ‘어린 학생들도 이처럼 갸륵한 일을 하는데, 어른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손병희 선생은 최린을 매개로 기독교와 불교계와의 접촉을 이루게 했다.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하여 3·1 운동 계획은 급박하게 추진되었다. 이것을 놓고 보면, 송계백의 역할은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3·1 독립선언이 있도록 연결하는 고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서둘러 다시 현해탄을 건넜다. 2월 8일 동료 학생들과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600여 명(592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모였다가 일경에 잡혔다.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금고 7개월 15일을 언도받는다(1919년 2월 15일). 상고와 공소를 거듭했지만 기각되었고 그는 동경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다. 7개월 15일을 채우지 못하고 그는 1920년 옥에서 순국한다. 24세였다.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지만, 그를 기억해주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청년 유학생 송계백 선생을 생각해 본다. 혼자 몰래 현해탄을 건넜을 때의 그의 외로움을. 사각모 속에 숨겼던 2·8독립선언서 초안문을. 최린, 손병희 선생에게 전해진 그의 수건을. 


  그의 외로움과 역사에 남긴 족적(足跡)과 그의 죽음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의 혼백이 얼마나 슬플까? 동경을 찾는 여행객들조차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는 참 외로울 것 같다. 만일 그가 1919년 2월 8일에 피체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유학생들(360여 명)처럼 단체로 동맹 휴학을 하고 귀국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학생 독립 운동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본은 그의 몸을 가두었고, 캄캄한 감옥에서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학생들의 독립정신을 더욱 부추겼고, 산불이 번지듯 전국적인 학생만세운동으로 붉게 번져나갔다. 한 사람의 행보가 역사에 남긴 큰 발자국을 생각해본다. 그에게 국화꽃 한 바구니 올려주고 싶은 날이다. 


스물넷, 동경 감옥에서 별이 되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을 쓰는 오늘이 2016년 2월 8일이다. 오늘 동경 YMCA회관에서는 2·8독립선언 기념식이 열렸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설날이다. 음력 새해의 시작이다. 시작은 언제나 아름답다. 올해 3·1절에는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송계백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1919년 2월 8일 아침 10시, 만국전신국을 통해 미국 윌슨대통령과 프랑스 클레망스 수상, 영국 로이드 조오지 수상에게 2·8독립서를 전달했던 똑똑한 동경 유학생들을 생각할 것이다. 도쿄 주재 각국 대사관, 공사관, 일본 정부의 각 대신들과 일본 귀족원 중의원, 조선 총독, 각 신문사와 저명한 학자들에게도 보냈던 그들의 활시위 ‘민족대회청원서’, ‘독립선언서’, ‘결의문’을. 그해 2월 9일 영국계 로스 치아나 데일리 뉴스의 평론 란에 ‘한국 청년의 열망’이라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는 것도.


  그들이 쏘아올린 화살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 가슴에 무엇으로 와서 꽂힐는지? 똑똑했던 우리의 동경 유학생들. 그들의 활시위는 헛되지 않았다.


갓바바시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나는 다시 히비야 공원을 찾아갔다. 몇 번씩 전철을 갈아타고 고생 끝에야 그 곳에 닿을 수 있었다. 공원의 야경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곳에서 100여 년 전의 유학생들의 흔적을 다시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공원은 동경 시가지의 야경과 불빛만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여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쏘아 올려진 화살은 허공에서 부서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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