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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08] 안희제 기념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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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재정난과 총독부의 탄압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안희제 선생은 중외일보 100만 부를 무료로 배포하는 큰 배포를 보인다. 당시 신문을 구독할 여력이 없던 국민들에게 읽게 해야 한다는 언론인의 사명감이었을 것이다. 국민의 정신을 먹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안희제 선생은 언제나 아버지의 역할만을 해야 했다. 한 가정의 아버지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아버지, 독립자금을 대는 아버지,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이자 언론인으로서의 아버지. 고단한 그에게 휴식이란 없는 것이었을까.


부산 용두산 공원 소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비밀리에 무엇인가를 묻어 두는 이들이 있었다. 독립운동 첩보작전을 위한 통신문을 교환하는 방편이었다. 안희제 선생의 8남 안상만의 증언에 따라 그 자리에 안희제 선생의 흉상이 세워졌다.  


고향 전답 2천 마지기 팔아 

부산에 백산상회 열어


1911년 안희제(26세)는 러시아로 망명하여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지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고 최병찬과 「독립순보」를 간행하지만, 안타깝게도 신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해외에서 개척된 독립군 기지가 자금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상황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일까? 안희제는 독립운동을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의 절실함을 절감했기 때문일까? 보성전문(고려대) 경제학과에서 수학을 한 까닭일까? 그는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고향의 전답 2천 마지기를 팔아 부산에 백산상회를 연다. 곡물과 해산물, 면포를 위탁 판매하는 상점이다. 일본 거류민들이 많이 살고 있던 일본인의 중심지에 백산상회를 내고(1916년) 그는 일본식 복장을 하고 일본 음식점에서 일본 음식을 먹으면서 사업 확장에 힘쓴다. 그리고 거대한 독립자금을 국외 독립운동 기지로 보내는 재정적 기반을 확충해 나간다. 대구의 태궁상회, 대동상점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의 연락 거점으로 활동하며 상업조직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다. 국내 유지들이 기탁하는 자금을 송달하는 일까지 담당했는데 자금 송부방식은 항상 장부 상 거래의 형식을 취하여 일경(日警)의 수사를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왜관, 마산, 포항, 서울, 원산, 만주 안동, 만주 봉천 등 거래상들은 독립자금의 공급과 연락망의 역할을 한 셈이다. 일본 복식을 하고 일본 음식을 먹으며 일본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날 수 있었던 배짱 좋은 청년 실업가.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고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 역할을 담당했던 그의 역할은 놀라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남지방의 청년 자산가들을 주주로 모집하여 자본금 1백만 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전시켜갔는데(1919년), 기업의 확장에 머물지 않고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을 확충해간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계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회사의 수지와 관계없이 계속 공급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회사는 침체를 거듭하고 자금난과 거듭된 결손으로 위기에 봉착, 결국 1928년 1월 29일에 파산을 하게 된다. 


12년 동안, 백산 안희제 선생은 끝임 없이 독립자금을 대는 젖줄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딸린 식구가 많은 집 가장의 어깨는 언제나 무거운 법인 모양이다. 독립자금을 대던 아버지의 역할을 하던 그가 사업에서 손을 놓았어도 식솔들을 염려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언론을 통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려는 방향을 갖게 된다. 이미 1911년에 「독립순보」를 발간했던 그의 이력에서 그의 뜻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정신의 방향성이 민족 언론 육성을 위해 헌신하는 언론인이 되게 했을 것이다. 당시의 신문사는 민족진영의 구심점이었으므로 그가 민족 언론 육성에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언론이 항일 여론 형성과 민족의 역량 배양에 큰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영 어려웠던 중외일보 일으켜 

민족 언론의 사명 다하고자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당시 부산지국을 운영하고, 1927년 월간 잡지 『자력』을 발행한다. 1928년 6월부터 1931년 10월까지 3년여간 중외일보 사장을 맡아 경영에 참여한다. 중외일보는 신문제작과 경영에 귀재라고 하는 이상섭이 이끌어 오던 신문이다. 이상섭이 편집과 발행을 모두 맡고 있을 무렵, 중외일보는 일경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 기사가 삭제되고 통제되는 등 일본의 탄압을 받아오곤 했다. 종간의 위기와 사법 조치까지 받는 일까지 있었다. 이정섭(당시 파리 유학파)과 최린의 세계일주 기행문 연재 사건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일랜드 등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다룬 것을 일제는 조선의 독립 의지를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보고, 기사를 쓴 이정섭에게는 징역 6개월과 발행인 이상섭에게는 벌금형을 가하는 억압을 했다. (필화 사건)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인들의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에서 세계일주 기행문 연재는 중외일보 판매부수를 늘이고 인기 신문이 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일본의 간섭으로 오래 유지되지 못했던 것이다.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에 나서면서 언론과 사상 통합이 가중되던 무렵이었기에 언론의 논조가 위축일로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안희제는 경영이 어려웠던 중외일보를 일으켜 세워 민족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으나 시대 상황과 자금난으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외일보에서 안희제는 손을 떼고 중외일보는 김찬성이 인수하여 중앙일보라는 제호로 다시 태어난다. 오늘날 민간 3대 신문 중에 하나라는 중앙일보의 전신이 안희제의 중외일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일은 백산상회를 경영하면서 독립자금을 대주던 아버지의 손을 가졌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2만부를 무료로 배포하는 큰 스케일을 보이고 조간과 석간으로 하루 8면으로 증면하는 등 배포 있는 경영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외일보가 그 당시 언론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노심초사하며 몸부림쳤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월간지 『자력』은 창간호(1927년)부터 일경에 압수당하고 통권 5호로 종간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비판적인 편집 경영을 엿볼 수 있다. 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잡지 발행을 강행하던 안희제. 1920년 1월 14일에는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여 부산지국을 경영한 것은 그가 언론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신문사의 지국은 민족 운동의 지방 조직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지국과 분국 기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지방 민족 운동의 전위자였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는다. 신문을 통해서든 잡지를 통해서든 독립의 의지를 나타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그런 언론을 가만히 놓아둘 리 없었다. 그 당시 언론사가 겪어야 했던 고충이 얼마나 컸으리라고는 상상이 되는 일일 것이다. 


만주 망명해 발해농장 경영

독립운동 기지 마련하다


재정난과 총독부의 탄압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그는 1929년에 신문 2만부를 무료로 배포하더니 1930년에는 100만부를 무료로 배포하는 큰 배포를 보인다. 그 당시 신문을 구독할 여력이 없던 국민들에게 읽게 해야 한다는 언론인의 사명감이었을 것이다. 중외일보가 지향하는 민족 신문으로서의 언론의 역할을 담당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요즘 우리시대에 행려자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 어떤 목사님처럼, 아마도 그 당시 안희제 선생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국민의 정신을 먹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모두 고단한 법일 것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책임감이 언제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안희제 선생은 언제나 아버지의 역할만을 해야 했다. 한 가정의 아버지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아버지, 독립자금을 대는 아버지,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이자 언론인으로서의 아버지. 고단한 그에게 휴식이란 없는 것이었을까? 종교에 몰두하며 조용히 건강을 챙기고자 했을 58세의 나이. 그는 1933년 조선에서의 고단한 삶을 중국으로 망명하는 것으로서 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만주 목단강 주변에 부지를 매입하여 발해농장을 경영하며 헐벗고 굶주린 조선인들 몇 만 명을 그곳으로 이주하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그들을 또 먹인다. 표면상으로는 토지개간이었으나 속내는 국외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가 발해농장을 경영하며 대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주력하려 할 무렵, 일제는 대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교도들을 일제히 체포하여 감금하는 임오교번을 일으킨다. 


9개월간 악형·고문에 시달려

병보석 3시간 만에 순국


안희제가 신앙하던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하며 그 당시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에 일제가 대종교의 간부들을 단체로 잡아들인 것이다. 21명의 동료 간부들과 함께 피체된 안희제 선생은 9개월 동안 악형과 고문을 당한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지 3시간 만에 그는 순국한다. 만주 목단강가 영제의원에서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 의령으로 옮겨져 고향 땅에서 영면에 들어가게 된다. 참으로 고단한 그의 58년간의 삶은 그렇게 일제에 의해서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 복장을 하고 일본 음식을 먹으면서 일본의 감시를 용케 피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하던 영특한 경제학 전공자, 안희제 선생. 언론과 교육사업과 기업인으로서 다방면에서 일본에 항거하다가 일제가 가하는 고문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주어졌다. 그가 세웠던 백산상회 자리에 백산기념관이 세워지고 그의 손서가 『백산 안희제의 생애와 민족운동』이라는 총론 책을 냈다. 그의 손주며느리도 큰 그릇이라 여겨진다. 


늘 언제나 찾는 이가 드문 

순국선열들의 유적지


부산을 찾는 이들은 자갈치 시장에 들러 생선회를 먹으며 부산 앞바다의 낭만을 생각할 것이다. 혹은 태종대에 들르거나 해운대 등의 부산의 볼거리를 찾아갈 것이다. 용두공원에 있는 안희제 선생의 흉상을 찾아가 보거나, 동광동에 있는 백산기념관을 찾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싶다. 내가 지난달 백산기념관을 찾았을 때도 기념관 안에는 해설사 한 분만이 기념관을 지키고 있을 뿐,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늘 언제나 찾는 이가 드문 순국선열들의 유적지, 읽어주는 이가 드문 순국선열에 관한 책자. 421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어쩌면 무의미하고 도고(헛된 노력)가 될지도 모르는 일에 안희제의 손서도 출판비용을 지원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일, 읽어주는 이 없을 지도 모르는 책, 찾아주는 이가 드문 순국선열의 기념관. 황량한 겨울바람만이 가득할지 모르는 외롭고 추운 곳에 계신 분들. 


편하게 사는 오늘의 뒤에는

선열들의 핏값이 있었음을


얼마 전, 부산의 국제시장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았다. 영화 관람객이 1천 4백만 명을 돌파했다고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다. 영화관엔 사람들이 가득 찼다. 서울 시내 어느 커피 전문점엘 가도 사람들이 꽉 차 있다. 부산의 어느 패션 거리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순국선열들의 기념관엔 사람들이 없다.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영화 ‘국제시장’에 마무리 장면이라고 기억된다. 주인공 덕수의 아버지 기일에 온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제사가 끝나고 가족들은 모두 거실에 앉아 손녀의 재롱과 노래를 들으며 웃음소리가 넘치는 행복한 장면. 덕수만 혼자 방에 들어와 아버지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소리 내어 운다.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소리 내어 울었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편하게 사는 오늘의 뒤에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핏값이 있었다는 것을. 혼자 울고 있는 덕수라는 영화의 주인공의 눈물처럼 나라의 존망 앞에서 노심초사하며 심장을 태운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백산 안희제 선생과 같은 선열이 있었다는 것을. 눈앞에 편안하고 달짝지근한 쾌락을 위해서 살지 못한 선열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 후손들은 그들을 기억하지 않은 채, 아니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 번쩍거리는 조명불 아래서 즐거움을 쫓아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421쪽이나 되는 안희제 선생의 총론을 며칠 동안 읽고, 그에 대해 공부하고 그에 대한 글을 쓰느라 고단하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순간에도 따뜻한 까페라떼 한잔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커피 대신 수정과를 마셔야 할 것 같다. 우리 선열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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