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09] 심훈, 그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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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소설, 영화 그리고
조국을 처절하게 사랑한 청년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기념관 앞에 심훈 선생이 멋진 모습으로 서 있다. 책 한 권 펼쳐들고. 그리고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비에 새겨져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온몸에 전기가 찌릿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어의 격렬함에서 오는 충격에 머리가 쭈뼛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이 시를 쓴 것이 1930년이다. 일제강점기였다.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우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조국 광복의 날이 오면 이렇듯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이 조각이 나도 좋다는 표현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저항의지와 독립 열망의 간절함이 이보다 더 강하게 표현된 시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서부간선도로를 타고 당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때가 되어 있었다. 점심식사가 중요하지 않았다. 상록초등학교, 상록반점을 지나 필경사에 도착했다. ‘한 사람의 발자국이 이렇게 큰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경사 근처의 정류장 이름도, 중국집 이름도 초등학교 이름도 모두 ‘상록’이다. 심훈 선생이 1935년에 이곳 필경사에서 집필했다는 소설의 제목이다. 그러고 보니, 소설 『상록수』의 배경이 되었던 경기도 안산에 가면, 전철역도 ‘상록수역’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들었다. 상록수역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최용신 기념관’도 있다고 들었다. 최용신은 경기도 안산 시골 농촌 마을에 내려와 야학에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과로로 사망한 실존 인물이다. 농촌계몽에 나섰다가 주재소로 끌려 다니는 등 고초를 겪다가 사망했다는 26세 처자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심훈이 신문에서 읽게 되었고, 그가 자신의 장조카 심재영의 삶과 연관지어 이야기로 쓴 것이 소설 ‘상록수’다. 자신의 조카도 당진 송악읍 부곡리에 내려와서 야학을 하며 농촌 계몽을 하던 청년이었다. 두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소설 ‘상록수’를 썼고, 동아일보에 1등으로 당선을 한다. 그러고 보니, 필경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심재영 고택’이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를 본 것 같다. 그곳도 들려보고 싶었으나, ‘필경사’로 우리는 차를 몰았다.
붓으로 밭을 가는 집
필경사에서 글을 쓰다
필경사(筆耕司)는 붓으로 밭을 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심훈 선생이 일본에 좌절하여, 부친이 계신 곳으로 내려온 곳이 충남 당진이다. 처음엔 부친과 한 집에 살다가 필경사를 직접 설계하여 손수 지었다고 한다.
우리가 필경사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바람이 매웠다. 바람이 차갑게 옷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심훈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건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팔삭지붕의 목조건물이다. 나무 기둥에 황토 흙으로 벽을 붙였다. 초가지붕을 한 1자형 집이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다. 유리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이 두 개 있다. 오른쪽 사랑방이 심훈 선생이 집필실로 썼던 서재였나 보다. 한쪽으로는 낡은 갈색 책상도 놓여있다.
기념관에서 보았던 그의 책상과 같은 것이다. 기념관에 있는 모든 자료 중에 진품은 그가 쓰던 책상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던 해설사의 말이 생각난다.
독립열망의 간절함이
무섭도록 강렬한 시어들
사실, 그는 경기 시흥군 북면 흑석리(현 동작구 흑석동) 출신이다. 그는 36세라는 짧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도 두 번 했지만, 그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영화에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고 신문사 등에서 일하는 언론인이 되기도 한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의욕과 열정이 많아서 그랬는지 손을 댄 일도 다양했다. 그러나 그의 36년의 마침표는 필경사 왼쪽에 있는 그의 묘가 말해주는 것 같다. 그의 묘는 봉분도 없이 평장으로 되어 있다. 까만 대리석 위에 “독립유공자 작가 심훈(본명: 대섭)” 그의 묘비명이다. 그는 독립유공자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온몸에 전기가 찌릿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어의 격렬함에서 오는 충격에 머리가 쭈뼛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이 시를 쓴 것이 1930년이다. 일제강점기였다.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우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라는 표현을 보자. 조국 광복의 날이 오면 이렇듯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이 조각이 나도 좋다는 표현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또한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령에 앞장을 서로리다”라는 표현도 얼마나 광복을 염원하는지 보여주는 표현이다. 저항의지와 독립 열망의 간절함이 이보다 더 강하게 표현된 시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시대를 살던 모든 시인과 문인들이 시대를 고뇌했다. 그리고 시를 썼지만, 이렇게 무섭도록 강렬하게 쓴 이들도 드물었다. 저항시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시에도 이렇게 과격한 시어는 없었던 것 같다. 일본의 감시와 보복이 무서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훈 선생은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어 보인다. 춘원 이광수와 함께 만주사변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를 방문하고 와서 쓴 시였다. 일본이 무자비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폐허로 만든 곳을 보고 와서 쓴 시였다. 시어의 격렬함은 일본의 잔학성에 대한 반발과 민족의식의 발로(發露)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시를 바로 김구 선생에게 보낸 것만 보아도 그의 시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심훈 선생이 이런 시를 쓴 것은 한순간의 분노나 감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 4학년 때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8개월간 투옥된 일이 있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나흘 뒤인 3월 5일에 피체되었다. 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글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을 중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 무악재 고개 너머 개구리 소리가 들립니다”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19세 된 청년이 어머니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담은 글을 써 보낼 만큼 생각이 깊은 그였다.
그의 기념관을 둘러보며, 해설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훈 선생은 8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는 가명(假名)을 써가면서 중국으로 망명했다. 심훈이 한번 먹었던 마음을 하늘은 외면하지 않으셨나 보다. 중국에서 그는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호, 석오 이동녕, 성재 이시영 선생을 만나 다시 한 번 더 독립운동의 의지를 갖게 된다. 상해에서도 임시정부 청년들과 교류한다.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왔다가 1926년, 순종(융희 황제)의 국장이 준비 중이던 돈화문에서 「통곡 속에서」를 써서 시대일보에 발표한다. 이 시는 6·10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학생들의 가슴에서 활활 타올랐다. 시 한 편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이리라.
「상록수」 영화 개봉 앞두고
의문의 죽음
1927년 영화수업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 원작을 집필하여 감독도 되고 주연을 맡기도 한다. 그의 기념관 전시물들 중에 재미있는 것은 그의 엽서들이었다. 외국 영화배우들 사진, 특히 여배우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그가 영화에 얼마나 심취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의 마음이 영화 사랑으로만 몰입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화 「먼동이 틀 때」를 단성사에서 개봉했었고, 위에서 언급했던 시 「그날이 오면」을 써서 시집을 내려 한 것은 그 이후였다. 일제는 그의 시를 검열 후, 빨간색 삭제 도장을 찍어 출판 허가를 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 『동방의 애인』도 조선일보에서 연재하다가 일본의 검열로 중단된다. 그는 영화와 시, 소설 등 여러 장르에 손을 대었지만, 일본의 감시와 검열은 어느 한 장르도 녹녹하지 않았다. 사상 문제로 조선일보에서 퇴사한 것도 1932년의 일이었다. 시집 발간도 신문에 장편 소설 연재도 모두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던 1932년 그는 아버지와 조카가 있는 당진으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필경사를 짓고 『상록수』와 『황공의 최후』, 『오오, 조선의 님이여』,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의 창작에 몰두한다.

사랑이야기 너머에서
항일과 구국을 이야기하다
우리들은 그를 [상록수]를 지은 소설가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날이 오면]이라는 그의 시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의 저술 작품들에는 공통으로 흐르는 한 가지가 있다. [상록수] 소설만 해도 그렇다. 얼핏 보기에는 채영신과 박동혁의 사랑이야기 같다. 그러나 예배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치다가 주재소로 불려 다니는 채영신을 보자. 그건 항일(抗日)이다. 한글 사용을 금하고 창씨개명을 시키던 시대에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만도 저항이다. 심훈 선생은 소설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강조했고 항일과 구국을 이야기했다. 여주인공 채영신이 소설에서 과로(각기병)로 죽고, 박동혁이 장례식에서 오열한다. 영신이 못 다한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소설의 결말이 그 시대 대중들의 가슴에 아프게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려는 동혁의 의지와 순애보는 대중들의 가슴을 뜨겁게 녹였다.
지금이나 그 시대나 시(詩)는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기가 쉽지 않다. 읽는 독자들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시보다는 소설이 더 쉽게 대중들에게 파고든다. 아마 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그럴 것이다. 소설을 읽어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시청각 효과를 내며 장면들이 재미있게 사람들에게 침투된다. 그래서 심훈은 영화에까지 손을 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훈의 사망으로 [상록수] 영화 상영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가 [상록수]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국토에 대한 사랑과 광복을 열망하는 마음이 녹아있다. 그는 일본을 향해 폭탄을 던지지도 않았으며, 총을 쏜 적도 없다. 그는 시와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오직 한 가지만을 향해 달렸다.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