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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09] 나라를 지킨 관문, 인천 개항누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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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거대한 풍랑 속에 펼쳐진 인천개항시대   


준비되지 않은 근대화의 비극 

식민지 침략과 수탈의 흔적  


글·사진 | 편집부 


인천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다. 인천 바닷가에서 싱싱한 회를 먹고 바닷바람을 쐬며 일몰을 감상했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바다를 건너 이국땅에 가려면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여행의 설렘도 인천이 가진 아주 큰 매력이다. 바다와 공항, 땅 끝에서 혹은 하늘 위에서 우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곤 한다. 그래서일까,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는 생각을 그동안 못해봤다. 바다가 주는 낭만 이면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설움이 있었는지 상상 못했다. 뜨거운 여름햇살에서 가을바람 한 자락이 슬며시 묻어나던 날, 인천의 과거, 그중에서도 인천개항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근대건축물에서 

일제 잔재를 만나다


붉은 벽돌 건물에 흰색 페인트로 ‘대한통운’이라고 큼지막하게 새겨진 붉은 벽돌 건물 앞, 두 명의 지게꾼 조형물이 눈에 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은 개항장 일대에서 화물 선적 작업을 하던 지게꾼이다. 근대 사진 자료를 토대로 재현했다.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 개항장은 서구 문물이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다른 지역보다 상업 활동이 활발히 이뤄지다 보니 국제 무역항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말이 좋아 국제 무역항이지, 실은 준비되지 않은 근대화가 빚어낸 비극의 현장이었다. 조선이 제국주의의 거대한 풍랑 속에서 좌초되고 있는 동안,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은 지게꾼 조형물처럼 매일매일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며 고단한 생을 견뎌내야 했다. 


대한통운 건물 뒤편으로 1888년 지어진 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해 개항 이후 건립된 건축문화재들이 쭉 늘어서 있다. 현재는 ‘인천아트플랫폼’이라는 문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시의 역사성과 공간 특성을 살려 창작스튜디오, 전시장, 공연장, 생활문화센터 등 13개 동으로 조성, 거대한 스트리트 뮤지엄 같은 느낌이 물씬 난다. 


일제는 초가집 40∼50가구에 불과했던 작은 제물포항(인천항)을 1883년 강제로 개항시켰다. 제물포항에 서구 열강이 몰려들면서 이 일대에는 조계지가 형성됐다. 조계지는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구역이다. 


일제는 조계지에 영사관과 은행, 우체국, 가옥 등을 짓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일본 화폐를 사용하기 위해 은행을 세웠고, 인천항에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도록 갑문도 만들었다. 인천∼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선과 여주·이천의 쌀을 가져가기 위한 수인선도 건설했다. 인천 조계지를 조선 수탈의 전초기지로 만든 것이다. 인천항 개항 초기 300여 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은 1934년 1만 2,000명으로 늘어났다. 그해 인천 인구가 6만여 명이었으니, 일본인이 20%를 차지한 셈이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조금 걸어가면 르네상스식 1층 석조 건물이 눈에 띈다. 1899년 지어진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이다. 현관 중앙 위 ‘조선은행(朝鮮銀行)’이란 한자가 지금도 또렷하다. 일본제1은행은 조선에서 생산된 금과 사금을 매입했다가 이후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바뀌었고, 1911년 조선은행으로 바뀌면서 조선은행 인천지점이 됐다. 수탈의 잔재가 남은 대표적인 일본 건축물이다. 지금은 근대 유물과 자료들을 전시하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1층 석조 건물인 옛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이다. 숫자는 일본의 국립은행 조례에 따라 인가된 허가번호다. 일본 나가사키 상인들이 설립한 이 은행은 1936년 조선식산은행에 양도될 때까지 47년간 금융 업무를 봤다. 해방 이후 카페와 중고가구 도매점 등으로 쓰이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개관했다. 


인천 중구청 건물은 1883년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위해 가장 먼저 세운 일본영사관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인천을 통치했던 조선총독부 산하 인천부청사로 사용되다가 1933년 목조 건물을 헐고 지상 2층짜리 벽돌 건물로 지었다. 50개의 방과 증기 난방시설, 수세식 화장실도 갖췄다. 해방 이후엔 인천시청으로 사용되다가 1985년 남동구 구월동으로 신축·이전하자 인천 중구가 입주해 사용하고 있다. 일본영사관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됐다.


인천아트플랫폼   

주소  인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문의  032-760-1000

이용시간  평일 09:00~18:00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확인)

홈페이지   www.inartplatform.kr


인천개항박물관   

주소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89

문의   032-760-7508

이용시간 매일 09:00~18:00(월요일 휴무)

요금 500원

홈페이지  www.icjgss.or.kr/open_port



한성임시정부 수립 의결한 

자유공원


일본풍 거리 끝자락 청일 초계지 경계 계단을 올라가면 자유공원과 연결된다. 인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유공원은 인천항 개항 초기인 1888년 조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 근대식 공원이다. 시기적으로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선다. 


자유공원은 맥아더 장군 동상으로 유명하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축이자 한반 유일의 임시정부였던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을 의결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성임시정부는 1919년 4월 23일 24인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들이 자유공원에 모여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수립되었다. 자유공원 광장에 임시정부 수립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 뒤에는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과 참전기념비가 당당하게 서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2,000여 명은 자원입대해 수많은 전투에서 200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내며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00년 8월 31일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사형 집행 앞둔 

청년 백범을 기억하며


마지막 여행지인 인천감리서 터로 향했다. 신포로 로터리 뒤쪽 언덕길을 올라가면 스카이타워 아파트가 있는데, 이 일대가 인천감리서가 있던 자리다. ‘감리서’의 원래 명칭은 ‘감리인천항통상사무’였다.


인천감리서는 백범 김구와 인연이 깊다. 1896년 8월 26일 스물한 살의 백범은 인천감리서에서 사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육군 중위를 처단한 혐의였다. 그런데 사형 집행을 앞두고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고종이 인천감리서로 전화를 해 사형집행을 중지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당시 경성과 인천을 제외하고는 전화 통신망이 구축된 곳이 없었다. 만약 백범이 처음 수감됐던 황해도 해주옥에 계속 있었다면 사형이 집행돼 훗날 임정 주석으로서의 삶도 없었을 것이다. 백범은 수감 2년 만인 1898년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탈옥했지만, 독립운동 중 1911년 다시 체포돼 1915년까지 인천분감에서 옥고를 치르며 인천항 공사장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현재 인천 중구에서는 백범의 발자취를 따라 ‘청년 김구 역사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하지만 예정된 공사기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공사 현장이 방치되어 있어 안타까웠다. 청년 백범을 기리는 역사거리가 조속히 만들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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