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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10] 박자혜 여사와 단재 신채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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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외롭고 고달프고 

아슬아슬한 동행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동상을 향해서 달려가 보았다. 생각보다 크지 않다. 신채호 선생은 책을 들고 앉아 있다. 박자혜 선생은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녀의 손에는 헝겊인지 둘둘 말린 것이 들려져 있다. 그의 시선은 책을 향하고, 그녀의 시선은 산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 동상만 보아도 그들의 삶의 지향점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위대한 독립운동가들 뒤에는,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돌보는 동반자들이 있었다. 남편이 하는 일을 응원하고 자식들을 양육하며 쓸쓸하게 먼 산만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하나같이 남편을 조국에 바치고 혼자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박자혜는 대한제국의 의료인이었다. 태어나는 생명을 받아내는 산파 겸 간호사 자격증을 갖은 당당한 전문직 여성이었다. 그러나 개원한 <박자혜 산파> 일은 신채호의 아내라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 폭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 1회 졸업생이었던 최애도는 800명의 아이를 받아냈다(1915~1925년). 똑같은 교육기관에서 산파 면허를 받은 박자혜는 그리 성업을 이루지 못했다. 신채호의 아내라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 선생은 시일야우방성대곡(是日也又放聲大哭)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1905년 12월 28일)하여 언론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런 신채호 선생의 가족이 편히 지내도록 일제가 어떤 편의도 봐주지 않았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상황 속에서 박자혜 선생은 아들을 혼자 키워내며, 머나먼 이국땅에 떨어져 있는 남편 신채호 선생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해서 그녀는 참외 장사까지 해야 했다. 그녀의 나날은 참외 빛깔이었을 것 같다.   


책을 바라보는 남편 먼 하늘 보는 아내


충청북도 청주에 그녀의 동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순신 장군이나 이준 열사나 강감찬 장군이나 안창호 선생 등의 동상은 혼자 서 있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 선생의 동상은 나란히 함께 세워져 있다. 그곳에 가 보고 싶다고 여행길을 벼르다가 광명역까지 기차로 내려갔다. 광명역에서 일행과 합류하여 천안 유관순 열사 기념관과 생가를 둘러보고 청주로 향했다. 


“유관순 열사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 이동녕 생가와 기념관까지 둘러 보았으니, 운이 좋은 날이네요”라며 친구는 서둘러 광명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충청도에 내려왔으니, 청주까지 가 보자”라고 나는 졸라대었다. 천안에서 청주까지는 수십 km였지만, 나선 길에 가봐야 하는 일이었다. 


오늘 따라 4월 하늘은 맑기만 하다. 햇볕도 싱그럽다. 바람이 조금 심했다. 얇은 옷차림을 후회하며 그래도 가 보고 싶은 곳.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 선생의 동상이 세워진 곳을 향해 달렸다. 


가봐야 했다. 차창 밖으로 햇살이 뜨겁게 들어온다. 바람에 심하게 나부끼는 차창 밖의 나뭇잎들이 손을 흔든다. 광명에서 천안까지는 1시간 남짓 가까운 거리였다. 얼른 광명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지인의 운전대를 청주로 향하게 하니 미안한 마음이 몰려온다. 


천안에서 20분 정도 이동하니 벌써 청주에 들어섰고,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앞에 데려다 놓았다. 기념사업회 사무실에 들어가 자세한 설명을 듣고, 청주 시내에서 신채호 선생 기념관을 향해서 30분을 넘게 달려갔다. 시가지를 벗어나 시골길을 한참 들어가서야 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새 어스름해지고 있다. 해 있을 때 도착해야 하는데, 그래야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마음이 탄다. 민가도 없는 시골길을 한참 달렸다. 


신채호 선생 묘소와 사당, 기념관, 동상이 함께 있다고 했으니 산기슭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사람들의 왕래도 없어 보인다. 인적 없는 산마을, 고드미 마을에 고령신씨 집성촌으로 이주하여 7세 때부터 살았다고 했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후, 그의 유해가 다시 돌아온 곳도 이곳이었다. 


도착해 보니, 사당도 기념관도 문이 닫혀있다. 차에서 내리니, 해가 질 시각이라 낮보다 더 바람이 차다. 동상이라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이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훗날 다시 청주에 내려와 기념관을 둘러보고 사당에 참배도 하리라’ 마음으로 다짐하며, 동상을 향해서 달려가 보았다. 생각보다 크지 않다. 신채호 선생은 책을 들고 앉아 있다. 박자혜 선생은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녀의 손에는 헝겊인지 둘둘 말린 것이 들려져 있다. 그의 시선은 책을 향하고, 그녀의 시선은 산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 동상만 보아도 그들의 삶의 지향점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서둘러 광명역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박자혜 선생을 생각했다. ‘다른 분들은 혼자 세워져 있는데, 이들은 함께 동상을 세워 준 연유가 무엇일까?’ 


위대한 독립운동가들 뒤에는,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돌보는 동반자들이 있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에겐 이은숙 여사가 있었다. 함께 만주로 망명했으나 이은숙 여사는 조선 땅으로 돌아와서 삯바느질로 독립자금을 보낸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뒤에는 이혜련 여사가 있었다. 독립운동하느라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남편과 아버지의 자리를 비운 안창호 선생을 위해 재봉틀로 뒷바라지를 했다. 이준 열사에게는 이일정 여사가 있었다. 부인 상점을 열어 남편의 구국운동을 내조했다. 하나 같이 남편을 구국 독립운동에 내어주고, 남편을 그리워하며 뒷바라지에 힘썼다. 남편이 하는 일을 응원하고 자식들을 양육하며 쓸쓸하게 먼 산만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하나같이 남편을 조국에 바치고 혼자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일정 여사만 상업으로 부유했고, 나머지 분들은 모두 가난했다. 그리고 이생에서는 쓸쓸하게 혼자였으나, 죽어서는 모두 남편과 함께 묻혔다. 그래도 하나같이 외로웠으리라.


산파와 간호사 면허까지 

근대교육 받은 엘리트 신여성


친구는 광명역에 나를 내려준 뒤, 10초도 지체하지 않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 광명역에서 서울역으로 오는 기차를 4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광명역 대합실은 춥기까지 했다.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내내 박자혜 선생의 쓸쓸함이 느껴져 오는 것 같았다. 


‘기왕 천안-청주 여행에 동행해 주었으니, 내가 기차 타는 것을 보고 그 친구가 귀가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신채호기념사업회에서 주신 책이 한 보따리라서 무겁기도 하거늘, 책도 좀 들어다 주었더라면 마음이 포근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따뜻한 동행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다. 


‘참 쓸쓸하구나’ 생각하면서, 100여 년 전 이은숙 여사도 이일정 여사도 이혜련 여사도 박자혜 선생도 이렇게 춥고 쓸쓸하고 마음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먹먹해 온다. 40여 분의 쓸쓸함보다 그녀들은 태산만큼 더 많이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은 배고팠을 것이고, 나라가 없어서 위태로웠을 것이고, 서러웠을 것이고, 맘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녀들이 견뎌낸 시리고 아팠을 세월을 생각하며 울컥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기차 안에서 멍하니 캄캄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네온사인으로 불빛이 반짝였지만, 어둡기만 하다. 만약에 광명역에서 서울까지 오는 기차가 끊어졌다면 어찌했을까?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 12분 동안, 1분 1초도 편한 날 없이 아슬아슬한 불안 속에서 살았을 100여 년 전 그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박자혜 선생을 생각한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는 반상의 구별, 신분 차별이 심하던 때였다. 가난한 중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다섯 살도 되기 전에 궁궐에 아기 나인으로 들어간다. 궁궐에 들어가서 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살게 하려는 그녀 부모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궁궐에서 한글과 예법과 유학에 대한 기본 소양을 배우면서, 중인으로는 받을 수 없는 배움의 혜택을 얻었다는 것은 그녀에게 복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1910년에 궁내부에서 해직되어 궁궐 밖으로 나온 박자혜 선생은 자신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난한 중인, 그녀의 태생으로 돌아가기 싫었음일까?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들어가 3년 동안 근대교육을 받는다. 당시 숙명여고보에서는 궁녀에 대한 위탁 교육을 하고 있던 터라, 상궁 조하서의 영향으로 고등교육을 받게 된다. 독특한 선택이었다. 


 그 당시 근대 여성 교육은 민족의식과 문명개화 사상을 심어주었으나, 현모양처를 길러낸다는 데에 촛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이라고 해서, 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선도하는 것까지는 시기상조였던 시대였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좋은 혼처에 결혼하여 안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박자혜 선생은 그때까지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강습소에 입학한다. 간호사와 산파 면허를 취득한다.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문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조선총독부의원은 말 그대로, 일제가 세운 의원 강습소였다.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들을 치료할 의원이 필요했을뿐더러, 여러 법령을 만들어 조선을 의료 방면에서 개화하며 혜택을 준다는 허울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아이 혼자 길러내며 

이역만리 남편 뒷바라지


아기 나인에서 숙명여고보 학생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으로 멈추지 않고 산파와 간호사 면허까지….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갔다. 근대화의 시류를 받아들여,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한 박자혜 선생.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것도 문제 삼지 않던 그녀였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박자혜 선생은 만세 운동 때, 무차별 무력 탄압으로 부상당한 조선인들이 의원을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된다. 총독부 의원에서 조선인들을 박애 정신으로 잘 치료해주었을 리 없지 않은가? 조선인들이 치료에서 차별받으며 방치되고 내쫓기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내면에서 숨 쉬고 있던 동포애가 폭발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뜨거운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총독부 의원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고, 총독부 의원에서 주는 봉급을 받으며 일을 해오던 그녀는 조선인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솟구쳤음일까? 그녀는 총독부 의원의 간호사들과 다른 의원의 간호사들을 긴밀하게 연통하여 ‘간우회’라는 조직을 만든다. 간호사들의 단합-나라사랑의 모임을 만들었다고 이해된다. 1919년 3월 10일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태업을 시도한다.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휴무를 감행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선다. 그녀의 항거는 체포로 이어지고, 풀려난 그녀는 조선을 떠난다. 1919년 회문(匯文)대학 의예과(1927년 연경대학으로 개칭)에 들어간다. 의학을 좀 더 체계적으로 심도 있게 공부하려는 의도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북경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중매로 신채호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 뒤 두 망명자는 평생의 동행을 약속한다. 호적도 없는 두 사람의 결합은 “독립운동”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사대부 양반가의 선비, 신채호 선생. 15세에 조씨 부인과 초혼을 했다가 첫 부인과 이별한 신채호 선생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신채호 39세, 박자혜 24세). 중인과 사대부 양반의 결합이다. 나라가 망하고 신분질서가 무너진 지 오래되었고, 조선의 오랜 신분질서를 따르기에는 멀리 떠나온 이역만리. 성균관 박사를 받았고 조선의 언론을 주도했던 꼿꼿한 선비 신채호 선생과 근대 교육을 받은 엘리트 신여성과의 결합. 15세의 연령 차이다. 


귀염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늘 함께하며 재밌게 매일 한솥밥을 먹으며 지내는 꽃길 동행이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두 사람이 함께 산 것은 2년 정도다. 첫아들 수범이를 낳고, 복중에 5개월 된 아이를 가진 몸으로 박자혜 선생은 조선으로 돌아온다. 북경에서 온 식구가 함께 연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북경의 신채호 선생은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부양할 방도가 없었다. 국적도 없는 망명자다. 누구도 신채호 선생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조선에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과 주필을 할 때는 봉급이 있었으나, 중국 망명자 신채호 선생은 가정을 돌볼 수 없는 처지였다. 박자혜 선생은 조선으로 돌아가 산파 일을 하면서 가장(家長)의 짐을 지고자 했으나, 두 아이를 혼자 길러내며 이역만리 남편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산파 일로도 모자라 참외 장사를 하여 첫째 아들을 한성상업학교, 선린상고까지 보낸다. 그러나 학교에 가는 큰아들의 책가방은 일경에 의해 뒤져지기 일쑤였고, 일경의 간섭으로 학교 졸업도 쉽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신채호 선생은 국외에서 김원봉과 의열단 독립운동에 전념한다. 박자혜 선생은 국내에서 생계를 해결해가며 의열단 일을 돕는다. 대표적인 예가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을 도운 일이다. 독립군의 연락 임무를 맡아 국내 독립운동 활동의 거점이 된다.     


 1927년 눈이 나빠져 눈의 고통이 따르자, 신채호 선생은 가족을 부른다. 지인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내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1920년 조선으로 돌아올 때 뱃속에 있던 둘째 아들은 영양실조로 사망했고, 이때 셋째 아들을 얻는다. 


그 이듬해 1928년에 신채호 선생은 외국위체위조사건으로 뤼순감옥에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10년 선고를 받은 지 8년인 1936년 2월 21일에 신채호 선생은 뇌일혈로 옥사하여 화장된 후, 뼛가루로 박자혜 선생의 품에 안긴다.  


그 당신과 만나기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일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39세요, 나는 24살이었지요. 무엇을 잡아 삼킬 듯이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엷어져 가고, 황토색 강물도 콸콸 넘치게 흐르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 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해에서 북경을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 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해를 겨우 함께 살다가 다시 상해로 가시고 나는 두 살배기와 배 속에 다섯 달 되는 생명을 품에 안고 몇 년을 떠나 있던 옛터를 찾게 되었지요. 

그 뒤에는 편지로 겨우 소식이나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미망인 박자혜 선생이 남편 신채호 선생 영전에 올린 글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박자혜 선생은 신채호의 유해를 청주로 모셔오지만, 신채호의 호적과 국적이 없는 상태였기에 처음엔 종친인 면장의 도움으로 암장했다가, 후에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옛 집터에 안장한다. 신채호 선생이 국적을 회복한 것은 2019년의 일이었다. 세상을 떠난 지 83년만에 대한민국의 정식 국민이 된 신채호 선생. 1943년 박자혜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일을 해낸 것은 아들 신수범 씨였으리라. 이승만 정부의 미움으로 취직이 허락되지 않아 넝마주의로 생계를 유지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평생을 구국과 국권회복,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힘썼던 신채호 선생의 후손의 삶이었다. 


신채호의 아내가 아닌

의료인으로 기억되었으면


동행에 대해 생각해 본다. 1920년 박자혜 선생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녀가 베이징 연경대학 의예과 학업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의학에 전념하여 학업을 마치고 좀 더 전문 의료인이 되었더라면…. 그래서 그녀가 청산리 대첩이나 봉오동 전투에서 부상당한 동포들과 망명자들뿐 아니라 국외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해주는 의료인으로 헌신했더라면…. 그녀가 신채호 선생과의 동행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1919년 3월에 ‘간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꾀했던 의식 있는 엘리트 여성으로서 분명히 그녀는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 그 길 또한 독립운동가의 길이고, 혁신적인 길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박자혜 선생은 신채호 선생과의 동행을 선택했다. 함께 산 것은 단 2년 1개월밖에 되지 못했고, 늘 쓸쓸하고 외롭고 고달프고 아슬아슬한 삶이었으리라.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산파 일도 재량껏 할 수 없었으리라. 그녀는 신채호 선생의 부인이 되어, 선생의 일을 돕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뤼순감옥에서 신채호 선생이 영하 20도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다. 「국조보감」을 보내달라는 것도 보내주지 못한다. 일제 치하에서 박자혜 선생 혼자 산파 일과 참외 장사로는 감당해 내지 못하는 생계가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신채호 선생의 조력자, 동반자로서 그의 아내가 되어 자손을 길러낸 것도 위대한 일이다. 그녀의 가슴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였을 것이다. 시대를 바로 보고 통찰할 줄 아는 의식 있는 엘리트 여성으로 성장했으니까 말이다. 가난한 중인 출신이었으나, 그녀는 사대부 출신의 신채호를 선택했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식민치하의 질곡을 견뎌야 했다. 만약 그녀가 친일자와 결혼했거나, 본인이 친일하여 화려하게 함포고복(含哺鼓腹: 잘 먹고 배 두드리다)하며 살았다면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일본인이 경영하던 총독부 의원과 같은 곳에서 봉급을 받으며, 어렵지 않게 배불리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녀의 선택에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의 서훈으로 응답했다. 


요즘도 의료인이라는 직업을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도 간호사와 산파는 몇 안 되는 전문직 직업인이었다. 그녀가 선택했던 영민한 길은 신채호라는 거성과의 동행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감시, 통제 등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 또한 1919년 3월 10일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간우회 선도자이니, 일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가시밭길은 1919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간우회 조직부터….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마다하고, 민족적 양심의 길을 선택한 박자혜 선생. 배우자를 바라보며 살갑게 살기보다는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신채호 선생. 그런 남편을 이역만리에서 먼 산 너머 빈 하늘만 바라보며 노심초사로 동행했던 박자혜 선생. 


귀래리 신채호 선생 기념관 왼편에 세워진 그녀의 동상. 손에는 아직도 뒷바라지하고 싶은 것이 남아있다는 듯이 뭔가가 쥐어져 있다. 쌀쌀한 바람 불던 어스름한 저녁 하늘 아래 그녀의 동상은 쪽 찐 머리, 저고리에 짧은 개량 한복 치마를 입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네요. 박자혜 선생님. 당신의 이름이 신채호 선생의 이름에 가려서 빛이 약해 보이는지도 몰라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가 아닌, 박자혜 의료인으로 당신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새 생명이 세상에 무사히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산파 의료인. 그렇게 당신의 이름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신채호 선생의 아내 보다박자혜라는 의료인 독립운동가로 그렇게 말이예요. 세브란스의 노순경, 이정숙 간호사처럼….

가정을 꾸려나간다는 건 위대한 일이지요. 장한 아내, 장한 어머니 그리고 마음에 불탔을 독립에 대한 투혼’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고요했고, 짙은 어둠 속에 차들은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다. 저 차들은 모두 누구와 동행하고 있을까?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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