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11] 독립운동의 선봉 안산 봉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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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 향해 절하며 기도했을
가슴 아린 풍경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연대 동문(東門), 이대 후문(後門)에서 언덕길을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안산 산자락에 고즈넉한 봉원사를 만날 수 있다. 개화의 선구자였으며 독립운동가 서재필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이동인 스님이 머물렀고, 한글학회 창립총회가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장 가까운 절이 봉원사였기에, 옥바라지하는 아낙네들이 형무소를 향해서 절을 하며 옥고를 치루고 있던 독립투사들의 무사(無事)를 기도하던 곳이었다. 징으로 머리를 한 대 꽝 맞은 것 같은 먹먹함이 느껴졌다. 아니, 가슴이 아려왔다.

아파트 뒤, 안산 자락길을 따라 등산을 할 때면 봉원사 길로 내려오곤 한다. 그렇게 해서 들르게 되었던 봉원사(奉元寺). 이 절은 필자의 모교에서도 가까운 탓에 학창시절에도 가끔씩 들렀던 곳이다. 불심이 깊어서 찾아간 것이 아니라, 절 주변의 풍경이 마음을 쉬게 했기 때문이었다. 가을이면 가을대로 겨울엔 겨울대로 봄엔 봄대로…. 편안한 정원 같은 느낌을 주곤 했다.
그곳에 수십 번을 넘게 들렀어도, 필자에게 너무 먼 느낌이 든 것은 월간 <순국>에 글을 연재하고부터였다. “봉원사는 요즘과 달리, 그 당시만 해도 산이 깊어서 독립투사들이 그곳에 숨어서 독립운동을 하곤 했었어요. 봉원사에 대해서 글을 써보세요.” 2년 전에 연재를 맡아달라는 말과 함께 필자에게 해준 말이었다. ‘여러 번 갔었어도 표지석이나 아무 흔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한번 다시 가보자고 맘을 먹고 찾아갔다. 항일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면, 기념비나 기념관, 동상, 조형물, 사진 등 뚜렷한 증거물들을 전시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봉원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주지스님을 찾았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삼고초려(유비가 제갈량을 3번이나 찾아가서야 제갈량이 맘을 돌렸다는 중국의 고사)라고 했는데, 주지스님을 만나뵙고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는 일곱 번의 소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종무소에 연락을 부탁해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번째 방문하여 종무소를 나올 때 여직원의 한마디 “이동인 스님에 대해서 조사해보세요” 동행해주었던 친구는 “김동인이라구요?”라고 반문했지만, 필자는 “김동인은 감자, 배따라기를 쓴 소설가잖아”라고 일축해버렸다. 이동인 스님은 소설가 김동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신라 진성여왕 때 창건
한국태고종의 본거지

봉원사에서 내려와 바로 서대문도서관을 찾아 봉원사와 이동인 스님, 봉원사와 영조, 수경원,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아소정 등…. 알지 못해서 보지 못했던 봉원사의 이모저모가 책을 통해서 확연히 마음을 파고들었다. 한나절 동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봉원사에 대해서 공부하고 또 공부를 했다.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얽혀있었다.
봉원사는 현재 연세대학교 내에 광혜원과 나란히 있는 수경원 자리에 지어졌다. 899년 신라 진성여왕 3년 도선국사에 의해 지어졌던 것이다. 지금부터 1116년 전의 일이다. 영조 24년에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이씨의 수경원을 조성하기 위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이전하였다. 한국동란 때 절의 일부가 병화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은 특히 한국태고종의 본거지라는 것도.
태고종파의 스님들은 결혼을 한다. 그래서인지 봉원사 주차장 주변에는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사하촌(寺下村)을 이루고 있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그러나 봉원사는 임란과 호란 등 나라의 위기 때마다 승군으로 전장에 뛰어들었고,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오래된 회화나무, 느티나무 등 서울시 지정보호수를 다섯 그루 가지고 있다는 것도 봉원사의 풍경을 더한다. 연대 동문(東門), 이대 후문(後門)에서 언덕길을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안산 산자락에 고즈넉한 봉원사를 만날 수 있다.
옥바라지하는 아낙네들
독립투사의 무사 기도
여행은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내 안에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날개 짓이다. 30번을 넘게 들렀어도 보지 못했던 봉원사의 천년 묵은 이야기들…. 명부전의 현판 글씨는 조선의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이 썼다는 것. 명부전 기둥의 주렴은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긴 이완용의 글씨라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지. 마포 공덕리에 있던 흥선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의 부재들을 모두 이곳에 옮겨 놓은 것도. 영조가 아끼던 영빈이씨(사도세자의 생모)의 수경원을 이곳에 두고자 했고, 영조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자주 행차했었고, 그때마다 이곳 칠성각에서 잠시 머물곤 했었다는 것….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렁주렁 갖고 있는 곳이 봉원사다. 주지 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느라 밤을 꼬박 새우는데도 힘들질 않았다. 그동안 목마르게 갈구하던 봉원사의 쌓인 이야기들이 흥미진지하게 한밤을 까맣게 태우게 했다.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는 봉원사에 관한 매혹적인 3가지 이야기를 발견했다. 첫째, 개화의 선구자였으며 독립운동가 서재필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이동인 스님이 봉원사에서 머무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글학회 창립총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장 가까운 절이 봉원사였기에, 옥바라지하는 아낙네들이 형무소를 향해서 절을 하며 옥고를 치루고 있던 독립투사들의 무사(無事)를 기도하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징으로 머리를 한 대 꽝 맞은 것 같은 먹먹함이 느껴졌다. 아니, 가슴이 아려왔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들이었을 것이고, 그의 부인이나 어머니가 밤새 옷을 다려 하루에 한 번 있는 면회시간을 줄지어 기다렸을 풍경.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안산을 넘어 봉원사에서 형무소를 향해 절을 하며 기도했을 풍경들…. 가슴이 저린다. 무사히 형(刑)을 마치고 출감을 하면 옥바라지와 기도의 보상을 얻은 것이지만, 모진 고문 끝에 신체를 상하거나 처형된 시신을 시구문 밖에서 받아들고 오열했을 여인들의 피눈물이…. 그리고 극락왕생을 위해 봉원사에 안치한 후 기도로 명복을 빌었을 그들. 송학선의 이야기도 그렇지 않은가? 송학선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총독을 살해할 생각으로 일본인 셋을 암살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 봉원사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었다는 송학선의 애국심과 봉원사의 인연이다.
독립운동 표지석 하나 없지만
은은한 연꽃처럼 향기로워

이제 봉원사가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스님의 혼인을 허용해 줄 것을 두 차례나 조선총독부에 건의했던 분이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만해 선생이 태고종의 중심인 봉원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곳에 와서 유하기도 했을 것이다. 필자가 <진관사 태극기>에 대해서 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초월 스님은 진관사 칠성각 흙벽 속에 태극기 보따리를 숨겨놓은 독립운동가였다. 서대문형무소에 두 차례나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면 몰래 숨어서 독립운동을 했던 백초월 스님. 그 백초월 스님이 진관사 소속이었으나, 봉원사 강주를 역임한 것만으로도 봉원사도 그 당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과는 달리 봉원사는 그때 산이 깊었을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들이 은신처로 봉원사에 몸을 숨겼고,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사찰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임란과 호란 때처럼 구국 운동에 앞장섰던 역할을 일제강점기 때도 봉원사는 묵묵히 담당해 왔다.
지금 봉원사 어디에도 독립운동에 관한 표지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 은은한 향을 내는 연꽃처럼 자신의 공로를 치사(致辭)하지 않고 침묵하는 꽉 다문 입술 같다. 말하지 않아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향을 쌌던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쌌던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법이다.
안산 자락 푸른 숲에 단청빛 지붕의 고고함을 볼 때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었다. 그곳에 삼천불(三千佛)이 있다고 하여 불자(佛者)도 아니면서 들르곤 했던 봉원사. 봉원사 미륵전이 하얀색으로 된 서양식 건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최근의 일이다. 봉원사의 하얀색 서양식 미륵전 건물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표지석 하나가 명징하게 서있다. ‘한글학회 창립한 곳’이라는 하얀 글씨가 까만 대리석 위에 쓰여 있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과 김정진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문맹을 깨치고, 주권을 지키고자 세운 민족학회이며 최초의 학술단체가 한글학회다.
1866년 병인양요(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침략), 1871년 신미양요(미국 함대가 강화도 침략), 1876년 강화도조약(일본에 의해 불평등 조약),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등 구한말 어수선한 상황에서 한글학회의 창립은 뜻깊은 일이었다. 외세의 침략으로 우리의 자존이 흔들리고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때에 우리글을 연구하고 교육할 목적으로 한글학회를 창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한글학회는 일제강점기에도 우리글의 수호와 연구, 보급을 통한 민족정신을 불어넣는 일을 계속해 왔다. 창씨개명을 시키고 우리글과 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일본의 민족 말살정책에 한글학회가 어떻게 대응했을 것이며 수난이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 일이다. 1942년 10월 일제에 의해 학회의 중요 인사가 모두 검거되거나 기소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진다. 한글학회라는 명칭은 해방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학회에 관련된 사람들이 투옥되고 학회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광복 후에 다시 활동을 재개한다.
옳은 일 외면하지 않는 불교
한글학회 창립총회를 열다
‘그런데, 한글학회(그 당시 이름 조선학회)의 창립총회를 어째서 봉원사에서 했을까?’라는 의문을 필자는 떨칠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하고 또 거듭하다가 지인에게 의견을 물었다. “왜 하필이면 봉원사에서 한글학회 창립을 했을까? 그 당시 종로나 안국동, 북촌 등에서 지식인들이 모이곤 했을 텐데….” “모르지, 난 한글학회에 관심 없어”라는 지인의 답변이었다. 불통(不通)의 벽이 느껴졌다. “자기도 한국 사람이잖아? 한글을 쓰는…. 내가 국문학 전공자라서 한글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야. 시골에서 농사짓는 농부들도 오징어를 잡는 어부들도 한글을 쓰는 우리글에는 관심을 갖고 있을걸”이라며 말을 마무리했지만, 섭섭하고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대 엘리트라고 자처할 만한 사람에게서 들은 답변. 어쩌면 이 시대 우리들 대부분은 한글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말 대신 외래어를 더 즐겨 쓰고, 우리 것 대신 외제를 더 선호하며 우리를 외국에 내어주는지도 모르겠다. 외래어를 써야 더 유식해 보이고 그럴듯해 보여서…. 구한말 깊은 산, 봉원사 절에서 모여 한글학회(조선어학회)를 창설하고 마음을 졸여가며 일제강점기 때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다가 일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던 몇몇 사람들만 우리글을 사랑했나 보다.
참된 길을 구하고자 하는 구도(求道)의 길에 불교 봉원사가 외면할 리 없었을 것이고, 사대문(四大門)에서 가까운 봉원사에 모여 뜻있는 이들이 한글학회를 창립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은평구 진관사 흙벽 속에 태극기, 봉원사가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일, 종로 대각사의 백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제주도 무오 법정사의 독립운동이 모두 하나로 닿아 있는 것 같다. 옳은 일을 외면하지 않는 불교, 사찰의 스님들. 봉원사도 역시 그랬다. 궁궐에서 가까운 사찰이라 왕실의 안녕과 국가의 안녕을 비는 왕실 사찰을 담당했음도 위에서 살펴보았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도 일익을 담당하여 독립운동과 우리글을 지키려 했던 한글학회 창립의 장(場)까지.
선각자 이동인 스님
봉원사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다

그런데, 봉원사에서 매년 영산재가 드려진다는 것-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이며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음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한다. 그보다도 봉원사 이동인 스님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동인 스님은 봉원사에서 자랐다. 일찍이 한강에 나타난 프랑스 군함에 충격을 받고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당시 실학과 개화사상의 정점에 있던 박규수, 역관인 오경식, 의사인 유대치 등 개화파 인사들과의 교유를 통해 서양 각국에 대한 지식을 얻고 어둡고 낙후된 조선을 문명된 나라로 변호시키기 위해서 개화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게 돼 1879년 일본 유학에 오른다. 일본과 교류가 없던 상황에서 일본 본원사(本願寺) 승려의 도움으로 밀항 길에 올랐던 것이다. 30세 전후의 나이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막강한 국력을 갖게 된 일본이 1875년 강화도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1876년에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불평등조약이라는 것을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밀려드는 외세의 격랑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김홍집 일행을 일본에 보내게 된다. 신사유람단의 이름으로 일본의 국정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보다 먼저 이동인 스님은 일 년 가까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일본어도 유창하게 할 정도로 눈이 떠 있었다.
1880년 김홍집이 이동인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에게 데려갔고, 이동인 스님은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다. 나라를 지키려면 일본뿐 아니라 미국과도 수교해야 함을 역설하여 국왕의 동의를 받아내게 된다. 2차로 김홍집과 일본에 건너가 개화정책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의 노력으로 1881년 1월 정부 내에 6조를 대신해서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근대적 행정조직이 신설되기도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대포, 군함의 구입이 급선무였기에 일본의 총포와 선박 구입을 위해 도일(渡日) 준비를 하던 중 행방불명이 된다. 1881년 4월경이었다. 그가 거처하던 민영익의 집에서 어떤 사람을 따라 나섰다가 생긴 일이라고 한다. 훗날 그의 행방불명은 암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소리들이 높아졌다. 그의 선각자적인 움직임을 시기하거나 두려워하는 누군가가 그를 제거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두각을 나타내는 별은 떨어뜨리고 부러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김구 선생도 그렇게 암살되었다.
다시 이동인 스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행방불명되었지만, 그가 김홍집이나 박영효, 서재필에게 미친 정신적인 영향력은 막대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에게 정신적인 영향 또한 지대했다. 그가 살아있을 때, 김옥균이 서재필을 데리고 봉원사에 놀러갔을 때의 일이다. 이동인 스님이 가진 선각자적인 의견에 매료된 그들은 이동인 스님이 일본에서 구해온 일본 서적을 더 읽어보고자 했고, 김옥균은 돈까지 주며 일본에서 선진 서적을 더 구해줄 것을 부탁한다. 두어 달 후, 일본서적과 성냥, 일본의 선진 문물에 관한 사진 등은 서재필의 정신생활에 혁명적 변화를 일어나게 한다. 서재필 박사가 후에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발간하게 되는 것도 모두 이동인 스님의 영향이 크다고 단언할 수 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유길준, 서재필들이 모두 이동인 문도였다는 것을 짚는다면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람의 깨인 사상과 선각적인 인도가 이렇듯 역사의 커다란 나침반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의 생물학적인 목숨을 끊어냈을지는 몰라도, 그의 선각 정신은 끊어내지 못했다. 개화파 지식인들과 서재필 박사의 정신에 면면히 흘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봉원사 이동인 스님의 몸부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는 서재필 박사의 독립운동과 봉원사의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을.
봉원사 대웅전 지붕에 단청이 보고 싶어지는 날이다.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에 조용히 울리는 풍경 소리가 안산을 넘어 온 누리로 퍼지는 것 같다.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