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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11] 피로 물든 간도의 눈물 간도 한인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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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반인륜적인 범죄


무고한 청장년 서른세 명 이중학살

시체가 산 이루고 피가 강 이루다


글 | 최범산 작가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이다. 일제의 강제병탄과 탄압을 피해 간도지방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본군의 총칼에 무참히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신참변이라 불리는 간도지방 한인대학살 사건이다. 간도지방을 무력 침공한 일본군이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약 8개월간에 걸쳐 불령선인초토화작전이란 이름 아래 비무장 민간인, 한인촌을 습격하여 잔인하고 야만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인류역사상 가장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학살은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일제의 간도대학살이란 사실을 오롯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처절한 역사의 증언을 우리는 왜 기억 속에서 지워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는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되살아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나치독일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만행을 몇 번이나 사죄하고 반성하였다. 그러나 전범국 일본의 후예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하여 사죄와 반성도 없이 파렴치한 변명과 회피로 일관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마저 외면한 채,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자들이 우리들의 이웃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찌 그뿐이랴. 세계인이 한결 같이 비난하고 있는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대해  유독 일본인들은 철면피로 무장한 채, 오늘도 몰염치한 역사왜곡과 망언들을 쏟아내며 또다시 군비증강마저 서두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역사는 또다시 이 땅에 되살아날 수 있는 생명체이다.


간도 한인의 피눈물과 절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피로 물들었던 간도의 눈물은 오늘도 마르지 않고 있다. 그 눈물과 한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사실들을 이미 역사 저편에 묻었고, 오늘의 일본인들은 그 행위 자체,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하고 있으니 이 울분과 원통함을 누가 풀어야 하는가. 


 

어찌 일본인 탓만 하면서 그토록 긴 세월, 백년의 세월을 허송했는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아스라이 멀어져 간 그날의 참상을 누가 외면했는가. 문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관심과 역사무지이다.


일본군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한인대학살, 간도 한인의 피눈물과 절규, 암울했던 시대상황. 이미 나라는 망했고, 친일군상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돼버린 고향, 의로운 사람들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 당시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던 극한 상황 속에서 피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백년이 지난 오늘, 역사의 뒤안길에 홀로 선 이들의 한 맺힌 절규만이 간도의 피눈물이 되어 대지를 적시고 있다. 


역사학자 신용하는 『독립군의 청산리독립전쟁의 연구』에서 일본군의 간도침입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간도지방 동쪽에서는 포조파견군인 제11, 13, 14사단의 6,000 여 명, 서쪽에서는 관동군의 보병과 기병을 합한 1,200여 명, 남쪽에서는 조선주차군 제19사단에서 9,000여 명, 제20사단에서 700여 명,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돼있던 안서지대 병력 1,000여 명 등 합계 약 18,000에서 20,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일본군 병력을 간도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가며 사방에서 침입시켰다.


일본 정규군, 고도의 훈련을 받은 대병력은 왜 간도를 침공했는가. 한반도를 강제병탄한 후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제에게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활동과 한인정착촌의 성공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중 민간인의 우호협력이 깊어질수록 일제의 만주침공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절박감이 그들로 하여금 간도침공을 단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북간도의 연길, 화룡, 훈춘, 왕청의 4개 현에는 대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정착단계로 접어들고 있었고,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군, 북로군정서, 간도국민회 등 수많은 항일무장투쟁단체 및 독립운동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한반도의 식민지정책의 성공과 안정을 위해 시급히 간도침공을 서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민간인을 패전의 화풀이 대상으로 삼거나 비무장 한인촌을 대상으로 살인, 방화, 강간, 약탈을 감행한 것은 인류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 전쟁범죄였던 것이다. 


북간도 한인촌을 휩쓸며 저지른 죄악이 천인공노할 짓이었건만, 왜인들의 잔악함은 서간도 지방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압록강 너머 서간도에 관동군 대규모 병력이 출동하여 관전, 흥경, 유하, 철령현 등에서 일본군의 한인학살과 방화, 약탈은 더욱 악랄하고 잔인하였던 것이다. 


전대미문의 극악무도함 

참혹하고 잔인했던 실상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강제병탄 이후 한민족에 대한 무단통치를 실시하고, 민족말살 탄압정책을 추진하여 영구히 식민지화를 획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민족은 일제의 무단정치에 굴복하거나 암울한 시대상황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해 의로운 뜻을 세우고 자발적인 항쟁의 길로 들어선 국민들에 의해 3·1만세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우리민족 모두가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 곧 독립열기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만주지역에서 독립군들이 일제의 군경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활발히 전개하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일제는 한국을 영구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민족의 독립쟁취의 열기를 철저히 봉쇄하려 하였다. 


경신년 한인대학살은 일제가 한민족의 독립열기를 차단하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수립한 계획 아래 실행에 옮긴, 간도지역 한인사회를 의도적으로 붕괴, 말살시키려 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일본군 대병력에 의해 저질러진 한인대학살의 실상은 전대미문의 극악무도함, 참혹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가 없었던 것이다.


반인륜적 대학살 부메랑 되어 

섬나라로 되돌아가게 될 것


중국 마적을 이용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한 뒤,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 보호라는 외피를 쓰고 실제로는 독립군을 공격할 목표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은 청산리 전쟁에서 독립군 연합부대에게 참패를 당한 후 미치광이처럼 날뛰기 시작하였다. 


아무 죄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간도지역 한국인들에 대한 야만적인 보복에 혈안이 되었고, 한인마을만 보면 양민들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젊은이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며, 가옥에 방화하고 약탈하는 등의 야만적인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한인들이 독립군을 지원한 데 대한 앙갚음이었으니 일본정규군이란 자들이 얼마나 졸렬하고 비겁한 집단이었던가. 인류역사에서 민간인들을 이토록 야만적으로 학살한 것은 그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늘도 우리들의 이웃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조차 가벼이 여기며 다가올 위협조차 무관심의 늪에 던져놓은 것이 아닌가 심히 우려스럽다.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봉쇄하고 박멸하려는 목적으로 수립한 이른바 삼광정책, 즉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약탈하고, 모조리 불사르는 야만적 전술을 사용해 비무장 민간인 대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일제는 교활한 항복전술, 교활한 사대친미주의 전술로 살아남았고, 한반도를 분단으로 몰아넣고 자신들은 경제대국의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 -그들의 조상들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륜적 전쟁범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부메랑이 되어 섬나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일본군이 간도지방 한인촌에 저질렀던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들. 오늘도 잊혀가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돌아본다.

그 첫째로 북간도 용정시 동성용향 동명촌 장암동의 대학살이다. 노루바위골로 우리에게 알려진 장암동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야만적 행위는 당시 선교사의 생생한 기록이 말해주듯이 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전대미문의 학살사건이었다. 


1920년 10월 30일 새벽 6시. 두만강을 건너 용정으로 침입한 일본군 제19사단 73연대 제3대대 스즈끼 대위가 거느린 70여 명의 병력과 헌병이 남양평에 주둔한 수비대와 합세한 후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강제로 교회당 마당에 모이게 했다. 성년남자 33명을 독립군 부대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씌워 결박하고 교회당 안에 가두어 넣고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불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양민들을 모두 총창으로 찔러 죽였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강제로 보아야 했던 가족들은 넋을 잃고 울부짖다가 일본군이 물러간 뒤에야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냈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던 일본군이 6일 후에 다시 마을을 습격하여 유족들로 하여금 무덤을 파헤치게 한 후에 시체를 한 곳으로 모으라고 했다. 유족들은 일본군의 총칼 위협에 못 이겨 언 땅을 파서 불에 탄 시체를 꺼내 마당에 모아 놓았다. 일본군은 시체 위에 짚단과 나무를 쌓으라고 강요한 뒤에 석유를 붓고 다시 불을 질러 시체가 완전히 소각될 때까지 태워 버렸다. 어찌 인간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이들은 결코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야수요 악마였던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 두 번이나 불에 태워져 이중학살을 당한 시체가 누구의 유해인지 가릴 길이 없어서 노루바위골 사람들은 잿가루가 된 유해를 모아 33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장암동 언덕 위 합장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장암동참안유지(獐巖洞慘案遺址)라는 글자와 함께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일본침략군은 

경신년대참안을 벌릴 때인 

1920년 10월 말 이곳에서 

무고한 청장년 33명을 

이중학살하여 

천고에 용서 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 6月 30日 


북로군정서 본부 

서대파촌의 비극


두 번쩨 참안지는 북로군정서의 본부였던 북간도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 일대이다. 이곳은   독립군 부대가 이미 백두산을 향해 떠난 곳으로 봄부터 피땀 흘려 가꾼 농작물의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만 살고 있었음에도 일본군 19사단의 무자비한 공격은 결코 비켜가지 않았다. 


북간도 연길, 훈춘, 왕청현 한인마을들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은 십리평에 있는 북로군정서의 병영과 사관연성소 건물을 불살랐고, 그 일대에 살고 있던 한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일제의 진중일지에 남아 있는 통계자료에 의하면, 기무라 부대는 1920년 12월 20일까지 94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체포하였으며, 민가 106채, 학교 2개, 한인교회당 등을 불태웠다고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자신들의 죄악을 왜곡하고 뻔뻔스럽게 축소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군정서 본부 

유하현 삼원포의 참상


서간도의 한인촌은 더욱 잔악하기로 소문난 일제 관동군을 공격을 받았으니 그 참상과 고통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대련주둔 관동군 소속의 보병 제19연대와 기병 제20연대의 병력 1,200명이 서간도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이며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삼원포, 고산자 일대의 한인촌을 습격하여 비문장 한인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탐지한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 자락 내두산으로 기지를 옮겼고, 청산리 전투 이후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이동한 상태였다.   


유하현 일대에 남아 망국민의 한과 고통을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던 한인마을에 중무장한 관동군이 쳐들어와 무차별 학살과 방화를 저질렀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씌워 피체된 300여 명의 한인들은 일제의 모진 고문을 당한 채 살해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찌 그뿐인가. 삼원포 한인교회, 삼원포 삼성학교와 마을의 가옥들이 일본군의 방화로 모두 불에 타 한순간에 생활터전 모두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일본군 보병 제19연대는 1920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까지 환인, 관전현 일대의 한인사회를 초토화시켰으며, 기병 제20연대는 11월 초순부터 다음 해 철수할 때까지 해룡, 유하, 통화, 흥경 등의 한인사회에 대한 공격, 학살과 방화, 약탈을 끊임없이 벌였다. 그 결과 서간도 한인사회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대참변을 겪고 그동안 피땀 흘려 이룩한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계속 되었으니 그들이 저지른 죄업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간도지방으로 급파되었던 파견원의 보고에 의해 공식적으로 파악한 피해상황을 보면, 인명 피해가 피살 3,469, 피체 170명이고 재산 피해는 민가 3,209개 동, 학교 36개 교, 교회당 14개 소, 곡물 5만 4,045섬이 소실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립신문은 1920년 12월 28일자 「서북간도 동포의 참상혈보」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보도하였다. 1920년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간도지역 훈춘, 왕청, 화룡, 연길, 유하, 흥경, 관전, 영안 등 8개 현(縣) 한국인의 피해는 피살인원 3,693명, 체포된 인원 171명, 부녀 강간 71명이었고, 재산피해는 가옥손실 3,288채, 학교소실 41개교, 교회소실 16 곳이라고 연이어 보도하고 있다.


상해에서 간행되는 독립신문에 실린 시, 그 당시 간도지역 한인사회의 참상을 애끓는 심정으로 표현한 작품을 소개한다. 잊혀져가고 있는 경신참변의 참상을 백 년 뒤에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필자로서는 그 아픔과 고통의 시대상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불쌍한 간도동포들 

3천여 명이나 죽고 

수십 년 피땀 흘려 지은 집 

벌어들인 양식도 다 불타버렸다 

적설이 쌓인 이 겨울에 

어떻게 살아들 가나 

뻔히 보고도 도와줄 힘이 없어 

속절없이 가슴만 아프도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며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서·북간도 한국인사회의 참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 세계 민중 중에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노유가 참혹하게 도살을 당한 자 있으리오! 

역대 전쟁사에서 군사를 놓아 살육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倭敵)처럼 흉악하고 포악한 자는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저 왜적이 우리 서·북간도의 양민 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일찌기 있던 일이겠는가?   


필자 최범산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및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등으로 있다. 최 작가는 우리들로부터 잊혀지고, 훼손되고, 버려진 북간도 지역 항일독립전쟁의 유적을 십여 년 동안 답사하며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새겨진 유적들을 찾아 기록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역사가 바로 서고, 진실하고 올바른 사람들의 세상을 위해 그는 간도지역 항일유적의 생생한 기록과 현장사진을 묶은 항일독립전쟁 유적답사기 『압록강 아리랑』 『두만강 아리랑』 두 권의 책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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