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Inside

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11] 구불6길 ‘달밝음길’ 군산

페이지 정보

본문

‘달고나 골목’에서 만난 특별한 시간여행    

 

근대문화유산에서 역사를 되새기고

달 밝은 금강 하구에서 나를 찾다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군산은 한강 이남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다. 특히 군산 구불6길 ‘달밝음길’은 일제강점기 처절했던 억압과 핍박 속에서 뜨겁게 항거했던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이 곳곳에 서려 있다.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에서부터 금강과 서해를 한눈에 즐길 수 있는 최고의 걷기 코스다. 지난해 6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걷기여행길 10선’에도 이름을 올린 달밝음길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해보자. 


가을이 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 정처 없이 거닐고 싶어진다. 지나온 길을 천천히 돌아보며 잘 걸어가고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진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황홀한 오렌지빛 노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가을날의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을 흔들 때면 군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곤 한다. 사계절 다 좋지만, 군산은 가을 여행자를 위한 최고의 여행지다. 모든 게 아련하고 촉촉하다. 시간여행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더 좋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이 오늘의 나를 돌아보게 해줄 테니까. 

이번 여행은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에서부터 금강과 서해를 한눈에 즐길 수 있는 구불6길 ‘달밝음길’로 정했다. 월명산, 점방산, 장계산 등으로 이어진 길은 경암동 철길을 지나 금강 하구와 서해에 다다른다. 무엇보다 곳곳에 일제강점기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있어 처절하고 치열했던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며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기에 더없이 좋다. 

호수에 비친 나무 그림자처럼
잡힐 듯 말 듯 아련한 추억이여

시간여행의 출발점은 은파호수공원 입구다. 물빛 반짝이는 호숫가를 걷노라면, 아련한 첫사랑이 떠오른다. 손을 잡고 다정히 걷는 연인들이 여럿 지나친다. 푸르고 어여쁘다. 설레고 기분 좋다. 은파에서 발길을 옮겨 월명공원으로 향한다. 월명공원은 군산의 중심에 자리해 있어 군산시의 상징인 월명산을 비롯해 석치산, 설림산, 장계산, 점방산, 부곡산 등으로 이어져 있다. 

가을로 물든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온몸에서 땀이 흐르는데,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채질해 준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를 감상하며 걷는 가을 길은 공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다. 그저 아름답고 행복하다. 

부곡산을 넘으면 월명공원 산책로를 만난다. 편백숲과 호수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월명호수는 군산 시민의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준공되었던 곳으로 ‘군산 제1수원지’로 불렸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심의 산 위에 있는 호수이기도 하다. 호수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본다. 소중한 옛 추억처럼 잡힐 듯 말 듯 아련하다. 

3·1운념비와 채만식문학비
애국과 변절, 아픈 역사의 공존 

호수에서 행복한 추억 산책을 잠시 즐긴 후, 점방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점방산 전망대에 서면 군산 시내와 내항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맑은 날에는 멀리 금강하구둑과 서해, 장항제련소, 새만금방조제, 고군산군도까지 볼 수 있다.

청소년수련관을 지나 숲길을 따라 걸으면 3·1운동기념비와 만세상을 만난다. 한강 이남 최초로 일어난 군산 3·5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존재만으로도 가슴 뭉클하다. 꽃과 숲이 어우러진 산책로에는 일제강점기 어둡고 혼탁한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했던 소설 『탁류』를 기리는 채만식문학비가 있다. 

채만식은 식민지 상황에서 농민의 궁핍,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의 혼란상 등을 실감 나게 그리면서 그 근저에 놓여있는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 소설가다. 하지만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1942년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행사에 참석하고, 『춘추』 등에 발표한 산문과 1943~1944년 『매일신보』 등에 발표한 산문과 소설을 통해 징병, 지원병을 선전·선동한 이력이 있다. 예술가의 변절은 더 뼈 아프다. 학창시절 읽고 감명받았던 작품들이 이젠 상처로 남았으니 말이다. 채만식문학비를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좀 더 가면 6·25전쟁 당시 군산시가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기 사흘 전 군산과 장항 인근에서 있었던 전투를 기념하는 해병대 군산·장항·이리지구 전적비가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계단 아래에는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촬영되었던 흥천사가 있다.

근처에 있는 반원형의 작은 터널은 ‘해망굴’이다. 1926년 10월 개통되었으며, 6·25전쟁 때 인민군의 작전본부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아직도 폭격기의 탄환 흔적이 남아있다.

뜨거운 만세함성 강물 따라
망망대해로 흘러 영원하리

숲길 여행을 마치고 나오면 ‘살아있는 근현대사 박물관’이 펼쳐진다. 제일 먼저 옛 군산세관이 눈에 띈다. 대한제국 시절 국내 유일의 세관 건물로 1908년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 등 건축재료를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지어졌다. 세관 옆으로 군산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이 있다. 

군산은 1899년 5월 1일 외국에 정식으로 개방되었다. 군산 개항은 쌀이 필요한 일본 측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일제강점기 김제만경평야에서 수확한 미곡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되었다. 군산 지역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고,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발걸음을 옮겨 경암동 철길마을로 향한다. 철길마을 역시 일제강점기 산물이다. 일본인들이 방직공장을 짓기 위해 바다였던 경암동 일대를 매립함으로써 그 역사가 시작되었고, 해방 직전인 1944년 4월 신문제지회사의 원료와 생산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개설되었다. 해방 후 정부가 관리하게 되면서 황무지와 다를 바 없던 이곳에 오갈 곳 없는 실향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1970년대에 비로소 마을의 형태를 갖추었다. 2008년 7월을 마지막으로 하루에 두 번 화물 기차가 운행되었으며, 지금은 옛 군산역과 공장을 잇는 총길이 2.5km의 철로 중 진포사거리에서 연안사거리까지 약 400m의 직선 구간에 과거와 현대가 이웃하는 문화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추억을 떠올리고 옛 추억 위에 새로운 추억을 쌓는다. 옛 불량식품을 연탄에 구워 먹고 옛 교복을 입고 시간여행을 떠난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전세계적 흥행 덕분에 ‘달고나 골목’이 인기다. 사랑과 우정으로 버무려진 웃음이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철길을 따라가면 구암동산에 닿는다. 한강 이남 최초로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핀 군산 3·5만세운동의 발원지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 선생과 접촉해 독립선언서 2백여 매를 전달받은 뒤 군산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군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단발로 끝나지 않고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총 28회에 걸쳐 진행됐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만 3만 7천여 명에 달했으며 사망자 53명, 실종 72명, 부상 195명 등이 발생한 대규모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어느덧 금강 너머 서쪽 하늘에서 오렌지빛 노을이 밀려온다. 굽이굽이 흘러오느라 고단했을 강물이 너른 바다의 품에 안긴다. 100여 년 전 뜨거웠던 만세함성이 가을바람과 함께 귓가를 울린다. 가슴이 저려온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