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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2021/11] 흙·물·불·영혼의 예술 한국의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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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만의 독창성


독자적 가치와 내적 아름다움에 집중

우아하고 순박한 걸작을 빚어내다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 


유난히 푸른 가을날이다. 하늘이 맑으니 올가을은 달도 더 밝다. 우리 선조들은 유달리 달을 사랑했다. 그래서 우리 산야에는 달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신라의 달밤’의 주역인 경주 반월성, 남도 5대 명산의 하나인 담양 추월산, 영동의 월류봉과 괴산 제월대,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리는 월악산과 월출산 등 헤아릴 수 없다. 한강 변을 거닐다 휘영청 밝은 달을 보니 달항아리가 떠올랐다. 보물 제1437호 백자 달항아리는 눈처럼 흰 바탕색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의 도자기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창성과 예술성이 빼어난 걸작이 아니던가.


도자기는 흙·물·불·영혼의 예술이라 불린다. 흙과 물로 빚어 불에 구워 그 안에 예술혼을 조화롭게 담아낼 때 비로소 걸작이 나온다. 우리 조상들은 요란한 모양이나 화려한 색깔을 표현하기보다는 소박한 자연의 색과 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위주로 한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한국의 도자기는 선이 곱고 색이 순하며, 내적인 품위를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중국에서는 ‘고려청자의 비색은 천하제일’이라 칭송했고, 일본은 임진왜란 때 일반 백성들이 흔히 사용하던 도자기들까지 보이는 대로 다 빼앗아 일본의 국보로까지 지정했다. 현재에도 그 명성이 이어져 세계 미술품 경매에서 최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해외에서 거래된 한국미술품 최고가 기록은 지난 1996년 크리스티에서 낙찰된 ‘철화백자 운룡문호’로 841만 7,500달러에 팔렸다. 백자 위에 철을 산화시켜 검붉은 색으로 용과 구름을 그린 항아리다. 흰 도자기 위에 푸른색 문양을 그려 넣은 청화백자도 인기가 높다.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본햄스 경매에서 조선 청화백자가 418만 4,000달러에 낙찰됐고, 201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발톱 다섯 개 달린 용을 그린 왕실용 청화백자가 321만 8,500달러에 거래됐다. 2018년에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추정가 15~25만 달러에 출품된 높이 23.5㎝의 15세기 조선 초 ‘분청사기 편호’가 예상 가격의 20배를 넘겨 313만 2,500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분청자기로는 세계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고려청자, 세계 도자기 역사상
유례없는 독창성

한국 도자기의 역사는 약 4천 년 전 북방으로부터 집단으로 이동해와서 생활하기 시작한 토착민의 무리로부터 시작되었다. 필요한 도구를 돌로 만들었던 석기시대였다. 

그 후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자기 발달이 본격화되었다. 삼국시대에는 토기가 완전히 생활화되었으며, 용기나 기와 등에까지 화려하고 섬세한 무늬를 넣어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삼국시대는 일상용기로 토기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는 공통점과 그 형태나 무늬 또는 질감이 서로 달랐다는 외형적 차별점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토기는 더욱 세련된 형태로 변해갔다. 9세기에는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을 통해 청자 제조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토기 문화권을 벗어나 자기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고려는 10세기 후반에 개경 근처에서 처음으로 청자를 만들었으며, 당시 귀족 중심 불교국가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세련된 걸작을 많이 남겼다. 이를 ‘고려청자’라 했다. ‘청자’라고는 하지만 실은 녹색이며 엷은 담록색, 회청색 등 빛깔이 여러 가지다. 고려인들은 그 색을 ‘비색(翡色)’이라 불렀으며 ‘흙을 빚어 비취옥(翡翠玉)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당시 중국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은 천하제일’이라고 칭송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만의 독창성을 갖게 되었다. 

초기에는 순청자(純靑磁)가 만들어지다가 12세기에 들어 상감청자(象嵌靑磁)가 만들어졌다. ‘감(嵌)’이란 깊은 골짜기를 뜻하므로 ‘상감’은 골짜기를 메워 어떤 형태를 이룬다는 뜻이 된다. 즉, 상감청자는 그릇 표면을 파고 그 속에 백토(흰 흙)나 자토(검은 흙)를 메워서 청자의 푸른 바탕에 흰색과 검은색 무늬를 장식하는 수법을 말한다.

도자기에 상감으로 무늬를 장식하는 수법은 세계 도자기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고려인들의 독창적 문양기법이며, 고려청자를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든 수훈의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상감기법은 거의 1세기 동안 전성시대를 이루었으며, 상감청자는 고려청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5세기 초 청자에서 백자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분청사기’라는 매우 특징 있고 우수한 도자기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독특한 분청사기는 16세기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전파됨으로써 일본의 자기 발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일본은 자기를 생산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수많은 한국의 도공을 일본으로 끌고 가 비로소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우리나라 곳곳의 가마가 파괴되고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감으로써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조선백자, 한국적 정서 담아낸
무한의 깊이

17세기에 이르러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순결, 순수, 겸손을 상징하는 순백색의 ‘조선백자’가 탄생했다. 백자는 아름다운 순백색의 자기에서 다양한 문양과 대담한 변형을 이뤄 회화적이면서 유머와 위트를 담은 세련된 공예 예술로 발전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유산인 조선백자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예술성, 조형미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단순해 보이는 백색 속에는 무한한 깊이가 있어 우리 선조의 고결한 성품, 순박한 정서, 꾸밈을 모르는 순수성, 흰옷을 좋아한 전통이 그대로 느껴진다. 시대에 따라 빛깔을 달리했고,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우리 민족의 정서와 심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또 조선백자는 당시 청나라의 오랑캐 문화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조선의 정신적인 가치와 내면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했기에 더 의미가 있다. 

그중에서도 백자 달항아리는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정서가 가장 극대화된 예술품으로 꼽힌다. ‘달항아리’는 한 해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대상이자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던 달을 연상시키는 형태이기에 더욱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공식명칭은 ‘백자호’인데 그중에서도 높이가 40cm 이상 되는 것을 달항아리 혹은 백자 달항아리라 칭한다. 이렇게 큰 항아리는 다른 그릇처럼 물레에서 한 번에 모양을 만들기 어려워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제작한 후 두 개를 이어 붙여 만든다.

 이런 연유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기 어렵지만, 오히려 비대칭에서 오는 조형미가 특별한 매력을 발산한다. 깨지기 쉬운 데다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며 전해져 내려온 물건이기에 현존하는 달항아리는 국내외 합쳐 20점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 있는 달항아리 중 7점은 국보(3점)와 보물(4점)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귀한 문화재다.

달항아리는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에게도 끊임없는 영감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 미술품 가운데 최고가 기록을 가진 김환기는 “내 예술의 모든 것은 달항아리에서 나왔다”, “조형과 미와 민족을 도자기에서 배웠다”고 했으며, 심지어 “글을 쓰다가 막히면 옆에 놓아둔 크고 잘생긴 백자 항아리 궁둥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하며 1950~60년대에 달항아리를 집중적으로 그렸다.

한국 고고미술사학계에 큰 업적을 남긴 김원용은 ‘백자대호’라는 시를 지어 “조선백자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의 미”라 칭했고, 미술학자인 최순우는 달항아리를 “무심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며 달항아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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