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Inside

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12] 소난지도 최구현 의병장 이야기

페이지 정보

본문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위대한 유산‘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언젠가 최구현 의병장의 묘소에 참배를 갔을 때, 묘소 옆에서 보았던  컨테이너 박스. 최충묵 씨는 그곳에서 산소를 참배하러 오는 학생들이 올 경우에도 최구현 의병장에 대한 설명을 하곤 하셨다. 더 잘하기 위해서 컨테이너 박스를 구하여 산소 옆에 설치하였고 전기도 전화선도 끌어다 놓고 그곳에서 주무시고……. 그렇게 시묘살이를 자처하셨다. 2009년 7월 8일 돌아가시는 날까지. 21세기에도 시묘살이의 모범을 보이는 분이 계셨다는 것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소난지도. 당진에 있는 작은 섬의 이름이다. 


지난 겨울, 상록수의 심훈 문학관을 둘러보기 위해 당진으로 하루 여행을 갔었다.당진은 아름다운 곳이다. 아산 공세리 성당에서 당진 솔뫼성지, 왜목마을을 둘러보고 나니 짧은 겨울 해가 기울었다. 당진에 소난지도가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비도 선착장에 가보았지만 이미 배는 끊어진 상태였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소난지도는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었지만, 바다를 건너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소난지도를 못 보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음에 품으면 길은 반드시 열리는 모양이다. ‘소난지도에 다시 가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회를 찾던 중, 40여 명의 단체 속에 섞여 그곳을 다시 찾을 기회가 왔다.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는 

의로움이 전부였던 그들


도비도 선착장 앞바다는 잔잔하기만 하다. 6월 햇볕이 따갑게 내리쪼이고 있다. 평화로운 뱃길에 갈매기들도 우리들의 섬 여행의 풍경을 더해준다. 고요한 전율이 마을을 파고든다. 15분 정도 배를 타고 우리는 기념탑 앞에 모였다. 햇볕이 여전히 따갑게 우리들의 정수리를 쪼아댄다. 기념탑 옆으로 잔잔한 바다는 고요한 침묵으로 우리를 반기는 듯하다. 기념탑 주변에 야트막한 야산의 소나무들이며 아카시아 나무에서는 아카시아 향기가 퍼지고 있다. 


이윽고 기념탑 주변에 사열한 군인들이 조포를 울린다. 6월 1일 ‘의병의 날’ 행사를 알리는 총성이다. 군인은 싸우는 사람들이다. 국방을 지키는 이들이다. 그런데, 110여 년 전에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은 군인들 간의 전투가 아니었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보리쌀 한 톨의 녹읍도 받지 못했던 의병들이 의로운 마음 하나로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 소난지도였다. 군사 훈련도 받지 못했고,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나라가 위급할 때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싸우는 사람들이 의병이라고, 백암(白岩) 박은식 선생은 의병에 대한 뜻 매김을 했었다. 그들에겐 화승총과 창칼이 전부였다. 멸문지화를 당하고 가족이 몰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는 의로움이 전부였다. 그들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적들과 맞섰지만, 탄약이 떨어지고 육탄전은 곧 전패로 이어졌다. 일부 의병들은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굴욕을 피하고자 바다에 몸을 던져 물살에 떠내려가거나 물고기 밥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이름 없이 죽어간 의로운 넋들은 소난지도 앞바다와 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들에게도 돌봐야 할 노모가 있었을 것이고, 어여쁜 지어미가 있었을 것이고 먹여 살려야 하는 자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겐 그런 사사로운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가 더 소중했다. 의로움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그들은 장렬하게 전사했다. 바위에 이름 하나 새겨두지 못하고……. “아무개 여기 소난지도에서 왜놈들과 의롭게 싸우다가 죽는다”라고 이름 석 자 남기지 못한 채 그들은 그렇게 죽었다. 


110여 년 전에 그물이나 발에 걸려 오른 시신들이 곳곳에 가매장되거나 둠바말 바닷가, 장안에 해변에 구덩이를 파고 매장되었었다. 장안여 해변은 조선의 의병과 왜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그리고, 먼 훗날 약초에 눈이 먼 후손에게 도굴되기도 했고, 가매장되었던 웅덩이나 해변 무덤에서 해풍을 이기지 못한 유골들이 뒹굴었다. 


그곳에 들렀던 석문중학교 교사 한 분이 그것을 발견하고, 학교 이사장과 교장에게 알렸다. 교직원과 학생, 주민들이 뜻을 모아 유골을 수습, 봉분을 봉축, 묘역을 정비하는 복 짓는 일을 했다.   


1908년 3월 15일, 소난지도 대일항전 역사상 가장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 1906년부터 소난지도는 최구현 의병장이 이끌던 면천의병, 홍일초 의병장이 이끌던 화성의병, 김태순 의병장이 이끌던 서산의병, 차상길 의병장이 이끌던 홍주의병 충남 서해안 지역에서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왜적과 싸운 호국의 섬이라 하겠다. 1910년 5월까지 당진과 인근 지역에서 몇 차례 항일의병 항쟁이 일어났으나 1910년 8월 이후에는 소난지도에서 항일의병항쟁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몇 분들의 추념사와 추모사, 시낭송에 이어 의병들의 넋을 기리는 춤사위가 있고 난 뒤 소난지도 의병 기념식이 마쳐졌다. 바닷가 한편에 의병총이 마련되어 있다. 금산에서 보았던 700의 총이 생각난다. 의병총 앞에 헌화 분향하고 묵념을 올렸다. 저만치 바다는 조용하고 잠잠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림처럼 작은 배 몇 척이 바닷가에 정박하여 있다. 잔잔한 바다는 말이 없고, 고요하기만 하다. 그저 평온한 한 폭의 풍경화 같다. 그러나 의병총 속에 누워계신 유골들은 전신이 온전히 묻히신 분도 있겠지만, 팔 한 짝만 묻힌 분도 있을 것이고, 발 하나만 묻히신 분도 있다는 것이 가슴을 아프고 또 아프게 파고든다.

 

마을 회관에 마련된 점심을 먹기 위해 10분 정도를 걸었다. 내리쪼이는 자외선은 의병들을 공격하는 조총처럼, 가차 없이 우리들의 살갗을 공격했고 따가웠다. 옆으로 보이는 당진 바다가 여전히 잔잔하게만 보인다. 여름에 놀러 오는 이들을 위해 펜션들도 곱게 지어져 있다. 저쪽엔 해수욕장도 있다는 표지판도 눈에 뜨인다. 내리쪼이는 햇살을 피할 방법도 없이 식사한 후, 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왔다. 


소난지도 전투 이끌었던 

최구현 의병장 이야기


행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도비도 선착장에서 30여 분 차로 이동하여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 있는 최구현 의병장의 묘소 참배가 남아있었다. 묘소에 도착했을 때, 오후가 되니 뙤약볕은 더 심해져 있다. 누구라고도 할 것도 없이 우리 일행은 최구현 의병장의 묘소에 큰절을 올렸다. 치마를 입고 갔던 탓에 맨다리는 풀에 찔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예를 표해야 할 것 같은 마음. 그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께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묘소 옆에 세워진 오 석(검은 돌)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다른 묘소에서는 보기 힘든 꽤 넓적한 비석이었고 글자도 빼곡하게 많다. 묘지석이 발견되어 오 석에 그대로 옮겨 적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묘지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나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은지,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다는 혼잣말을 했는데, 그 말을 최구현 의병장님의 증손녀 최미경 씨가 들었다. “커피 드시고 싶으세요?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웬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인도한다. 그곳에서 물을 끓여 우리 일행에게 커피를 타주면서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내게 들려준다. 최구현 할아버지 산소를 이장한 후, 며칠 되지 않았는데 최미경 씨의 할아버지(최창묵 씨)가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얀 도포를 입은 40대 선비가 칠십 넘은 손자에게 나타나 이사 오면서 문패 떼어오지 그냥 왔느냐? 문패 찾아오너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번 묏자리를 썼던 곳은 파묘라 하여 더 이상 묘를 쓰지 않고 있던 터라, 어릴 때 성묘 따라갔던 기억을 더듬어 묘를 파보았더니 거기서 묘지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묘지석을 한필선 씨가 해석한 결과, 그 내용은 전투일지임을 알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정부에 알리게 되었고, 결국 그 묘지의 주인이었던 최구현은 1906년 소난지도 전투를 이끌었던 의병장이었던 것이 밝혀졌고 2004년 8월 15일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다. 


최구현 의병장은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서 370명의 의병을 모아 면천성을 공격하게 된다. 관군과 일본군과 투쟁하였으나 무기가 열세하여 퇴각하여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최구현 의병장에게 남아 따르던 36명을 데리고 밤을 이용하여 소난지도에 도착한다. 이미 도착한 당진의병, 화성의병, 서산의병, 홍주의병과 합류하여 120여 명이 되었다. 간도(間島)로 항해(航海) 준비를 하던 중 1906년 8월 24일 새벽에 최구현 의병장은 피체된다. 신목선(薪木船)으로 위장한 관군과 왜군이 2~3백 명이 기습했기 때문이었다. 최구현 의병장은 면천아문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초죽음이 된 상태로 면천아문에 전답 30결(8만여 평)을 몰수당하고 수레에 실려 출옥(동짓달)했으나 그해 12월 23일에 순국(옥병사)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극심한 효심으로 

시묘살이 이겨낸 후손 


그의 아들(최태형 씨)이 13세(어떤 기록에는 15세)였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독립적으로 가장의 책임을 다할 만큼 성장하지 않은 어린 나이였다. 그의 아들 최태형 씨는 어려운 집안을 끌어가다가 최사묵 씨(최구현 의병장의 둘째 손자, 최태형 씨의 둘째아들)가 10세 때 세상을 떠난다. 이 이야기들은 최사묵 씨가 필자를 찾아와 들려주신 이야기였다. 최사묵 씨는 자신의 삶이 최저의 생활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전답 30결을 몰수당했고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시니 어린 형(최충묵)과 최사묵 씨는 몹시 힘들게 살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정직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고, 군에 강압적으로 입대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군에 입대한 것이었다는 진술이었다. 최사묵 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여러 가지 들려주셨지만 “힘들고 어려웠다”는 한 마디로 일축할 수 있을 것 같다. 결혼을 40세에 했다고 했다. 자신이 방 하나에서 형제들이 기어다니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가난을 벗고 나서 결혼하고 싶어서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그분이 살아오신 것을 매일매일 관찰하지 않았어도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어느 조상이 후손들이 어렵게 살길 바라실까? 최구현 의병장도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의 고통보다 나라의 앞날과 의로움을 먼저 생각했기에 그 어른은 끝까지 의병투쟁을 하고자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아이러니한 일은 최사묵 씨의 형 최충묵 씨에 관한 일이다. 최충묵 씨에게는 할아버지 최구현 의병장이 서훈된 이후 월 105만여 원의 연금이 지급되었다. 형제는 충북보훈처에 가서 문의를 한다. 보훈처에서는 연금은 손자까지 받게 되어있으므로 최충묵 씨가 사망하면 최사묵 씨가 받게 될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예산 부족의 이유로 최사묵 씨에게는 연금이 지급되지 않는 상태이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곳에 예산을 조금 덜 쓰더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후손들에게 어느 정도 대접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거룩한 일은 후손들에게도 복이 된다’라고 하는 본보기로라도 말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망개떡 장사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후손은 지하 월세방에서 최저생활비도 없어서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누가 나서서 나라를 구하려고 할 것인가? 자신의 안일과 밥그릇을 먼저 챙기게 되지 않을런지. 친일을 했던 이들이 더 부유하게 온갖 혜택을 다 누리고 살고 있다면 이는 매우 씁쓸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최사묵 씨에게 들은 최충묵 씨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맺으려 한다. 그분도 어렵게 살아오셨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일 것이다. 


언젠가 최구현 의병장의 묘소에 참배를 갔을 때, 묘소 옆에서 보았던 컨테이너 박스. 최충묵 씨는 그곳에서 산소를 참배하러 오는 학생들이 올 경우에도 최구현 의병장에 대한 설명을 하곤 하셨다. 더 잘하기 위해서 컨테이너 박스를 구하여 산소 옆에 설치를 하였고 전기도 끌어다 놓고, 전화선도 끌어다 놓고 그곳에서 주무시고……. 그렇게 시묘살이를 자처하셨다. 최충묵 씨는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2009년 7월 8일 돌아가시는 날까지. 21세기에도 시묘살이의 모범을 보이는 분이 계셨다는 것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최구현 의병장 할아버님에 대한 극심한 효심이 시묘살이의 고초도 이겨내게 했을지도 모른다.  최구현 의병장님이 막대한 물질적 재산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한일의정서 체결에 반발하여 낙향하고, 을사늑약 체결에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의병을 일으키셨던 최구현 의병장의 후손이라는 긍지가 그의 후손들에겐 어마어마한 위대한 유산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친일하여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간 조상을 그의 후손들은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못한다. 누구도. 그러나 최구현 의병장의 후손들은 어렵게 살았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위대한 재산, ‘정신적인 긍지와 자부심’을 받았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위대한 유산이다. 


위대한 유산 품고 사는 

유족들에게 박수갈채를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에 내리면 독립관(현충사)에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3,000위 정도 모셔져 있다. 그 위패의 후손들은 모두 위대한 유산을 받은 분들일 것이다. 최사묵 씨가 현충사 앞에서 필자를 만나, 자신의 할아버지의 위패가 이것입니다. 하며 위패의 위치를 찾아 보여주실 때, 필자는 아주 아주 부러웠다. “최익현 의병장도 우리와 같은 집안이고 최구현 할아버지와 같은 솥불鉉을 쓰십니다”라며 자랑스러워하시는 최사묵 씨의 표정이 매우 밝아보였다. “네, 저도 대마도 여행을 갔을 때, ‘최익현 선생 순국비’를 보고 왔어요. 일본 수선사(修善寺)라는 절에 그 기념비가 있었어요”라는 말로 그분의 긍지에 방점을 하나 더 찍어드렸다. 위대한 유산을 가슴에 안고 사시는 유족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것이 정신적인 유산일 테니까…….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