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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01] 항일 무장투쟁 벌인 독립운동가들의 지극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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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장래 먼저 생각한 담대한 실천


역사 속에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지용과 기상 오롯이 대면하길… 


글 | 최범산(작가) 


요즈음 이 나라에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정치가들이 있다. 또한 불의와 불공정에 분노하는 시민들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옮음, 불의한 세상을 바꾸려는 지극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독립운동사는 현대사라고 주장한다. 독립군 장병들의 정의감과 용기를 배워라. 세치 혀 위의 정의와 공정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오로지 행동하는 정의만이 용기를 먹고 자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에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삶을 살아간다. 그 시대가 자유로운 시대이든, 아니면 고난과 억압의 시대이든 숙명처럼 살아가야만 한다. 필자는 오랜 세월 동안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유적지를 답사하면서 그 엄혹한 시대를 살아간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진솔하게 보고 느낄 기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전후 독립운동가들은 국난과 망국의 시련을 마주해야 했으며, 강점과 침탈의 시대, 억압과 수탈에 맞서 생사를 걸고 싸워야 했다. 개인적인 삶의 성취보다 민족의 장래를 먼저 생각해야 했던 그들의 삶은 지극히 담대하고 헌신적인 용기를 필요로 했다. 


나는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가 서린 유적지에 설 때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는 헌신과 용기를 발견했고,  불굴의 기상이 온몸으로 전해져 와 숭모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우리 역사에 남긴 업적과 정신은 극악무도한 일본의 억압과 수탈에 맞선 사람으로 드러낼 수 있는 지용(智勇)의 극치였으며, 지고지순의 충절이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왕산 허위(許蔿)는 옳았다 


1908년 2월, 진동창의대장이며 13도창의군 군사장 허위는 서울진공작전을 성공하지 못하고 임진강 감악산 의병훈련장으로 돌아온 뒤 의병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직(社稷)을 호위하고 강토를 보호하는 것은 산 사람의 대의(大義)이다. 의리는 곧 하늘이니,  우리가 마땅히 하늘을 받들어 진공작전을 행한 것이므로 성패는 논할 바가 없다.”


허위가 지휘하는 진동창의군의 패전은 병가상사일 뿐 결코 절망은 아니었다. 의병전쟁은 대의를 위해 행하는 것이며, 우리 민족이 함께 살아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것이라고 했다. 


1896년 3월, 경상도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는 1907년 7월 김수민, 왕회종, 연기우 등과 함께 임진강 일대에서 또다시 의병을 일으켜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했던 것이다. 


허위는 일제의 위협, 밀정들의 감시를 뚫고 철원, 연천, 파주, 양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국난극복과 의병전쟁의 대의를 역설하고, 의병진의 통합과 재기를 추진했다. 그리고 성균관의 박사로 함께 근무하며 유생들을 가르쳤던 적성읍내 경현수, 경문수 형제의 지원을 받아 감악산 일대에 훈련장을 열고 제2의 서울진격작전을 준비하였다. 또한 일제와의 전투에서 패전당한 아픔으로 의기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의병들, 일본의 위세와 회유에 현혹되어 의병대열을 이탈하려는 장병을 만나 사기를 북돋으며 위국충정의 대의로 설득하여 의병에 다시 복귀시켰다. 


“우리 모두는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 자연의 이치를 본받으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을 스승으로 삼듯이 뒤에 태어날 사람은 우리를 스승으로 삼을 테니 우리 모두의 삶은 소중하고 위대하다.”


왕산 허위는 국난의 시대 의병전쟁을 통해 겨레의 의리를 지키는 소중한 삶을 깨우친 선각자였으며, 의병(義兵)들에게 의로운 충절을 일깨운 위대한 지도자였다. 


허위는 엄격한 신분사회를 살아온 유학자로서 평리원 재판장까지 지냈던 신분을 던져버리고 평민, 상인, 천인, 화적 출신도 위대한 의병으로서 미래의 스승임을 역설한 것이다. 허위의 언행일치의 실행은 유교적 신분과 지위를 초월한 동지애였으며, 시대적 폐습을 과감히 혁파해버린 용기의 발로였다. 


1908년 6월, 포천 유동에서 일본 헌병대에게 피체되어 경성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일본의 주구가 된 재판관이 자신을 심문하자,


“나는 대한국(大韓國)의 당당한 의병장이다. 너희 같은 놈들과 변론하고 싶지 않으니 다시는 묻지 말라.”


친일매국배반자들에게 비분강개한 허위의 호통이 재판정을 울렸다.

 

허위 의병장은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나 죽음을 마주한 사형장에서도 대한의병장으로서의 민족자존과 기개를 잃지 않았다. 


모든 독립운동사는 현대사다.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 형장에서 침략자 왜구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허위 의병장의 생사 초월적 의기(義氣)와 기상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물론, 후세인들에게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정의는 하얼빈을 울리고 

역사는 서울에서 통곡한다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개관한 안중근 기념관을 찾는 한국인이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수천 리 떨어진 이국땅까지 기념관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저 놀랍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한편 대한민국의 서울에서는 이 땅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일제강점기는 억압과 수탈의 시대만은 아니었다는 망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 수상 스가 요시히데가 화답하듯이 조선합병은 한국의 경제문화 발전에 기여한 시대였고,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이며 살인자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었고, 국권수호에 나선 의병을 학살하고, 조선인의 자유와 재산을 침탈한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군 특파대장 안중근 의사가 응징하고 사살한 것이라는 나의 외침은 그만 목구멍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서울 한복판에서 온갖 망언이 버젓이 쏟아지고 있는데, 전범자의 나라의 후예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동안 역사왜곡으로 표를 먹고 살아온 일본 극우정치인들의 망언은 얼마나 많은 역사의 통곡을 불러 왔는가. 

 

광복 후 70여 년 동안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국민의 외침을 외면하고 있는 신친일 토왜와 수구들의 심보는 무엇일까. 그저 우이독경인가. 아니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동족의 외침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인가. 그들은 왜 일본인의 목구멍에 걸려있는 가시는 보고, 15만 순국선열의 피눈물은 보지 못하는가. 순국선열 후손들의 가슴에 조여 있는 원한과 통곡의 사슬을 어찌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강대한 경제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를 만들어 가장 먼저 토왜들을 구축(驅逐)하고, 일본 전범 후예들과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순국선열 제단에 석고대죄한 뒤 세계인류를 향해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백배사죄케 만드는 것이리라. 


독립군 무명용사의 위대한 

기개와 용기 오늘에 살려야


하얼빈역에서 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쌍성보시(雙城堡市)가 있다. 그곳은  한국독립군 장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후, 쌍성보는 합장선(하얼빈과 장춘을 연결하는 철도)의 요지이며, 북만주 물류의 집산지이며, 일본군 전략요충지였으므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었다.


1932년 11월 7일,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이 지휘하는 독립군 3천 명, 중국제3호로군 고봉림 부대 2만 5천 명의 한중연합군은 하얼빈 남쪽 쌍성보를 공격하였다. 항일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에 놀란 일본군이 혼비백산하여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한중 양국의 부대는 각각 성내에 돌입하였다. 성내에 있던 일본군과 만주괴뢰군들은 북문을 열고 재빨리 도망쳤으나 미리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3만 명의 병사가 3개월 동안 쓸 수 있는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11월 20일, 일본군은 쌍성보를 수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공격해 왔다. 하얼빈과 장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와 만주군의 대병력이 비행기의 엄호를 받으며 반격하여 온 것이었다. 


이틀 동안 밤낮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자, 피아간에 사상자가 속출하여 쌍성 안팎으로는 피바다를 이루었고,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였다. 한중연합군의 저항이 격렬하여 잠시 후퇴했던 일본군이 21일 밤에 또다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쌍성의 서문을 방어하던 독립군의 전열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적의 비행기 공격과 격렬한 포격으로 인하여 마침내 적에게 돌파 당하고 말았다. 지청천과 황학수 등 독립군 지휘부는 서문에서 퇴각한 후 오상현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쌍성보 공방전에서 수많은 독립군 병사들이 머나먼 이국땅에 애끓는 조국독립의 염원만을 남긴 채 거룩한 전사를 했다.


한국독립군 장병들은 왜 목숨을 바쳐가면서 이국의 땅, 쌍성보에서 일본군과 이토록 처절한 전투를 벌여야 했는가. 그것은 오직 자주독립의 염원이었다. 독립군 전사자들 가운데는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에 항거한 나주 전투에서 살아남아 만주로 망명한 의병도 있었을 것이고, 서간도 신흥무관학교를 마친 병사도 있을 것이고, 경술국치 후 만주에서 태어나 조국 땅을 밟아보지 못했던 소년병사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정의로웠고, 용감했으며 독립전선에 목숨을 바칠 용기를 가졌던 위대한 전사들이었다.


요즈음 이 나라에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정치가들이 있다. 또한 불의와 불공정에 분노하는 시민들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옮음, 불의한 세상을 바꾸려는 지극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독립운동사는 현대사라고 주장한다. 독립군 장병들의 정의감과 용기를 배워라. 세치 혀 위의 정의와 공정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오로지 행동하는 정의만이 용기를 먹고 자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에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했다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기쁨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땅, 그 차갑고 외로운 땅에 묻힌 독립투사들의 유해는 발굴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몇 차례 이어진 한·중정상회담에서 중국 내에 있는 항일유적지의 발굴과 보존에 합의했고, 중국정부의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나는 만주지역 항일유적지를 십여 년 동안 찾아다니며 현장의 실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으로 큰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 어느 곳, 아니 단 한 곳도 유적지 발굴이나 독립군의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기도 전에 국내에서 느닷없이 이념논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홍범도의 공산당 논쟁이었다. 소련공산당에 활동한 빨갱이를 영웅처럼 대우하면 안 된다는 자들과 언론까지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 공산당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천리 강토가 극악무도한 일본에 짓밟히고 있고, 내 가족과 겨레가 억압과 수탈 아래 신음하고 있을 때, 독립투사들은 공산당 아니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악마라도 손을 잡고 일본을 내쫓아 대한의 독립을 성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패전국 일본은 어땠는가. 자신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미국 맥아더와 손을 잡았고, 러시아의 스탈린과도 손을 잡아서 일본의 국토 분단을 끝내 막아내고 우리나라의 남북분단을 교활하게 획책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본에게는 공산당과 손 잡았다는 비난 어린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자들이,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인간들이 감히 독립된 나라, 번영된 나라에서 이념 갈등과 분열만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차가운 언덕에 묻혀 70여 년 동안 독립된 조국의 하늘만 바라보며 지내다 조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의 유해 앞에서 이런 추태를 부리는 것이 독립투사들이 바라고 원하던 조국의 모습이란 말인가. 인류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극악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독립투사들에게 편협한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자신들이 국가와 민족 앞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먼저 돌아보라.


통합과 연대를 향한 

김동삼의 용기


우리들의 뇌리에 까맣게 잊혀간 독립운동가가 있다. 일송(一松) 김동삼이다. 나는 그의 업적을 역사기록 나열하듯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 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지극한 용기,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통합과 연대의 정신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김동삼은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수천 리 길을 오가며 전만한족통일회를 결성하고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독립운동 단체의 분열과 대립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황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의 군대와 싸워 이길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동삼의 통합 노력은 1922년 봉천성 흥경현 마권자에서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대한통의부로 확대 개편한지 1년 만에 의군부, 참의부로 분열했다. 그는 담요 한 장 둘러메고 그들을 찾아다니며 재통합을 설득하였지만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또다시 분열했다. 김동삼은 3부가 분열과 대립을 멈추고 서로 연합하고 상부상조하는 일부터 추진하였다. 그러나 단체 간의 대립, 심지어 동지들이 서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김동삼은 결코 그들을 비난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만주 일대를 돌며 피를 토하듯 통합을 외쳤다. 김동삼의 지칠 줄 모르는 통합운동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번에 이룰 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반성과 비움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노선과 이념, 지도자들의 지역감정과 명예욕이 빚어낸 분열이었지만, 김동삼에게 좌절과 절망을 불러올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금 통합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신민부의 김좌진, 참의부의 김승학 등을 끊임없이 찾아가서 3부 통합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김동삼이 정의부 본부가 있는 유하현 삼원포에서 참의부 본부 환인현 이붕전자를 거쳐 해림시 산시진(山市鎭)으로 독립단체 지도자들을 만나러 다닐 때 위난(危難)과 고초의 순간들이 시시각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김동삼은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산속에서 잠을 자고 어둠이 내리면 길을 떠났고, 별빛으로 방향을 잡으며 바위와 숲을 헤치고 독립운동 단체의 동지들을 찾아갔다. 그 역시 인간이기에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후회하고 좌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 통합과 연대만이 자주독립의 길을 앞당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천 리 만주벌을 오갔던 것이다. 그는 곳곳에 번뜩이는 왜경의 위협과 감시, 살쾡이처럼 기어드는 밀정들의 눈초리도, 무자비한 중국 마적들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만주를 누비며 독립투쟁과 통합운동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나는 북간도 오상시 충하진에서 목단강까지 항일유적지를 찾아다니다가 길을 잃고 낯선 민가에 들었을 때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왜경의 끊임없는 감시, 밀정의 눈초리, 중국 마적떼가 득실거리는 험준한 만주지역을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다녀야 했던 김동삼의 담대한 용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동삼이 추진했던 삼부통합운동이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으로 결국 분열되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두 단체의 통합을 위해 다시 나섰다. 고려혁명당, 농민호조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오동진, 안창호 등과 독립진영의 통합을 위한 길림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후에도 민족통합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김동삼은 항일무장투쟁을 또다시 준비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이원일, 남자현 등 동지들을 만나러 갔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만주에서의 독립투쟁과 통합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일송 김동삼은 평양 법원에서 10년 형을 받고 마포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옥에 갇힌 독립운동가들의 대립과 이념적 갈등을 해소하려 노력했고, 앞으로 다가올 독립된 나라의 통합을 위해 매진하던 1937년 4월 13일,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옥중에서 눈을 감았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일송 김동삼이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희망이었다. 그는 1907년 협동학교 설립으로 민족운동에 나선 후 30여 년 동안 오직 민족의 독립에 평생을 바쳤다. 김동삼은 항일투쟁사에 통합의 화신으로 살다간 전사요, 독립운동가의 올곧은 기상을 표상하는 영원한 스승이었다.


모든 독립운동의 역사는 

현대사이다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대일독립전쟁에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의 올곧고 정의로운 삶, 지극한 용기의 보고(寶庫)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마저 느낀다. 아무리 위대한 역사라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잊혀가고, 오직 문서 안에 갇힌 채, 현대적 쓰임이 없다면 이미 죽은 역사다. 그것은 역사를 위한 역사일 뿐,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아니다. 화석처럼 기록된 역사를 문화재로 자랑이나 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오늘에 되살려 살아있는 역사로 만들 것인가. 모든 독립운동사는 현대사이다. 백두대간을 타고 흘러내리는 민족의 정기이며, 한반도 산하를 적시며 흐르는 도도한 강물이다,


대한민국의 오늘, 우리나라는 독립국인데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70여 년 전 백범 김구가 외쳤던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가 진정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냉철히 돌아보라고 하겠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종전도, 평화도, 통일도 그들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믿고 사는 패배적 열등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지도자로부터 시민들까지 세계 10위권의 선진국, 군사강국이라고 우쭐거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된 열등의식, 경제적 불안감, 안보적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자주독립의 정신이 그저 정치적 구호나 입에 발린 소리 정도로 머물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업적과 담대한 용기의 현재화 노력은 오늘도 유효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피와 땀과 용기로 기록한 역사를 올곧게 되살려내는 일, 그것은 우리의 오늘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길이며, 우리의 내일을 더욱 빛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오늘도 잊혀가고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 살아서 숨 쉬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지용(智勇)과 기상을 오롯이 대면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의 후대에는 ‘진정한 자주독립의 나라’로 우뚝 서서 세계 인류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소망한다.  


필자 최범산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및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등으로 있다. 최 작가는 우리들로부터 잊혀지고, 훼손되고, 버려진 북간도 지역 항일독립전쟁의 유적을 십여 년 동안 답사하며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새겨진 유적들을 찾아 기록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역사가 바로 서고, 진실하고 올바른 사람들의 세상을 위해 그는 간도지역 항일유적의 생생한 기록과 현장사진을 묶은 항일독립전쟁 유적답사기 『압록강 아리랑』 『두만강 아리랑』 두 권의 책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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