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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02] 단재 신채호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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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이방인 저격하는 

지조와 의기의 ‘붓총’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조계사 뒷마당쯤에 있었을 대한매일신보에서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수많은 논설을 쓰느라 밤늦게까지 초롱불을 끄지 못했을 신채호 선생이 수성공원 어딘가에서 아직도 붓을 들어 뭔가를 쓰고 계실 것 같다. 정신투쟁, 사상 투쟁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주장하는 중국을 향해서, 서릿발 같은 분노로 붓총을 쏘실 것 같다. 우리 역사에, 그런 의기 있는 단재가 있어서 눈물 나도록 참 자랑스럽다. 


종각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황성신문 터’ 표지석이 있다. 회색 화강석 위에 검은 오석에 황성 신문사에 대한 설명이 간단히 적혀있다. 먼지가 잔뜩 묻은 채로. 쌩쌩 달리는 차량, 도로 맞은편 대각선으로 보신각이 보인다. 보신각 앞에는 5월 나무들이 제법 연두와 초록을 더한다. 도심 속 소음과 매연, 높은 빌딩 앞, 도로변에 혼자 앉아 있는 표지석. 표지석 옆에는 1인용 판매 부스가 하나 있다. 100여 년 전의 나뭇잎 한 장이 현대 사회라는 거대한 움직임 속에 소리 없이 앉아 있는 느낌이다. 

오른쪽으로 길을 들어서니 을지로 입구로 통한다. 그곳에 단 몇십 분이라도 머무르며 ‘언론과 사회’에 대해 사유하고 싶었으나,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가 귀를 성가시게 한다. 발길을 돌려 인사동 쪽으로 걷는다. 


황성신문 논설위원 장지연

항일 논객 첫발 내디딘 신채호


1898년 남궁억 등이 창간한 국한문혼용체의 일간지였으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정간되었다. 황성신문이 정간되자, 논설위원으로 있던 선생은 1906년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민영환 등 뜻있는 지사들은 자결을 선택한다. 어떤 이들은 의병으로 나서서 일본을 향해 총을 쏜다. 여성 의병들(윤희순, 남자현 등)이 나타날 정도로 구국의 열기는 화산처럼 폭발했다.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고향인 청주 문동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신채호를 장지연이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끌어들였다. 이렇게 신채호는 26세에 언론인이 된다. 신채호 선생의 항일 논객의 첫발은 황성신문에서부터라고도 볼 수 있지만, 성균관 시절에 조소앙과 함께 <항일성토문>을 작성하여 이하영, 현영운 등의 매국 행위를 규탄하기도 했다.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신채호 ‘시일야우방성대곡’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가 있다는 수송공원을 찾아가 보았다. 연합신문 뒤뜰, 조계사 뒤(수송공원)에서 신문사 터 표지석을 찾을 수 있었다. 수송공원은 매우 작은 공원이지만, 공원이라 그런지 새 소리가 제법 들려온다. 옆 조계사에서 들려오는 스님들의 경 읽는 소리도 힘차게 들린다. 4월 초파일이 가까워져 오고 있어서 그런지 조계사 쪽에 걸려있는 연등도 보인다. 이곳에서도 신채호 선생은 주필로 계셨다(28세 때부터 망명 때까지 4년간).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지은 이유로 황성신문이 정간되었음에도, 신채호 선생은 ‘시일야우방성대곡’을 쓴다. 당찬 붓끝의 힘으로 일본에 항거하며 국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논설이었다. 언론을 통한 자강운동으로 민중에게 신념을 심어준다. 

공원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신채호 선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토 히로부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채호가 쓴 신문의 한 줄기 글이 조선인들을 더 격동시킨다.” 


당시에 의병들이 총으로 일본에 항거한 것도 강력하고 통쾌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 보았던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난다. 일본을 향해서 의병들이 총을 쏘면, 가슴이 뻥 뚫리는 강렬한 쾌재가 느껴지곤 했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붓을 들어 기록하는 나약한 캐릭터를 보면서 “힘없는 나약한 사람”이라고 분개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기록하고 남겨야 하오”라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언젠가 후손들에게 발견되길 기원하며 흙 속에 기록물을 묻는 장면을 보면서, “저 사람도 의병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언론이 기록하고 남겼기에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이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읽고, 그들을 기억해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시대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있었으며, 일본이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으며, 우리는 어떻게 항쟁했는지를 똑똑히 직시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실타래 같은 여러 가지 일들로 복잡한 사회 현실 상황. 지금도 큰 틀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수송공원에 새 소리, 독경 소리를 들으며 몇 년 전에 동북공정으로 공분(公憤)을 샀던 중국의 동북공정프로젝트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신채호 선생은 성균관 박사로서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치며 편안히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일하셨을까? 어째서 언론인으로 수많은 논설을 발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그들과 함께 중국 망명의 길을 떠나셨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새 소리가 여전히 곱다. 신채호가 주필로 계셨던 곳에서 그의 응답을 들어보려 애써 본다.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항거 

“역사만이 희망이다” 


동북공정은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해오던 중국 정부 차원의 조직적 프로젝트이다. 동북 지역 특히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중국의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중국 변방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라는 주장이다. 중국이 영토가 넓은 까닭에, 고구려 지역을 위임통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2001년 북한은 평양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했다. 2001년 남한은 재중동포(조선족)에게 국적을 주려 했다. 고구려의 유적이 유네스코에 등재되고, 조선족이 한국인의 국적을 갖게 되면,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로 인해서 중국 땅은 한국이 된다는 염려에서였을까? 국가의 존립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기에 중국 땅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1909년 9월 ‘간도협약’을 통해 간도를 중국에 내주었다. 통일 후에 국제법상, 한국이 간도협약의 무효를 주장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골자다. 만주에서 펼쳐졌던 고조선, 부여,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이다. 고조선을 세운 것은 단군 왕검이 아니라, 한족(漢族)인 기자(箕子)였고, 한사군(漢四郡)-낙랑, 현도, 임둔, 진번-이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므로 만주는 우리 민족과 무관하다는 억측이다. “중국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자국의 역사”라는 자기중심적인 역사 왜곡이다. 만주에서 선열들이 펼친 독립운동도 조선인들이 중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는 논리인가? 이 상황을 신채호 선생은 무엇이라 하실까?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쓴 「조선사」에서도 역사 왜곡은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때 쓴 그 책에 의하면, 삼국 시대 신라에 합병되었던 가야국은 일본의 직할시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를 통해서 일찍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야를 통해서 일본을 사대의 예로 섬겼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예를 들었다. 모화사상으로 중국을 사대(事大)의 예로 섬겨왔던 것을 강조했다. 고래(古來)로 조선은 타율적인 민족이므로, 주체적인 민족의식이 없이 의존적인 못난 민족이라는 식민사관을 심어주려는 시도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젊은이들에게 이 책이 읽혔으며, 이것에 강하게 분개한 분이 신채호 선생이었다. 어쩌면 임나 일본-가야-에 대한 식민사관의 반발과 항거의 의기로 신채호 선생은 「독사신론」을 짓고 역사에 집착하며 “역사만이 희망이다”라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닌지? 퍼즐 조각을 맞추듯 나름대로 신채호 선생이 왜 역사 연구에 전념했는지에 답이라도 얻은 듯이 기쁜 마음이 든다. 

 

뤼순 감옥 차디찬 독방에서

역사 저술에 매달렸던 지조


수송공원의 새 소리가 여전히 맑다. 서울 중심에서 이런 청아한 새 소리를 듣는 것이 신기하다고 여기며, 신채호 선생이 신민회 동료들과 중국 망명 후에 스스로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얻은 해답을 상상해 본다. 


만주에 퍼져 있는 고구려 왕릉, 광개토대왕비와 대왕릉, 백두산 답사를 통해서 일찍이 고구려 왕릉들이 벌판에 웅비했던 사실을 확인한다. 선생은 본인이 발로 직접 발해, 부여, 고구려 현장 답사를 한 뒤, 이 사실을 많은 문헌 독서를 통해서 고증해내곤 했다. 1922년경, 이석중의 소개로 베이징 대학 도서관에 있는 중국의 방대한 문헌인 <사고신서>를 섭렵한 것도 단재의 역사 고증에 일조를 했다. 결국 1922년 ‘관음사’에 머물면서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한다.

1928년 국제 위체 사기 문제로 대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뤼순 형무소에 복역하는 동안, 1929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조선사 연구초』가 서울에서 동지들에 의해 출간된다. 옥중에서도 1931년(52세),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한다. 이어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 발표한다. 1936년에 사망하기까지 옥중에서도 그는 집필하여 신문에 연재를 멈추지 않는다. 모두 고대사에 관한 연구였다.    


 그가 고대사에 집착했던 것은, 1910년(31세)에 중국에 망명하여 20년이 넘도록 만주에서 지내면서 직접 목격한 만주에 남아있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의 발자취-유적과 유물을 답사한 뒤 강렬한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중국 모화사상에 의해 쓰인 사대주의 사학이라고 비난하게 된다. 임나 일본 식민사관이나 다른 게 없다는 결론이었다. 


옥중에서 병이 악화되자, 보증인만 있으면 병보석으로 내보내주겠다는 일제의 제안이 있었으나 단재 선생은 거절한다. 친일을 하여 부유하게 된 일본 앞잡이가 보증인이 되어 그에게 의탁하는 게 싫었던 것이다. 영하 20도가 넘는 뤼순 감옥의 차디찬 독방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 역사 저술에 매달렸던 그의 지조와 의기가 우리에게 역사서로 남아있다. 이 책들이야말로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대항하여 내놓을 수 있는 방패이며 화살이 될 것을 내다보셨을까? 


너른 만주벌판은 우리 민족의 옛 고토였으며, 우리 땅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망명 독립운동가들에게 정당성과 자신감-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도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세우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단재 선생의 고대사 연구는 매우 의미 있는 역저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의병들이 쏜 총알에 일본 병사가 쓰러지는 것을 보며, 후련한 통쾌감이 일었던 것처럼 신채호 선생의 붓총은 동북공정을 부르짖는 중국인에게 대포와 화약 폭탄이 될 것이기에 통쾌한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하셨던 단재 선생. 100년 200년 후에도 당신이 쏘는 붓총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이방인들에게 정확히 명중될 것이다.

5월인데도 바람이 제법 싸늘하다. 두 개나 껴입은 웃옷을 여미며 단재 선생을 생각한다. 수송공원 한옆에 ‘숙명여학교 옛터’ 표지석도 눈에 뜨인다. 숙명여고보에서 공부한 박자혜 선생과 바로 옆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로서 일제에 항거하는 붓총을 쏘신 단재 선생은 그때부터 인연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우주의 어느 한 입자도 우연히 스쳐 지나는 것은 없다고 한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그때부터 마련되었는지도 모른다. 1910년에 단재 선생이 망명했으니, 두 분이 그 땅을 함께 밟지는 않았지만, 단재 선생이 밟았던 땅의 기운이 1914년에 박자혜가 숙명학교를 졸업하니, 같은 땅의 기운을 받은 두 사람은 북경에서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인지? 그러나 개인적인 정보다는 단재 선생의 시선은 늘 역사, 독립운동, 구국운동, 아나키스트 운동을 향해 있었다. 붓총을 향해 있었다.   


수송공원 새소리 속에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독경 소리를 따라 조계사 마당에 들어서 본다. 연등이 가득한 절 마당이다. 연등마다 사람 소원을 매달아 놓고 뭔가를 기원한다. 저 연등 속에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기원하는 연등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다. “소원성취”, “사업번창”, “취업” 등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발원문을 하나씩 달고 있다. 개인적이고 기복적인 발원이다. 


신채호 선생은 자신 개인의 유익을 구한 적이 있었던가? 1919년에 박자혜 선생과 결혼 후 아들을 얻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조선 땅으로 가족을 돌려보내면서 키우기 힘들면 고아원에 보내라고까지 뼈아픈 말을 던진 분이시다. 일신의 사사로운 유익이나 정(情)보다는 대의(大義)를 먼저 생각하고, 열악한 실정 속에서도 민족의 뿌리를 찾고자 역사 연구에만 몰두한 분이다.  


만주 땅, 선현들의 발자취 

기술하려는 단재의 몸부림


조선상고사의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민족주의 사학의 거대한 족적일 것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대동야승」에서 “단군시대는 아득한 태고 시대라 증명할 수 없고, 기자가 봉해지고 나서야 겨우 문자가 통했다”고 일축하여 삼국시대 이전은 논하려 하지 않았다. 율곡의 「기자실기」에서도 “기자께서 조선에 이르시되 우리 백성을 천한 오랑캐로 여기지 않고, 후하게 길러주시고 부지런히 가르쳐주셨다. 우리나라는 기자에게 한없는 은혜를 받았으니, 단군의 출현은 문헌상 상고할 수 없다”고 했다. 정약용 선생이 「아방강약고」에서 “크지도 작지도 않아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고 했다. 실학자들은 압록강 이북의 땅은 오랑캐의 땅으로 보고, 압록강 이남의 땅을 우리 땅으로 보는 소중화 사상에 머물렀다. 

이렇게 오랜 역사관을 뒤집은 게 단재 선생이다. 단군 시대를 재조명하고, 동부여, 북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 인식을 통해서 사대주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민족사관을 세웠다고 하겠다. 잃어버린 만주 땅, 장구한 역사의 용광로, 선현들의 발자취를 기술하려는 단재의 몸부림을 생각한다. 오늘날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내세우는 중국의 중화사상에 맞설 수 있는 집초. 21세기에도 왜 단재인가? 신채호 선생의 붓끝의 힘. 


초파일이 가까워간다. 며칠 후에 절 마당에 다시 한번 가보리라. 신채호 선생처럼 “대의나 민족의 영원한 자주독립”을 발원하는 연등이 하나라도 걸려있는지 찾아보고 싶다. 오색 등이 찬란하게 걸려있는 절 마당은 화려한 연등축제로 멋질 것이다. 

조계사 뒷마당쯤에 있었을 대한매일신보에서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수많은 논설을 쓰느라 밤늦게까지 초롱불을 끄지 못했을 신채호 선생이 수성공원 어딘가에서 아직도 붓을 들어 뭔가를 쓰고 계실 것 같다. 정신투쟁, 사상 투쟁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주장하는 중국을 향해서, 서릿발 같은 분노로 붓총을 쏘실 것 같다. 우리 역사에, 그런 의기 있는 단재가 있어서 눈물 나도록 참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절 마당을 가로질러 안국역을 향해 걷는다.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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