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03] 최초의 여성 유학생, 이화학당 김란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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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용기와 열정으로
캄캄한 조국에 등불을 켜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독특한 이름, 독특한 선택, 독특한 행동. 그러나 21세기 오늘날 그녀를 생각해도 그녀의 선택은 모두 옳았다. 가장 독특한 것은, 파이프 오르간을 정동교회에 기증한 일이다. 한국에 귀국하여 이화학당에 총교사(교감)을 지내며 전도와 봉사로 여성을 위한 교육에 헌신한 것은 물론이다.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뿐 아니라 이화학당의 독립운동가들을 수없이 배출하고, 자신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되었음에도 동상 하나, 동판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오늘도 정동교회에 남아서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처럼 그녀의 열정과 독립정신이 영원히 온 세상에 퍼져나가길 바라본다.
봄 햇볕이 따갑다. 정동길에 들어서니 돌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동길은 걷고 싶은 아름다운 길 10위 안에 들어가는 길이다. 길이 예쁘다. 하염없이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 근대사의 역사가 고스란히 곳곳에 남아 있다. 길 전체가 박물관이다.
창덕여중에서 이화여고로 걸어가다 보니, 기와를 얹은 나무문이 보인다. 커피집인지 커피라는 말이 쓰여있다. 의자에 앉으니,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는 창 가득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심슨 기념관’이라고 쓰여있다. 커피를 놓은 테이블에 수선화를 심은 화분이 곱다. 꽃심이 샛노랗다. 꽃심 주변에 미색 꽃잎이 곱다. ‘신비와 고결’을 꽃말로 가지고 있다. 수선화 뒤로 유리 가득 심슨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을 것 같다. 그 기념관에서 열린다는 특별전시. 뭔가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이화박물관(심슨 기념관)에 들어섰다. 이화학당 출신의 32명(이살롬 학생까지 합하여 33명)의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서훈자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낯선 이름들을 마음에 담느라 여념이 없던 3월 한 날. 초등학교 때부터 귀에 익히 들어왔던 유관순 열사만 알고 있던 내게 생소한 그들의 이름. 이화학당에 32명이 있었다. 전시실에 전시된 사진 전시물을 둘러보는 내내 고운 꽃들-아직 활짝 피지 못한-봉오리들을 보면서 마음이 턱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에 찻집 테이블에 놓여있던 봄꽃-수선화의 청초함으로 피어날 것 같은 꽃들이 사진 속에서 곱다.

“꺼진 등에 불을 켜고 싶다”
이화학당 최초 기혼여성
고운 꽃잎을 보면서 이화학당에 기혼여성 특별입학생이었던 김란사 선생이 떠오른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프라이(L.E.Frey) 교장은 김란사의 입학을 번번이 거절하곤 했다. 기숙사가 꽉 차 있다는 것도 이유였고, 나이 많은 기혼여성을 입학시키는 부담도 있었을 것 같다(입학 당시 24세). 그러나 여러 차례 입학 거절을 당했던 김란사는 하인과 함께 프라이 교장을 찾아간다.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훅 끄면서, 자신의 앞날이 이렇게 어두우며 조선의 현실이 이렇게 어두우니, 꺼진 등에 불을 켜게 해주는 게 어떠냐고 했단다. 어머니가 교육을 받아야 자식을 잘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했다. “꺼진 등에 불을 켜고 싶다”라는 그의 의지가 받아들여져서 이화학당의 학생이 된 김란사였다.
청일전쟁 후 소국 일본이 대국 중국과 전쟁에서 승리함을 듣고, 일본 국민의 자각과 교육의 발달에 있음을 듣고 근심하고 있었다. 남편 하상기가 이화학당에 입학 시켰다(1894년)가 일본 게이오기주쿠에 1년여를 유학했다. 서재필 박사가 정동 예배당에서 미국인 남녀의 활동하는 상태를 연설함을 듣고 감동을 하여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하상기 씨와 도미하여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에서 공부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구한말 여성들이다. 이미 결혼했으니, 기혼여성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도 충분했을 것이다. 가정에 안주하여 하인들의 수발을 받으며 편하게 살아도 좋았을 텐데, 김란사는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 청일전쟁을 묵도하면서 조선의 시국을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인식 지평은 안주를 거부했다. 그녀는 안일한 삶에 만족하지 못했나 보다. 아무도 깨우쳐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독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독특한 길을 선택한 여성이다.
“빛과 소금이 되라”
성경의 가르침 가슴에 새겨

지난 3월 중순, 심슨 기념관을 방문해서 간단한 설명과 여러 독립운동가 사진을 보았다. 거의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들이다. 몇몇 독립 영웅들의 이름에 가려진 이들. 애띤 얼굴의 배꽃들이 사진 속에 들어있다. 그 사진 중에 성숙한 표정과 눈매를 지닌 김란사 선생. 김란사는 사실 미국에서 10여 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총교사(교감)라고 했다. 기숙사에서 학생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문회(以文會)라는 학생 자치단체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유관순 열사도 이문회 회원이었고, 김란사 선생에게 배웠다. 조국의 앞날을 위해서 이화학당의 배꽃들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배웠다. 교육의 힘은 강하다. 이문회 회원들은 3.1운동 때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유관순 열사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매일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한 것도 이화학당에서 배운 신식교육의 힘이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관순 열사를 길러낸 이화학당의 스승 중 김란사가 중추적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일본과 미국 유학을 통해서 신문화와 세계정세에 대한 안목과 세계관이 확고해진 김란사 선생. 선생이 이문회 회원인 유관순 열사에게 어떤 정신을 심어주었을지는 짐작이 되지 않는가?
“세계는 변하고 있으며, 세계 속에 대한제국의 존망이 위태로운 점,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죽이고 있어서만은 아니 된다는 점” 등을 강조했을 것이다. 김란사 선생은 이화학당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서 직접 전도도 하고 애국계몽을 했다고 한다. 그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유관순 열사뿐 아니라 이화학당의 많은 학생은 학당의 담을 넘어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몇 명은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학교 담을 넘어서라도 항일운동에 뛰어든 까만 치마, 하얀 저고리의 댕기 머리 여학생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생각난다.
남편 사진 가슴에 달고
10년간 미국 유학길 올라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란사. 정동교회에서 서재필 박사의 강연에 매료되어 미국유학길에 올랐고 10여 년 동안 공부에 몰입했다. 자신의 소생인 한 살 된 딸을 조선에 남겨둔 채 학업의 길을 선택한 김란사. 학업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다. 무엇이 그녀를 미국에서 10년 동안 공부에 정진하게 했을까? 가족과 갓난아기와 떨어져서까지……. 그녀는 신념의 여인이었고, 배움에 목마른 선각자였다. 배워서 신지식인으로 우뚝 서는 것이 조국의 현실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보기 드문 정신력이다.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문학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을 묵묵히 지원해 준 하상기 씨도 김란사 만큼 위대한 사람이다. 풍랑 앞에 꺼져가는 조선을 구하는 길은 “배우는 일”이라고 믿었던 김란사.

독특한 여성 김란사. 아니 하란사. 그녀는 미국에 유학을 갈 때, 미국입국 카드에 남편의 성씨를 따서 하란사라고 기재했었다. 해서 그녀는 오랫동안 하란사로 살았다. 미국식 표현이다. 그녀가 자신의 성씨를 찾은 것은 하란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최근의 일이다. 란사(蘭史)라는 이름도 세례명 낸시(Nancy)에서 유래했다. 독특한 이름, 독특한 선택, 독특한 행동. 그러나 21세기 오늘날 그녀를 생각해도 그녀의 선택은 모두 옳았다. 가장 독특한 것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일-파이프 오르간을 정동 교회에 기증한 일이다. 그녀가 한국에 귀국하여 이화학당에 총교사(교감)을 지내며 전도와 봉사로 여성을 위한 교육에 헌신한 것은 물론이다.
정동교회에 파이프 오르간 기증
독립신문·독립선언서 인쇄
1913년, 세계감리교 총회에 여성 최초로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학업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나, 그녀는 시카고대학 신학 전문과에서 공부를 다시 하게 된다. 이때 김란사는 미국교회에서 예배 볼 때 연주된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감동했다. 경건함과 성스러움을 배가시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매료되어, 이 오르간을 조국의 정동교회에 기증하고자 하는 맘을 굳히게 된다. 미국 동부, 서부를 순회하면서 동포들에게 호소하여 모금한다. 재미 한인 동포에게 연조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는 글이 신한민보 1916년 12월 7일 자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신한민보 1917년 9월 20일 신문에는 ‘올겐을 사노코’라는 글도 실렸다. 오르간은 구매해 놓았으나, 한국으로 보낼 운송료가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도 협조 편지를 보내어 오르간을 한국에 보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렇게 해서 1918년에 정동제일교회당(그 당시 명칭: 경성 미이미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6·25 때 예배당과 함께 반파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오르간이 오늘도 정동교회에 현존한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면, 신자들은 더욱 신성하고 경건한 예배 분위기를 느낀다. 단순히 예배 분위기의 고양을 위해서 김란사는 파이프 오르간을 한국 교회에 보내려 몇 년 동안 정성을 다했을까? 단순히 신앙심의 표현이며, 자신이 다니던 한국 교회(경성 미이미교회)에 대한 헌심일까? 아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미국 땅에서도 한국동포들은 일제 치하에 있는 한국의 동포들에게 독립 염원과 기도를 보내고 있다는 합심의 표현인 것이다. 조국 광복을 기도하는 마음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기독교를 신앙하지 않는 이들은 신앙인들의 애틋한 마음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 앞에서는 신앙을 넘어서 누구나 무릎을 꿇어야 한다. 김란사가 보낸 파이프 오르간의 송풍구다. 파이프 오르간은 말 그대로 쇠로 된 파이프 관을 여러 개 오르간에 연결하여 오묘한 소리를 낸다.
송풍을 잘 해주지 않으면, 악기가 어떻게 될까? 부식의 위험이 있다. 해서 파이프 오르간에는 송풍구가 있다. 청년 한두명이 들어갈 수 있는 송풍실이 있다. 정동교회 근처에 위치한 배재학당 청년들이 그 송풍실에 숨어서 독립신문과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철필(가리방) 긁는 소리를 오르간 소리가 덮어주었고, 일본 순사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이 일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김란사는 탁월한 선택을 할 줄 아는 영특한 수재였으므로. 여기게 신의 은총-김란사를 통한 독립운동의 한 페이지 역사가 펼쳐졌다. 이 사실은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김란사는 1919년 3월 10일 북경에서 갑자기 사망한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던 길이다. 파리까지 가는 여정에 북경에 유하던 중, 교포들이 베푼 저녁 만찬 후 갑자기 사망한다. 일본 외무성 문서에 기록된 사인(死因)은 유행성 독감(폐렴)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전보를 받고 달려온 남편 하상기의 증언으로는 시신이 검게 변해있는 것으로 보아, 독살되었을 수도 있다는 설(說)도 있다. 당시 일본의 스파이였던 배정자가 보낸 사람이 만찬 자리에 있었다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파리강화회의 참석차 들른
북경에서 갑작스런 의문사
1907년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때 파견되었던 이상설, 이준, 이위종 중에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세계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조차 저지당한 것에 대한 분노로 분사했다는 설도 있고, 오랜 여행 끝에 병을 얻어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준 열사도 헤이그에서 중도에 사망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려던 특사, 3인의 의지는 그렇게 좌절되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억울함을 호소하려던 김란사도 중도에서 병사든 독살이든 사망했다. 미국에서 10년이 넘게 공부하였기에 영어에 능통하고,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역사관과 사명감이 투철했던 김란사도 갑자기 사망했다. 이준 열사의 동상은 서울대 법대 앞, 서울 장충단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준열사기념사업회에서 이준 열사를 선양하고 있다.
그러나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뿐 아니라 이화학당의 독립운동가들을 수없이 배출하고, 자신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되었음에도 동상 하나, 동판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김란사는 근대사에 화인(火印)으로 남아야 한다.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는 것만이 독립운동의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의열투쟁을 하지 않았어도, 인재를 길러내고 본인도 독립운동에 등불을 켰던 인물. 꺼진 등에 불을 켰던 인물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와 같은 남성 위주로 기록된 독립 영웅사에 김란사 선생도 여성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부각 되고 기려져야 한다. 그의 친딸 자옥(자욱)은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일찍 죽었다. 전처소생들도 일찍 죽었다. 국가보훈처에서 그녀에게 내린 서훈(건국훈장 애족장)은 그의 외손이 국가보훈처에서 찾아갔다고 한다. 서훈의 등급이 중요한 게 아니겠지만, 이준 열사보다 낮은 등급이다.
독립 위해 희생되었음에도
동상 하나, 동판 하나 없어
수선화꽃이 곱게 피어있는 3월이다. 3월에 세상을 떠난 김란사 선생이 심슨 기념관(이화기념관)에서만 기려지질 않길 바란다. 이화인들에게만 기려지지 않길 바란다. 수선화 향기처럼 은은하게 세상에 널리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오늘도 정동교회에 남아서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은은하게 온 세상에 퍼져나가리라. 김란사 선생은 생물학적으로는 사망했으나, 사망하지 않았다. 그 열정과 독립정신만은 영원하리라. 유관순 열사를 길러낸 김란사 선생.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