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초대석

[2020/10] 국립 인천대학교 최용규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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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독립유공자 발굴해 2,060명 포상 신청 

통일시대 앞장서는 민족대학으로 키울 것


글| 편집부


경기상고 졸업, 한국은행 입사, 고려대 법학과 입학, 사법고시 합격. 청춘의 깊은 고뇌가 인생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인권변호사, 초대 인천시의회 의원, 민선 1기 부평구청장, 16대·17대 국회의원을 거치며 사회정의 실현에 앞장섰다. 쭉 뻗은 성공가도,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았다. 18대 국회의원 불출마를 선언하고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무국적 고려인의 국적회복과 정착을 돕기 위해서였다. 12년간 함께 농사지으며 후회 없이 땀 흘렸다. 그리고 더 큰 꿈을 씨줄날줄로 엮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2월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4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최용규 전 국회의원을 송도캠퍼스에서 만났다.  


 청명한 가을햇살이 내려앉은 교정이 국제도시의 스마트한 풍경과 어우러져 빛났다. 푸른 나무와 알록달록 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본관으로 향했다. 이사장실은 본관 5층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었다. 보통 복도 안쪽 명당자리에 있지 않나, 살짝 의아했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반갑게 맞았다. 최용규 이사장이었다. 의전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비서가 없는 대학 이사장이라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그는 미리 내려놓은 향 좋은 커피를 따랐다. 

사무실을 찬찬히 둘러보니 애써 꾸민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은 아담했고 책상과 소품들은 소박했다. 평소 겉치레를 싫어하는 그의 성정을 닮은 듯해서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무엇보다 선함과 뚝심이 공존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무국적 고려인 돕기 위해 금배지를 내려놓다


“이 학생이 일리야 군입니다. 최재형 선생 4대손이에요.”

최 이사장은 옆에 있는 청년을 소개했다. 이국적 외모에 순박한 미소가 매력적인 청년은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현재 인천대 글로벌어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일리야 최, 독립유공자 발굴 사업을 하고 있는 인천대가 최재형 선생을 연구하던 중 러시아에 살고 있는 선생의 후손을 찾게 되면서 인연이 닿았다.  


최 이사장은 독립운동가 후손을 품는 일을 “당연하다” 말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해외 동포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어왔고, 힘닿는 데까지 손을 뻗어왔다. 


“국회 8년 하면서 4년 동안 한 우크라이나의원친선협회 회장, 우크라이나협회 회장을 맡았어요. 국적 없는 동포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죠. 우크라이나 대사관 건립 예산, 국유화 예산을 다 만들어줬어요. 그런데 진척이 안 되더라고요. 문득 의미 없는 정치를 그만하고 의미 있는 동포들과 같이 생활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 가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2007년 제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이듬해 3월 우크라이나로 출국했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토지에 무국적 고려인들의 농장을 세워 생활안정을 돕고 침체된 우크라이나의 농업경제를 살리겠다는,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속에 작은 한국을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를 안고. 


탄탄대로를 달리던 정치인이 달콤한 권력을 내려놓기가 어디 쉬운가. 그럼에도 그는 미련 없이 빈손으로 떠났다. 낯선 이국땅의 마을 촌장이 되어 농사짓고 돼지와 닭을 키우며 매일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12년을 보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이자 당연한 의무였다. 


 “예전에 사할린 동포 영구 귀국사업을 오래 했는데, 러시아 사할린의 고급 관리, 의사, 교수 등 고급 인력을 데려다가 영구 아파트 빌려주고 생활비 주고 아무 일도 못하게 했어요. 가족들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죠. 우리나라 동포정책의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연길이나 러시아 지역에 가보면 젊은 동포들이 없어요. 전부 우리나라로 건너가 3D 직종에 종사하고 있거든요. 커뮤니티가 무너지고 동포사회는 더 피폐해졌어요. 그보다는 우리 동포들을 교육시켜 해당 국가에서 주류 사회에 진입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동포정책에 대한 그의 신념과 원칙은 확고했다.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진정한 자립이며 자활임을 그는 오랜 고민과 경험을 통해 배웠다. 



친일문제 해결은 나라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일


그는 청년시절부터 유독 정의감이 넘쳤다. 1990년 한보그룹의 수서사건은 사회정의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주었고, 그로 인해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91년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인천시의원에 당선되었고, 1994년 북구청 세도사건을 보며 지역구의 비참함을 바로잡고자 민주당에 입당해 전국 최연소 구청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국회의원 시절엔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을 대표발의 하여 법률을 통과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2007년 국회의원 불출마 선언 후에는 우크라이나에 정착해 고려인 집단농장 설립을 주도했다. 이해와 실리를 따지지 않고 사회정의를 위해 직진해온 삶의 이력 탓일까. 약자를 향한 그의 언어는 한없이 따뜻했고, 위선자를 향한 언어는 강직하고 거침없었다.  


“작년 11월에 일리야를 데리고 순국선열의 날 행사에 참석했어요. 그날 저는 끝없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분노가 치밀었어요. 조선시대 명나라·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 자리에 독립관을 허겁지겁 지어야 했는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유족회를 지하에 모셔야 했는지…. 그때 제 눈에 야스쿠니 신사가 떠올랐어요. 전범국인 일본은 도쿄 한가운데 3만 평 부지에 전범과 희생자를 모셔놓고 정신의 중심이라면서 극진한 대우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중심은 무엇이죠? 우리는 중심이 없는 거예요. 친일문제만큼은 늦었더라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해요. 안 그러면 이 나라의 정통성이 영원히 무너질 수 있어요. 우리 순국선열들이 일본 전범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일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그는 순국선열 추모관 설립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에 품위 있게 지어 순국선열 유족들이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2년 안에 결론 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고려인, 조선족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진국에 사는 이들은 재일동포, 재미동포라 하면서 나라를 빼앗겼을 때 목숨 걸고 지킨 분들을 왜 그렇게 부르는지 반문했다. 


“실제 대한민국의 주인은 나라를 지킨 분들 아닌가요. 그런데 단재 선생 자손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특별귀화라면서 한국 국적을 줬어요. 누가 누구를 귀화시켜요? 친일파 자손들이 독립운동가 자손들 앞에서 주인인양 행세하는 겁니다. 지금도 똑같아요. 해외 동포들을 3D 업종에 일하게 해준 걸 대단한 혜택 준 걸로 착각하거든요. 그러면서 조선족, 고려인이라 손가락질하고 무시해요. 역사가 바로서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최 이사장의 정당한 분노가 가슴을 울렸다. 그의 말처럼, 주객이 전도된 역사는 분명 바로잡아야 한다. 나라를 지킨 자들은 대우받아야 마땅하고, 일제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챙긴 자들은 단죄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순리다. 


합작대학 모델로 정부의 북방·남방 정책에 부응 


그는 지난해 2월 1일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4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동안 공직에서 완전히 떠나 있던 그가 교육 행정가로 돌아왔을 때 다들 의아해했다. 정계에 진출하려는 계획 아니냐는 소문도 나돌았다. 하지만 정계은퇴 이후 마음이 흔들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엔 거절했던 이사장 자리를 끝내 수락한 이유는, 국립대 막내인 인천대가 여러 단체와 교섭·연대하며 제대로 된 걸음마를 뗄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무국적 고려인을 돕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홀연히 떠났던 그때처럼, 50여 년간 뿌리 내리고 살아온 인천의 발전을 돕기 위해 그는 돌아왔다.   


최 이사장은 취임 후 인천대학교가 나아갈 방향과 가치관을 정하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덕분에 민족대학, 통일대학, 글로벌 대학이라는 세 가지 비전이 세워졌다.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행적을 발굴해 포상을 신청한 것이 벌써 2년째 접어들었어요.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포상신청을 한 분이 2,060명입니다. 그중 100명 가까이가 서훈이 됐어요. 사실 이러한 작업은 보훈처가 해야 하는데, 일 년에 300명에서 500명 정도밖에 못해요. 미발굴 독립유공자가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속도로 가면 다 발굴하는 데 500년이 걸려요. 인천대가 이 일에 앞장서는 까닭은, 학교든 정부든 함께 힘을 모아 하루라도 빨리 국가의 정통성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이렇게 많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포상신청을 한 것은 광복 이후 처음이란다. 인천대의 노력이 마중물 되어 전국으로 퍼져간다면 독립유공자 발굴이 백 년 이백 년 당겨지리라. 최 이사장은 이러한 역사적 대의를 통해 인천대가 예전의 선인학원, 시립대학의 개념에서 벗어나 민족대학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일리야 고조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연해주 지역은 1937년 강제이주 된 후 뿔뿔이 흩어져 소수만 살고 있어요. 그곳에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동포들을 규합해 고려인 자치주를 조성할 생각이에요. 러시아 극동 연방대학과 인천대, 북한의 대학까지 합작해 농업을 중심으로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인천대를 통일시대를 앞당기는 통일대학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북한의 시급한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 공존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통일의 1순위라 생각해요.”


통일대학에 대한 비전은 글로벌 이슈로 확대되고 있다. 내년 9월이면 연변대학교와 중국 훈춘에 합작대학이 설립될 전망이다. 이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도 합작대학 모델을 확장해 현지에서 2년, 인천대에서 2년을 공부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정부의 북방·남방 정책에 앞장서서 해당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도움을 줄 계획이다. 

“정치적 포부는 없어요. 12년 동안 해외 농업을 하면서 국가나 공권력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왔어요. 통일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농업을 통한 남북한의 실질적 협력을 통해 나름의 해법을 찾을 겁니다. 거창하게 사회적 명제를 짊어질 생각은 없어요. 평소 갖고 있던 소신대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해나갈 생각이에요.” 


늘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당당히 뜻을 이룰 것이다. 사시 합격, 인권변호사, 초대 인천시의회 의원, 민선 1기 부평구청장, 16대·17대 국회의원, 국립 인천대 이사장…. 사회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달려온 삶의 발자취들이 그가 걸어갈 미래의 거울이리라.  

가을햇살이 따사로이 머물러 있는 교정을 되돌아 나오며 문득 이육사 시인의 ‘광야’가 떠올랐다. 역사를 잊지 않는 그가 이 시대의 초인(超人)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최용규 이사장 프로필


. 1982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 1985년 제27회 사법고시 합격 


. 1991년~1995년 초대 인천시의회 의원

. 1995년~1998년 민선 1기 부평구청장


. 2000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인천본부 고문변호사

. 2000년~2008년 제16·17대 국회의원

. 2019년 인천대학교 이사장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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