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 제11대 독립기념장 이준식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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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특별 초대석 | 만나고 싶었습니다
조국광복 안에 민주주의의 꿈 담겨
민족족통합·남북통일로 나아가야
독립운동은 늘 함께하는 공기 같은 존재
글| 편집부
어릴 적, 어머니는 종종 만주 벌판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해마다 어린 자식들 손을 잡고 현충원 무후선열 사당을 찾아 참배 드리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로 태어나 여성광복군 출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해온 소년은 훗날 역사연구자가 되어 ‘제2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근현대사기념관장을 거쳐 지난 2017년 12월 18일 제11대 독립기념관장으로 취임했다. 임기 3년차를 보내고 있는 이준식 관장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넓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일시 : 2020년 10월 6일(화)
▪ 장소 : 독립기념관장 집무실
▪ 대담 : 심재추 월간 <순국> 편집주간
나라 잃은 설움을 잊지 않았던 민초들은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에 맞서 싸웠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가 15만 명이 넘는다.
“3·1만세시위 참여자가 200만 명이었다고 해요. 당시 인구가 1600만 명이었으니, 한 집에서 한 명은 나선 겁니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 중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독립운동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며 곧 내 이야기죠. 독립운동은 늘 우리와 함께해온 공기 같은 존재예요. 공기가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듯이,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대한국민은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독립기념관장이라는 직함에 걸맞게 그의 첫인사는 독립운동으로 시작했다. 사실 그에게 독립운동은 공기처럼 늘 곁에 있는 존재였다.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관 등 무장투쟁 최고지도자로 26년간 활동한 지청천 장군이 외할아버지이며, 어머니 지복영 선생 역시 대를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군이자 여성광복군으로 맹위를 떨쳤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셨다. “군인으로서의 삶을 가장 보람 있게 생각했으며, 1920년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무장투쟁 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반면 정치인의 삶에는 후회도 많았단다.
“1956년 세상을 떠나실 때 후손들에게 정치하지 말라, 당신 이름을 내건 기념사업은 절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외할아버지께선 만주에서 순국한 동지들이 많은데 살아서 해방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기념사업의 대상이 되는 걸 꺼려하셨다고 합니다.”
유언에 따라 후손들이 나서지 않은 까닭이었을까. 정치인의 길에 굴곡이 많았던 탓이었을까. 지청천 장군이 무장투쟁의 최고지도자로 공로를 세운 것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는 현실이 그에겐 아픈 대목이다.
독립운동은 민주주의의 뿌리이며 평화통일의 토대

“제가 하고 있는 일련의 역사운동이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독립운동사 연구자로서 독립운동가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 그러니까 독립정신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 여겼죠.”
그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조국광복이 단순히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광복’이나 ‘독립’이란 말 속에는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국을 만들고, 그 민주공화국 안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꿈이 포함돼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1944년 마지막으로 개헌한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서문에는 대한민국의 정신을 ‘자유, 평등, 진보’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이 지향한 기본 가치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자유, 평등, 진보가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세상,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고 더 많은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후손들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의 이야기처럼, 독립운동은 민주주의의 뿌리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통일의 토대가 되는 운동이었다. 현재 남북관계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분단은 결코 독립운동가들이 꿈꾸던 세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좌도 우도 아닌 ‘민족’이라는 이념을 위해 싸웠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민족통합, 남북통일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건강한 역사의식 가진 ‘선한 다수’의 힘 믿어
이준식 관장은 2006년부터 4년간 친일조사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며 한 매체의 기고를 통해 ‘더 이상 국가 차원의 친일청산이란 말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친일청산은 시민사회나 역사학계의 몫으로 넘겼으면 좋겠다’고 썼다. 당시만 해도 역사의식 수준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친일행위를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엇나갔다. 친일파를 미화하는 논리들이 독버섯처럼 자라 젊은 세대들에게 파고들었다.
“친일청산을 안하는 바람에 친일파 자식은 물론, 옹호하는 자들이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친일을 정당화하는 비극적 상황이 벌어졌어요.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라는 황당한 얘기가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온라인상에서 넘쳐나고 있고, 광복절 날 광화문에 욱일승천기가 버젓이 등장했어요.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나치찬양금지법처럼 우리나라에도 친일찬양금지법이 필요하지 않나, 솔직히 요즘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식민 지배를 받거나 점령당한 역사를 가진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민족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만들어졌지만 6·25전쟁으로 원인무효 되었고, 공식적으로 단 한 명도 민족반역자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는 작금의 상황이 몹시 안타깝고 화가 나지만, 그럼에도 대한국민에 대한 무한신뢰가 있다. 건강한 역사의식을 가진 ‘선한 다수’의 힘을 믿는다.
“지난해 십년 만에 정부 주관 하에 독립기념관에서 광복절 경축행사를 했는데, 그날 비가 엄청 쏟아졌어요. 그런데 수많은 국민들이 독립기념관을 찾았어요. 장대비 속에서도 어린 자녀들 손을 잡고 길게 줄을 선 부모들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자체 바뀌어야

“당시엔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인 시대라 여성이 자기 이름을 내걸고 남성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는 게 힘들었어요. 남성이 단체를 만들고 단체장이 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면, 여성은 다른 방식으로 했어요. 대표적인 방식이 뒷바라지였죠.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이나 아들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도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들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그 역시 전장에 나간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농사와 삯바느질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외할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 일제강점기에 외할머니와 같은 분이 없었다면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목소리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독립운동가 아내에 대한 서훈이 늘고 있다. 반가운 소식이다.
2018년 8월 14일,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선생에게 독립을 위해 노력한 공적이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허은 선생의 구술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를 보면 밖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동료들과 함께 들어온 시할아버지의 식사를 차리는 모습이 나온다. 독립운동가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수발을 드는 것은 전적으로 부인, 딸, 며느리, 손자며느리의 몫이었다. 하지만 허은 선생처럼 기록을 남긴 여성 독립운동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독립운동과 관련해 활동했으나 이름을 남기지 못한 여성들을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국내에서 활동한 경우, 가장 중요한 포상기준이 옥고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옥고가 적어요. 또 기록에 남아있는 여성광복군 수가 열 명 남짓인데 실제로는 더 많은 여성들이 해외에서 무장투쟁에 뛰어들었어요. 광복군이나 조선의용군의 사진을 보면 군복 입은 여성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거든요. 하루아침에 해결되진 않겠지만, 앞으로 여성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뀌어 더 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가로 당당하게 인정받기 바랍니다.”
남북한 교류협력 사업으로 통일시대 준비
이준식 관장은 2017년 12월 18일 제11대 독립기념관장으로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의 원점으로서 독립운동사를 재정립함과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연장선으로서 민족통합과 남북통일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우선, 남북한 교류협력 사업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북한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사료를 확보해 더 많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공통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공동으로 사업을 벌이면서 남북 간 역사, 특히 근대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혀 나가는 일을 시도했다. 2018년 3월에는 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사업부에 독립운동가 자료발굴팀을 만들어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찾아내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에 힘을 보탰다.
아울러 학교 교육용 ‘독립군 체험학습자료’를 보급하고 AR·MR 에코뮤지엄 구축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는 등 코로나19로 인해 관람객이 격감하는 상황에서 비대면 방식으로의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지막으로 그는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국민의례 때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하면서 정작 젊은 세대들은 순국선열에 대해 잘 몰라요. 역사교육이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이며, 말로만 순국선열을 강조했지 실제로 국가 차원에서 예우하는 정책이 없었음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무명용사 묘와 비가 있어요. 그래서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를 국빈 방문하면 제일 먼저 이곳을 찾아 참배합니다.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에서 무명용사 묘와 비를 조속히 조성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론, 광화문 광장에 세웠으면 좋겠어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독립운동사 연구자로 제2의 독립운동을 펼쳐온 그가, 독립정신의 소중한 유산을 우리 사회와 더 넓고 깊게 나누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