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 윤주경 제21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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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호수에 작은 물길 하나 낼 수 있다면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세상 향해
한걸음 내딛다
글·사진 │ 편집부
‘윤봉길 의사의 손녀’로 태어났다. 귀가 열릴 무렵부터 어른들은 수시로 ‘윤 의사 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말했다. 부끄러움이 뭔지 몰라도 될 나이에 그는 부끄럽지 않으려 애썼다. 말 한마디 꺼내기가 늘 조심스러웠다. 한쪽에선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며 자랑스러워했고, 한쪽에선 할아버지 덕에 호의호식한다 했다. 세상에는 두 개의 눈이 있음을,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조숙했던 소녀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빛과 그림자 속을 오가며 성장했다. 첫 여성 독립기념관장에 이어 지난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할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향해 한걸음 더 내딛기 위해 정치인의 길을 택한 윤주경 의원을 지난 1월 1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났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온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2020년 5월 30일부터 국회의원 업무를 시작했으니 7개월 남짓 지났다. 힘든 고비를 견디고 어느 정도 균형을 잡은 듯 보였다. 사실 정계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예상치 못한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독립운동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유세기간 버스를 타고 경기도에 갔는데 몇 분이 찾아와 ‘독립운동가 자손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눈물을 흘리셨어요. 당시 많이 위축돼 있었던 터라 울컥하더라고요. 그때 영화 쉰들러리스트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어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온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너무 욕심 내지 말고, 모두에게 잘했다고 칭찬받길 바라지 말고, 단 몇 사람에게라도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한 것으로 만족하자고 마음을 다독였죠.” 정치인 윤주경은 그렇게 한걸음을 내디뎠다. 크고 화려한 업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해 나갔다. 6·10만세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독립운동에는 여야가 없다’ 얘기했는데 그 말을 결과물로 만들어낸 셈이다. “코로나로 힘든 시국이었지만, 백범 선생 기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저희 당 의원들에게 ‘헌화 하러 같이 가실 분?’ 하고 물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함께 백범기념관을 돌면서 백범 선생이 추구했던 정치이념은 바로 자유였다고 말할 수 있어서 보람 있었어요.” 지난해 11월에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잠함수당 인상을 요구하며 “잠수함 승조원이 튼튼한 국방을 위해서 잠수함에 탑승할 때 어떤 각오로 탑승하는지 아시나요. 저희 할아버지가 의거하기 전 자식을 생각하면서 했던 거와 똑같은 심정으로 승선한다”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비록 인사혁신처가 잠함수당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국방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지 대변해줄 수 있어 뿌듯했단다. “여야 의원은 물론, 국민들께서 제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잘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해주셔서 힘도 나고, 한편으론 어깨가 무거워요. 이러한 부담감과 책임감을 안 느끼면 실수할 수 있는데 소심함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세상사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다는 건 변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아요.” 귀가 열릴 무렵부터 들려왔던 ‘윤봉길 의사 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진갑(進甲)에 이른 그에게 여전히 유효한 숙제인 듯 보였다. 할아버지가 물려준 빛과 그림자는 지금도 계속해서 그를 담금질하고 있었다. 국군 뿌리는 광복군에 있어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 키워야 “독립운동이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끝난 게 아니에요. 지금도 국방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고, 그것이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일제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우리 국군을 이끌었다고 말하는데,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과 후손들이 군에 몸담으면서 창설되었어요. 국군의 뿌리는 바로 광복군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 군이 부끄러워야 하나요?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자긍심이 없는데 어떻게 국민단결을 만들어낼 수 있나요?” 그가 강하게 되물었다. 선하고 결연한 눈빛이 윤봉길 의사를 똑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의 말대로,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광복군은 국군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창군 멤버도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 김학규,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장군, 중국군 출신의 김홍일, 최용덕 전 공군총장과 만주군 출신의 백선엽, 정일권 등 다양한 군 경력자들이다. 1948년 창설된 우리 국군의 정신적 뿌리가 바로 광복군에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로 인해 널리 알려지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대한 자긍심이 더 많은 이들에게 각인되길 바라본다. 윤 의원은 독립운동사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2014년부터 3년간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느꼈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작은 발걸음이며, 국회의원직을 선택할 때의 목표이기도 하다. 어쩌면 왜곡된 친일사관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삶에서 비롯된 오랜 숙제일지 모른다. “친일인명사전은 있는데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이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요. 2015년 4월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편찬위원회를 출범시켜 1만 6,000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려 했어요. 학계에 축적된 연구 성과 위에 독립운동가의 성장 배경과 사상, 업적 등 전 생애를 담을 계획이었죠. 누가 봐도 멋진 일이었어요. 그런데 관장이 되어 실제 상황을 보니 참담했어요. 자료가 부족해 사전의 완성도가 미흡하더라고요. 1만 6,000명을 담당할 연구자가 전국에 백여 명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였죠. 스스로 부끄러웠고, 자료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데 안타까웠어요.” 독립운동사 관련 예산은 항상 뒷전이었고, 적은 예산으로 움직이다보니 연구 인력도 부족하고 결과물도 미흡한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치인이라는 역할이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있길 바라며, 그는 독립운동사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에 앞서 보훈처에 연구용역을 맡겼다. 전문가들의 폭넓은 의견을 통해 합리적인 방향을 잡기 위함이다. 결과가 나오면 그 내용을 토대로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이름도 찾지 못한 독립운동가 그 후손들 생각하면 늘 죄스러워 “아주머니는 그때 ‘너 말 한마디, 몸가짐 하나가 할아버지에게 자랑이 될 수도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다’며 따끔하게 말씀하셨어요. 내 말이 할아버지를 부끄럽게 했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할아버지와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죠.” 부끄러움이 뭔지 몰라도 될 나이에 그는 부끄럽지 않으려 애썼다. 말 한마디 꺼내기가 늘 조심스러웠다. 할머니와 아버지처럼, 그도 말수가 적어졌다. “흔히 윤봉길 의사 가족이라면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일제강점기는 물론 생전에 할머니(윤 의사 부인 고 배용순 여사·1907~1988)가 할아버지 기념행사에 참석하면 ‘사람을 죽인 사람인데 뭘 그리 대단한 행사를 하느냐’는 가슴 아픈 소리를 들었고, 예우는커녕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한 경우도 많았어요. 광복 전까지 아버지는 ‘조선에서 제일 나쁜 놈의 아들’이라는 교사들의 비난과 왕따를 홀로 감당해야 했고요. 적응을 못해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다 보니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죠.” 그 역시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6녀 1남 장녀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주변의 기대와 날선 시선이 두려워 숨고 싶을 때도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상업고등학교에 지원했다가 선생님께 혼난 적도 있었다. 선생님은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윤봉길 의사 손녀로서 꿈을 크게 가지고 살길 바라셨으리라. 돌아보면 할아버지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아야 했지만, ‘윤봉길 의사 손녀’라는 무거운 저울추 반대편에는 선의의 손길들이 매순간 그를 붙잡아주고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름조차 찾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을까. 그 생각을 하면 가슴 아프다. “그들이 받아야 마땅한 부분까지 내가 독차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항상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독립운동가 삶은 ‘미래’로 향해 있어 다음 세대 자랑스러워 할 나라 만들어야 그의 말처럼, 이름도 없이 조국독립에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학계에 따르면, 15만 명에 달한다. 이름을 남겼어도 나라에서 아무런 보상조차 받지 못하는 순국선열과 후손들 또한 대부분이다. 서훈을 받은 순국선열은 3,500여 명이고 그중 국가의 보훈혜택을 받는 분은 885명에 불과하다. “1960~70년대 우리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국가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보듬을 수 있을까, 살아있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많이 달라졌어요. 그때와 달리 우리나라가 그것을 부담할 만큼의 경제적 능력이 있잖아요. 이제라도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잠함수당 18억 원도 펄펄 뛰는 이 나라에서 제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주 작은 거라도 해놓으면 다음 의원들이 더 범위를 넓혀가겠죠. 큰 댐에 바늘 하나라도 꽂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윤 의원은 비단 순국선열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이라는 큰 틀 속에서 변하지 않는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 함께 명예로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평소 소신과 함께. “독립운동이 자랑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이념이 대립하고 독립을 이루는 방법 또한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갔다는 거예요. 독립운동가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망국노’였어요. 망한 나라의 노예라는 뜻이죠. 후손들에게는 그 말을 절대 안 듣게 하려고 목숨을 바쳤어요. 그분들의 삶은 항상 미래로, 다음 세대로 향해 있었죠. 지금의 우리도 그 뜻을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다음 세대가 자랑스럽게 살아갈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하나 되길 바랍니다.” 그는 오늘도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향해 한걸음 내딛는다. 독립운동가와 우리,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여있는 거대한 댐에 바늘구멍 하나라도 뚫겠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