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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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백년의 산증인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뜻은 통합
역사 잊지 말고 통일로 나아가야
192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태어나 아흔셋의 나이에도 굳건히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지키고 있다. 김자동 회장이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어언 백 년 동안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켜켜이 쌓아올린 시간을 헤아려보다, 그만 울컥했다. 매서운 대륙의 바람은 광복 후에도 끝없이 생을 뒤흔들었으리라. 바람 따라 유유히 흔들릴 인생이었으면, 순탄하게, 남들처럼 유복하게 누릴 수도 있었으련만, 독립운동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정직과 정의의 신념이 평생 그를 단단히 붙들었다. 흔들리지 않았으니 거센 바람 불 때마다 어찌 고단하지 않았을까. 귀가 안 들리고 거동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인터뷰 내내 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김자동 회장. 백년 세월을 견뎌낸 단단한 노목처럼, 그는 존재만으로도 큰 울림을 주었다.
“건강이 비교적 괜찮고 무릎이 아파서 걷는 데 힘이 좀 들 뿐이지 별 문제는 없어요. 특별한 일은 없고 되도록 움직이려 해요. 최근 백신도 맞았어요. 활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하려 해요.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이 제일 중요하지요.” 인터뷰 때문에 힘든 걸음 하신 게 아닐까 송구스러웠는데, 다행히 목소리는 밝고 유쾌했다. 이야기 속엔 따뜻한 유머가 가득했고, 무엇보다 맑은 미소가 마주앉은 이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임시정부에 대한 기억이 삶의 좌표가 되다 책장에 놓인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 1935년 중국 난징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그 속에서 유난히 빛을 발하는 어머니의 미모와 단단한 눈매가 시선을 붙들었다. 중국 상해와 서울을 오가며 임시정부 자금 운반책으로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아했던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이다. 김 회장은 1929년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가 김의한 선생과 정정화 여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동농 김가진 선생이다. 우리나라 최초 헌법으로 불리는 홍범 14조를 기초하고, 농상공·법무대신 등을 지낸 구한말 개화파 학자다. 1919년 일흔넷 고령에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해로 망명, 대동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김의한 선생 역시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재정위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척박한 이국땅, 독립운동가인 부모는 생사를 오가며 늘 분주했을 터이고, 외롭고 배고픈 나날도 많았으리라. 그 혹독한 시절을 어떻게 견디어냈나 궁금해 물었더니, 유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른들이 어려웠지, 나는 재미있기만 했어요. 어머니가 시장 갈 적에 따라가서 엿이라도 얻어먹는 재미가 있었고, 피란 가는 배에선 애들끼리 숨바꼭질하고 놀았어요. 지리와 여행에 관심이 컸는데 묘족, 광족 등 중국 소수민족을 보는 것도 매우 즐거웠어요.” 피란 가는 배에서 즐거이 뛰놀았을 그의 어린 시절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핏줄 속을 유유히 흐르는 낙천성이야말로 절망 속에서도 끝끝내 희망을 잃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유산이 아니었을까. 광복 후 청년이 된 그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6·25전쟁 때는 학도병으로 참전해 미군 통역을 맡았다. 대학 졸업 후 조선일보 공채 1기를 거쳐, 4·19혁명 이후 창간된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나고 민족일보 조용수 발행인이 불과 31세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언론계를 떠났다. 젊은 언론인의 의문사에 침묵하는 기성 언론에 회의감을 느낀 탓이었다. 이후 베트남 호찌민, 홍콩, 중국 칭다오 등을 두루 다니며 사업을 했다. 세계 100여 국을 방문했다니 놀랍다. 현대사의 명저로 꼽히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이어 『모택동 전기』,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당시 모두 금서였다. 1997년에는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0년간의 투쟁 끝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이끌어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해냈다. “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기억은 항상 있었지요. 모든 생각과 삶의 좌표였고 선생님들께서 보여주신 올바른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어요.” 김 회장의 눈빛에서 흑백사진 속 독립운동가 어머니의 단단함이 엿보였다.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 화합과 통일을 바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해외에 망명한 단체가 많았어요. 그 단체들이 모여서 하나의 정부를 수립했어요. 비록 전체가 다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모든 세력이 모여 같이 나가자는 뜻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 뜻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한반도는 분단된 상태잖아요. 하루아침에 어렵더라도, 분단 상태에서라도 가능한 협력하고 합의해서 함께하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처럼 말이에요.” 임정기념사업회는 2005년 설립 초기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적지 답사단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대학생들을 모집해 상해, 충칭, 하얼빈, 일본, 러시아 등 항일투쟁의 현장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대학생 1천여 명이 참가했다.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무척 좋아했던 그는 15년간 답사를 진두지휘했다. 학술회의, 출판, 전시, 공연 등 다양한 행사들을 주최해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는 일에도 전력했다. 올해는 더없이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11월 23일 환국일이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완공될 예정이다. 2005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면서부터 간절히 바라왔던 숙원사업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 “해방된 지 76년 만에 임시정부기념관이 지어져요. 우리의 독립운동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굴곡진 현실이었던 거예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빨리 건립되기를 늘 기대해왔어요.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다니 더욱 감회가 새로워요. 하나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임시정부기념관에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들어가서 관·민이 협력하여 서로 보완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이제는 걸음마저 쉽지 않은 김 회장의 마지막 남은 바람은 남과 북이 다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2019년 4월 9일자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이렇게 많지만, 평양에 지사를 차리고 왔다 갔다 하면서 사업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 화합과 통일의 시대가 열려 그의 오랜 소원이 이뤄지길, 무엇보다 그날이 올 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길 소망해본다. 삶의 길 위에 새겨진 임시정부의 유산 6·25전쟁 때 의용군으로 끌려간 이야기, 퇴계로 일신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귀향증을 받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가 납북되고 홀로 남은 어머니가 난생처음 자신을 안고 울었던 이야기 등등 기억 창고에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온 옛이야기들이 술술 나왔다. 그렇게 삼십여 분이 흘렀을까. 그는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차 한 잔 천천히 드세요. 급할 거 없으니까” 했다. 그리곤 살며시 눈을 감았다. 평화로운 얼굴로 잠시 사색과 휴식을 즐기는 듯했다. 선현 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현 씨는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했다. 인터뷰 내내 애틋한 부녀의 모습을 보며 가슴 뭉클했던 터라, 딸이 성장하면서 느껴온 아버지의 존재는 어떠했을지 궁금했다. “평소 굉장히 겸손하셨어요. 평생 타협하지 않으려 애 많이 쓰셨고요. 당시엔 잘 몰랐지만, 민주화운동에서 여러 역할을 하셨고 탄압도 많이 받으셨어요. 바깥에서 힘든 일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늠조차 어렵죠. 그럼에도 집에 들어오실 때는 항상 웃으면서 오셨어요. 아빠가 힘듦으로 인해 다른 가족들을 힘들게 한 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저희 엄마가 돈 없는 것 빼고는 맘고생 한번 시킨 적 없다고 얘기하시곤 해요. 평생 아빠를 존경하며 살았고, 개인적으로 정말 좋은 아빠셨어요.” 그리곤 소소한 일화 하나를 꺼내 들려주었다. “아빠 사업이 망해서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엄마가 직장을 나가게 되셨어요. 아빠는 이제 아침밥을 빵으로 먹자면서 손수 커피 끓이고 우유 데우고 빵 구워서 가족들 아침을 차려주셨어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2년 전 우리 집이 이사할 때까지 계속해주셨어요. 고령이다 보니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그만두셨죠.” 세월을 헤아려보니 45년이다. 45년 동안 가족을 위해 아침상을 차린 아버지. 아, 더 말해 무엇하랴. 그가 걸어온 길이, 그가 살아온 시간들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우리에게 남긴 귀한 유산인 것을. 김 회장이 혈색 좋은 얼굴로 환히 웃으며 눈을 떴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백여 년을 간직한 오랜 미소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혹독한 세월 견디느라 고단하지 않았냐는 질문은 우문(愚問)임을 깨달았다. 사랑이 있는 고통은 행복이라 했던가.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생을 살아왔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