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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 김중위 초대 환경부장관 겸 월간 순국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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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과 학문의 경계 넘나들며 본질 꿰뚫는 영원한 정치원로  


언론 자유보다 역사 정통성 문제 중요

공과(功過) 함께 평가해야 역사인식 생겨 


인터뷰 | 심재추 월간 순국 편집주간



  4·19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고려대 4·18학생의거를 이끌었고 졸업 후 월간 『사상계』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1960년대 말 신민당 총수였던 유진오 박사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4선 국회의원, 초대 환경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안 해본 정책분야가 없을 정도로 종횡무진 했고, 전문위원부터 정책위 의장까지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갔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풍부한 지식과 유연한 사고, 녹슬지 않은 필력 덕분일까.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바쁘다. 헌정회 홍보편찬위원장, 영토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 UN환경계획 한국부총재, 한국문인협회·국제PEN한국본부 고문 등 맡은 직책이 많다. 월간 『순국』 편집고문으로도 활동하며 주요 현안마다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김중위 초대 환경부장관을 용인 자택에서 만났다.    


와! 현관문을 열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양쪽 벽면에 놓인 멋스런 조각품들이 쭉 이어져 거실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가는 설렘과 호기심으로 따라 들어가니, 예상대로 ‘인생 박물관’이 펼쳐졌다. 세계 각국 시장에서 수집해온 조각품들, 전직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훈장과 상패들……. 그리고 방 하나의 벽을 튼 것 같은 공간에 수천 권의 책들이 인생 박물관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 정치에서 경제·사회·문화까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평생 책을 읽고 공부하며 글을 썼던 반세기가 오롯이 담겨져 있어 경이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아프리카 여행 갔다가 시장에서 사온 건데 다 5달러짜리들이에요. 흐흐흐. 가져오기 편하게 작은 것들로 샀지. 벽에 걸린 그림도 그냥 좋아서 산 것들이고. 흐흐흐.”


김중위 고문은 소탈하게 웃으며 객을 맞았다. 매력적인 눈웃음엔 호기심 어린 소년미가 가득했다. 유독 웃음이 많은 그를 보며, 인생을 참 재미나게 사셨구나, 그런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1시간 반 남짓 이어진 인터뷰 끝에 깨달았다. 그는 세상풍파를 즐긴 인생 고수였음을.


한국 정치사 한가운데서 반세기를 보내다


김중위 고문은 1960년대 말 신민당 총수였던 유진오 박사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 원로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한국 정치사의 한가운데서 반세기를 보낸 셈이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 정경연구소 연구원, 박순천씨의 민중당 전문위원 등을 거쳐 장준하 선생의 권유로 『사상계思想界』에 들어가 학문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당시는 월간 조선·중앙·동아가 없을 때였어요. 사상계가 유일한 잡지이자, 지식에 목마른 젊은이들을 위한 유일한 종합교양잡지였지. 실존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등이 다 사상계 통해 들어왔어요. 해외 유학파나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논설위원에 다 들어가 있었고. 그런 곳에서 편집기획 혼자 다하고, 젊은 놈 중에 특집 글 쓴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흐흐흐.”


학구열과 필력 덕분에 편집장으로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유진오 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려대 총장이었던 유 박사는 정치에 몸담으려 한다며 그에게 보좌관 자리를 제안했다. ‘학자로 일생을 사신 분이 정치권에 왜 발을 들어놓으셨나요?’ 물었더니 은사는 ‘글쎄, 학문이란 게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걸 좀 알고 싶었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학문을 하고 싶었어요. 국내 학문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유학을 가야 하는데 형편이 안 돼서 포기. 문학을 하고 싶었는데 재능이 없어서 포기. 결국 건달생활 하려니까 정치밖에 없었어. 흐흐흐. 국회의원이 체질에 제일 잘 맞았던 것 같아. 안 해본 정책 분야가 없을 정도로 종횡무진했고 당직을 안 맡을 때가 거의 없었어. 전문위원부터 시작해서 정책위 의장까지 간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전문위원, 정책국장, 정책연구실장, 정책조정실장(수석부의장), 정책위 의장까지 한 단계도 뛰어넘어본 적 없이 한 계단 한 계단 다 밟았어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기에 당당했고 ‘입바른 소리’도 망설임이 없었다. 공개회의 장소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게 “총재님, 대통령 다 되신 걸로 생각하세요?”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성정이 원래부터 그랬어요. 경우가 안 맞다 싶으면 말이 나와 버려. 아기 때부터 그랬다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출세를 많이 못했어요. 그래도 국회에 있다 보면 나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의정활동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보좌관이 써 준 원고 읽고 상임위에서 간단한 질문 한두 개 하는 것도 보좌관 손에 맡기고. 나는 일주일씩 걸리는 본회의 원고를 혼자 밤새며 썼지. 상위 10% 자부심은 갖고 있어요.”


그는 YS와 DJ를 만난 일부터 함께 일하며 겪은 일화와 소회를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맛깔나게 이야기했다. 남북한 환경공동선언을 제안한 일, 쓰레기종량제 실시 등 환경부 장관 시절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웠다. 지면상 다 담아내지 못해 못내 아쉽다. 인터뷰 녹음파일을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온갖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그가 오랫동안 정치 원로로서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누구보다 유쾌하고 리버럴 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왔고, 유능함과 정직함을 무기 삼아 정면 돌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순국과 호국의 정신 하나로 이어가야 


김중위 고문은 광복회 회원이다. 조부가 독립운동을 한 이력 덕분이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집안어른이고, 일송 김동삼 선생도 같은 문중이다. 그의 본관인 의성김씨는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문중으로 손꼽힌다. 어릴 때부터 집안어른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모습을 보았던 그는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많은 직책과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월간 『순국』과의 인연을 살뜰히 챙기고, 중요한 안건마다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이유도 그러한 배경과 맞물려 있으리라. 


“심산 선생은 봉화군 우리 마을에서 주로 독립운동을 했어요. 독립운동자금 모으고 파리장서 서명도 받고. 유림단 독립자금 모금운동 할 때 우리 마을에서 소 아홉 마리 자금을 모았어요. 그래서 일제가 마을 전체를 한바탕 쓸었지. 조부님도 감옥 갔다 오시고.”


우리 선열들의 항일독립운동이 조국광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좌우 없이 앞으로 나아갔듯, 그 역시도 중도 입장에서 보수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통합의 길을 걸어왔다. 주요 현안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해 여야에서 두루 존경받았다. 그는 지나치게 편향적인 역사인식에 대해 쓴 소리를 덧붙였다. 


“정확히 역사를 알아야 역사인식이 생겨요. 그러니까 제대로 공부를 해야지. 어떤 책에선 이승만을 친일분자라고 비난해요. 그건 언론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정통성 문제에요. 과거에 ‘이승만의 빛과 그림자’라는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과(過)가 10이라고 해도 공(過) 하나로 과를 덮고 남아요. 미군정이 소련 공산당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매달리고 있을 때에 공산당은 믿지말라면서 단독 정부라도 세워야겠다고 주장한 사람은 이승만 한 명뿐이었어요. 물론 그 후 정치적 결함이 있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정부를 만드는 데 중심축이 돼주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공과 과를 함께 평가를 해야 역사인식이 생겨나는 거예요.” 


역사에서 진실과 본질을 꿰뚫고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나아가려는 노력은 그가 쓴 여러 칼럼에서 엿볼 수 있다. 지난 7월 19일자 중부일보 칼럼에서 ‘순국과 호국의 정신을 하나로 엮어 나가자’는 제목으로 쓴 글이 인상 깊어 그 일부를 옮겨본다.


순국이나 애국이나 호국이나 그 본질은 하나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다름이 있다. 순국이나 애국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가족도 재산도 다 버리고 기약 없는 애국충정으로 눈물겨운 희생을 바친 경우다. 그런 의미에서 든든한 나라가 뒷받침하고 있는 호국으로서의 희생과는 여러모로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신을 선양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크게 따질 일은 아니라고 본다. 예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경우나 숭고한 애국충정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는 호국과 순국의 정신을 하나로 엮어 이어가도록 하는 데에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순국선열유족회 반드시 공법단체로 인정받아야


김중위 고문은 순국선열유족회의 공법단체 설립을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있다. 국회를 통해 입법청원을 하고 정무위원회까지 안건을 올려놨다. 

“독립운동 계열에서는 공법단체가 광복회 하나밖에 없어요. 광복회와 보훈처의 핑퐁관계에 밀려서 가장 최우선 순위 예우를 받아야 할 분들이 아직까지 못 받고 있어요. 처음부터 잘못된 거지. 순국선열유족회를 공법단체로 만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일단 국무총리실에 달려갔어요. 내일모레 그만두는데 숙제 주면 어떡하느냐, 해서 국회 통해 입법청원을 시작했고, 현재 정무위원회까지는 올려놨어요. 내가 정무위원장 할 때 올라왔으면 얼마나 좋아.”


마지막 한 마디에서 김 고문의 진심이 읽혔다. 현역도 아닌데 노구를 이끌고 이리저리 다니며 신경 쓰는 일이 어디 쉬운가. 세력이 없는 순국선열유족회 편에 서서 싸우기가 어디 또 만만한가. 그럼에도 평생 ‘입바른 소리’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 탓에 못 본 체하진 못했으리라. 


순국선열유족회 자료에 따르면,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개정 청원’은 2021년 4월 29일 청원자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회장 외 임원 24인, 소개의원 이낙연 국회의원으로 하여 국회에 상정되었고, 국회정무위원회에서 동 법률 개정 청원의 중요성을 깨닫고 심도 있는 평가 및 심의를 위해 9월 24일까지 답변시한을 연기한 상태다. 선의의 노력들이 공정하고 상식적인 결과로 이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월간 『순국』 편집고문으로서 책에 대한 평가와 향후 편집 방향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편집기획도 좋고, 필자 선정도 잘하고, 책도 잘 나오고 있어요. 사실 월간지 하나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몰라. 영역을 넓히기 시작하면 굉장히 담을 내용이 많을 거예요. 문학 쪽으로 접근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고. 예를 들어 이육사, 윤동주 등의 애국시 모음이나 애국적 소설도 있고, 독립운동가 수기 등도 실을 수 있으니까.”


평생 이념과 학문의 경계를 넘어 리버럴하게 살아온 인생 고수의 해법을 들으며, 월간 『순국』이 나아갈 길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더 많은 대중, 특히 젊은 세대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의미와 재미, 감동을 더 밀도 있게 녹여내야 하리라. 


인터뷰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그가 책 두 권을 건넸다. 『노래로 듣는 한국근대사』와 『탄허 스님과 시애틀 추장』. 제목에서부터 인생 고수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엿보였다. 팔순이 지난 나이에도 누구보다 젊은 머리와 가슴으로 살아가는 김중위 고문의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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