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11] 건국훈장 대통령장│신돌석(申乭石)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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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출귀몰한 전략 펼친
평민 출신 의병장‘태백산 호랑이’
글 | 편집부
1896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전쟁은 처음에는 유림과 양반이 중심이 돼 활동을 펼쳤다. 당시에 활동한 의병장 중 신돌석 장군은 얼마 없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신출귀몰한 전략을 펼쳐 명성이 높아 농민들은 그의 명성을 따라 의병활동에 속속 참여했고 유림 중심의 의병운동을 국민전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요인이 됐다.
핵심공적
평민 의병장으로서, 그 높은 명성과 전과는 일반 농민들의 항일 민족의식과 민중의식을 고양해 평민의병장들을 대거 출현하게 한 기폭제가 됐다.
주요약력
● 1878년 11월 3일 경상북도 영해 출생
● 1896년 경상북도 영해의진 중군장으로 활동
● 1906년 1906년 영덕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릉의병장으로 거의
● 1907년 13도연합의병진의 교남의병 대장
● 1908년 평해 등지에서 일군 격파
● 1908년 11월 18일 피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동학농민운동으로
반일 민족의식 확고히 다지다
장군의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예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인신분으로 하락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장군 대에 와서는 평민 신분으로까지 전락했다고 하니, 반봉건 의식이 남달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장군이 태어난 시기는 개항 직후 외세의 침탈이 고조되고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시기였으므로 반봉건 의식과 함께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부친의 지도와 격려 아래 일찍이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혔다. 그리하여 15세가 되자 장군은 정세를 파악하고 뜻을 펴기 위해 전국 각지로 지사,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장군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그를 빌미로 한 일제의 침략 야욕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반일 민족의식을 확고하게 다져갔다.
강대국 이권 싸움에 휘말린 조선

각종 협약을 강제 체결해나가던 일제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일으켰고 단발령을 강요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신돌석 장군은 1896년 19세의 나이로 그동안 사귀어온 동지들과 함께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장군은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됐다. 남한산성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진과 연합작전을 벌였다. 김하락 의병장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강물에 투신, 순국하고 말았다. 이에 신돌석 장군을 비롯한 의병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재기를 준비했다.
의병부대 규모 3천여 명으로 커져 명성

먼저 영해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한 뒤, 그해 4월에는 울진 장흥관으로 이동하여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 9척을 격침했다. 이후 장군의 의병부대는 동해안 일대, 경북 내륙지방, 강원도 등지에서 일본군수비대를 격파해 일본군은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듬해 봄에는 백남수와 김치헌 등의 휘하 장병들과 함께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 세력들을 대거 처단해 농민들 사이에 명성을 더욱 높였다. 신돌석 장군의 명성은 영남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전국적인 것이어서 이해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연합부대로 13도창의군이 결성될 때, 신돌석 장군은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서울진공작전에 합류하지 못하고 영남으로 되돌아 왔다.
현상금 노린 옛 동지의 손에 안타깝게…
1907년 말 경상북도 일월산 등지에서 휴식하며 전력을 보충한 장군의 의병부대는 1908년 초부터 활동을 재개했다. 안동의 유시연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계를 취하면서 의병부대를 몇 개의 소부대 단위로 편성하여 산간벽지를 근거지로 하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강화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고, 수시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여 일본군은 장군의 의병부대가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군경 분파소를 설치하지 못했고, 정찰활동도 낮에만 하는 형편이었다.
일제는 여러 작전이 모두 실패하자 회유로 방법을 바꿨다. 경상북도 관찰사의 서약서, 통감의 편지 등을 통해 귀순을 권유했지만, 신돌석 장군은 이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겨울이 다가오자 그동안의 전력 손실을 보충해 다음 해 봄에 재기할 것을 기약하고 잠시 의진을 해산했다.
이후 가족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여러 곳의 동지들을 찾아다니던 중, 옛 부하였던 김상렬을 만나 그의 집에 묵었다. 그날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과 함께 장군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만취하게 한 뒤, 깊은 잠에 빠진 장군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신돌석 장군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신돌석 장군은 굳게 믿었던 사람의 손에 살해되어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