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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1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강우규(姜宇奎)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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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위해 죽음도 불사

65세 애국지사의 뜨거운 용기


글 | 편집부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 앞에서 천지를 진동시키는 큰 폭음이 울렸다. 그해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가 탄 마차를 향해 날아간 폭탄은 미처 마차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몇 미터 앞에서 터졌다. 그 폭탄을 던진 이는 환갑이 넘은 강우규 의사이었다. 노령의 나이에 실행한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전국에서 수많은 비밀결사가 조직되는 자극제가 되었다.  


핵심공적

일제통치의 최고 책임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서 남대문역 앞에서 열린 환영행사에서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주요약력

●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 출생

● 1910년대 만주에서 동광학교(東光學校) 등을 설립

●1919년  노인동맹단에 가입, 남대문역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폭살 기도 

● 1920년  11월 29일 (65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평생을 몸 바친 민족교육과 계몽운동


강우규 의사은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나의 집에서 자라며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배웠다. 근대화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점차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기독교에도 몸 담아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으로 1883년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주했다.


흥원에서 한약방을 연 의사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이 재산으로 교회와 학당을 세워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교육과 기독교를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쉰이 넘는 나이로 계몽운동을 펼치던 강우규 의사의 마음에 독립항쟁의 불을 지핀 사건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었다. 이후 강우규 의사의 행적을 보면 젊은 청년 안중근과 같은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경술국치를 맞이하게 된 강우규 의사는 독립항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11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있는 화룡현 두도구로 옮겼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며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항쟁 방도를 모색했다.


사립광동학교 설립으로 

민족의식과 동포애 고취


독립항쟁의 산실을 마련하고자 했던 강우규 의사는 1915년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했다. 이곳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신흥동이라 명명하고 본격적인 독립항쟁 거점으로 성장시켜 나갔다.


독립항쟁의 기반은 교육. 의사는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했다. 광동학교는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동포애를 심어줬다. 1년 만에 10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 된 이곳은 만주 각지의 독립항쟁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성장해 나갔다.


몇 년간 차분히 독립항쟁을 준비하던 강우규 의사는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사람들을 학교에 모아서 인근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시위로는 독립이 이루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한 독립을 위한 방법을 고민하던 그는 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게 되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들을 지원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의사를 꿈꾸는 강우규 의사에게 뒷자리는 답답하기만 했다.


미리 준비한 폭탄으로 총독 제거 결심


강우규 의사는 3·1운동이 일어나기 몇 주 전, 언젠가 사용하리라 생각하며 폭탄을 하나 사들였다. 폭탄을 쓸 일은 금방 생겼다. 일본은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 정책을 바꾸었다. 그는 우리나라를 영구히 식민지로 삼으려는 술책이라 생각해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를 사살하기로 결심했다.


6월 14일, 가지고 있던 폭탄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원산항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고 다른 독립항쟁가의 도움으로 8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신임 총독이 9월 2일에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남대문역 부근에서 숙식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강우규 의사는 환영행사를 마치고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거사에 성공하면 자작시를 읊으며 체포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노령의 나이라 힘이 모자랐던 탓일까? 폭탄은 마차에 도달하지 못하고 폭발했다. 현장에서 몸을 피한 의사는 도피 중 잡혀 수감됐다. 그는 옳은 일을 했기에 재판을 받는 동안 항상 당당했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굽히지 않았던 독립항쟁


65세 애국지사의 용기는 독립항쟁을 하는 이들에게 큰 감동과 존경심을 심어줬다. 가장 혼란했던 시기를 경험한 그는 청년들에게 독립을 안겨주고자 노력했으며 청년들에게 독립의 꿈을 심어주기를 원했다. 11월 죽음을 앞두고 청년들에게 남긴 글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기에 의사는 한수의 시를 읊었다.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 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마지막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강우규 의사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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