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11] 산남의진 정환직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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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밀지(密旨) 받들어 항일의병부대 진두지휘
“의리는 소중하고 죽음은 오히려 가벼운 것”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1905년 11월 17일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해인 1906년 정환직과 그의 아들 정용기,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에 의하여 의병이 조직되었고, 이듬해인 1907년 4월에 산남의진이 결성 출범하면서 초대 대장으로 정용기가 추대되었다. 산남(山南)은 고려시대 이래 영남을 지칭한다. 산남의진이란 ‘영남지역의진’이라는 의미이다. 산남의진의 활동지역은 영천(자양면·검단리·운주산) 청하(압암·매현·동대산) 영덕(서암) 흥해 청송(신성·두방·두마) 신녕·의흥 등지의 산간지역을 대상으로 기습 또는 유격전을 펼쳤다.
산남의진과 관련된 문헌 중 대표적인 자료는 송상도의 『기려수필(騎驢隨筆)』이 있다. 영주 출신 유학자 송상도(1871∼1946)는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역대의 사적(史籍)을 섭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2020년 11월에 (사)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서 <산남의진선양 제1회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글은 이때 발간된 자료집을 활용하여 산남의진을 이끌었던 정환직 의병장을 중심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의병장 후손으로 태어나
삼남참오령 되어 동학도 토벌
정환직은 자는 백온(伯溫)이고 호는 동엄(東广)이니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으로 1844년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굳세고 바르고 재주가 빼어났다. 정세아는 임진왜란 시 의병을 조직하여 영천성을 탈환했던 인물이다. 의병장의 후손으로 태어난 정환직은 처음에 침법(針法)을 배워 근무하지 않는 날[하일下日]은 이리저리 놀러 다녔다.
1887년에 북부도사(北部都事)로 제수(除授)되었고, 1888년에는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제수되었는데, 1894년에 전국에 걸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고종께서 정환직에 명하여 삼남참오령(三南參五領)이 되어 동학농민군들을 토벌케 하였다. 그해 겨울에 또 북쪽지방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고종께서 정환직을 황해도로 보냈다. 그리하여 환직은 밀조(密詔)를 받들어 한 필 말에 몸을 실어 황해도로 갔다.
당시 동학도들은 구월산 속에 모여 있었는데 정환직은 금광(金鑛)에 일하는 일꾼들을 달래어 동학도들을 토벌하였다. 1895년 봄에는 황해도 구월산의 동학도들을 토벌하고 조정으로 돌아와 시종신(侍從臣)이 되었다.
1899년 여름에 삼남검찰 겸 토포사로 제수되었다가 8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시종관이 되었다. 그해 11월 20일 밤 종묘(宗廟)에 불이 났다. 이때 정환직은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가 묘주(廟主)를 모시고 다른 안전한 곳에 모셔두었다. 이때 태황(太皇)과 황태자께서 불이 난 곳에 이르자 정환직은 놀라서 고종에게 이르기를 “불길이 나오는 곳은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이곳은 폐하께서 임하실 곳이 아니오니, 바라건대 급히 안전한 곳으로 피하소서”라 말하고, 태황(太皇)을 업고 안전한 곳에 모시자, 내시(內侍)들이 빙 둘러싸고 모셨다. 다시 정환직이 태자(太子)를 업고 몰래 거동사(擧動舍)에 피했다가 궁으로 돌아갔더니 임금께서 그를 아끼시어 옥배(玉褙)와 금은으로 만든 패물을 내리시고, 또한 화공으로 하여금 정환직의 모양[像]을 그리게 하고 친필로 글씨를 써서 주셨다. 이때 밀의(密議)가 있었는데 임금께서 장환직에게 명하여 맥(脈)을 짚어보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임금이 정환직에게 귀속 말[附耳]을 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정환직은 그 손을 꼭 쥐고 지녔다.
1900년 여름에 원수부위임 겸 삼남시찰사로 제수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도찰(都察)로 승진되어 경주에 이르렀다. 이 때 탐관오리인 경주부윤의 비리가 적힌 장부를 얻어 조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봉세관(俸稅官)이 어명(御命)이라는 이유로 정환직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정환직의 아들 정용기가 서울로 가서, 정환직이 체포된 것은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거짓으로 임금의 이름을 대어 명령(矯命)을 내리게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임금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정환직을 불러 전 직책을 그대로 주려 하였다. 하지만 정환직은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서 임금에게 벼슬을 고사(固辭)하는 상소(上疏)를 올리고 물러가려 하였는데, 임금은 정환직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하였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아들 정용기, 이한구 등과 의병 일으켜

1906년에 정환직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아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와 손내숙(孫迺叔) 이경구(李景久)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정용기는 이한구로 하여금 먼저 동대산(東大山)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자신은 일군(一軍)을 이끌고 우각(牛角)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참새가 책상 위에 똥을 눈 것이 있어 이를 괴이하게 여겨 군사들로 하여금 경비를 엄하게 하라 명하였다. 한낮이 되어 경주의 영병(營兵: 감영에 딸린 군사)이 왔는데, 정용기는 위엄과 신망[威信]으로 그들에게 항복을 받으려 하였지만 도리어 그들에 잡힌 바가 되어 대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예에 따라 머리털을 바짝 깎아야 하기에 정용기의 머리를 깎으려 하자 정용기가 말하기를 “나의 목은 가히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나의 머리털은 가히 깎지 못하리라”하고 큰 소리로 자신의 머리털을 자르려는 사람들을 질타하자 저들은 감히 용기의 머리털을 자르지 못했으며, 날마다 차와 먹을거리를 보내주었지만 모든 음식이 일본의 것이라 용기는 먹지 않고 말하기를 “내 어찌 원수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다시 조선음식을 내 놓았다.
일본인 관리가 질문을 하자 정용기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침저녁으로 시급하다 말할 만한데 나의 의거(義擧)가 어찌 나의 분수에 넘치는 행동(汎濫)이겠는가?”하고 두 주먹으로 의자를 내려치면서 상대방을 꾸짖으니, 그 의기(義氣)가 늠름하기에 모두들 그를 위하여 얼굴색을 바꾸었다.
8월에 비로소 석방이 되자 일본사람들이 큰 소리로 떠들며 말하기를 “대한에 이와 같은 사람 18명이 있으니 내 감히 기유(覬覦: 분수에 넘치게 야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다)하겠는가”라고들 하였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편지를 써서 이한구에게 준 글에 「면암 최익현이 호남에서 잡히고 민종식이 홍주(洪州)에서 패한 것은 가히 탄식할만하지만, 그러나 대구는 일본군들의 별다른 수비가 없으니 만일 천 명 정도의 의병이 습격한다면 가히 일본군이 점령한 대구성을 수복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이한구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공은 자신의 몸은 잊고 나라만을 걱정함은 죽음에 이른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열렬한 대장부라 이를 만하구나”라 하였다.
1907년 4월에 다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한구가 군대 혁파의 소식을 듣고 왜적을 토벌하는 계책을 물었더니 용기 말하기를 “지혜는 얕고 힘은 모자라니 다만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라 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동대산으로 들어가자 여러 사람들이 용기를 대장(大將)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의병의 수효 400여 명이었는데 청하(淸河)를 공격하여 왜적 한 사람을 포획하고 청송의 신성(薪城)에서는 또 왜적 세 사람을 사살하였다.
입암전투 이끈 아들 사망소식 듣고
흩어진 의병 수습하여 고을 탈환

이튿날 적병들이 단계(丹溪)에 이르러 정용기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본집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 정용기는 군사를 돌려 왜적들을 추격하여 또 한사람의 왜적을 사살하였다. 9월 1일 왜적의 동향을 정탐하던 사람이 적병들이 크게 올라온다는 보고를 받고 좌영장(左營將) 이석(李錫.이세기李世紀) 연습장(鍊習將) 우재룡 등으로 세 갈래 길로 나누어 막작령(莫雀嶺)에 복병(伏兵)케 하고 몰래 명령을 내리기를 “적병들이 만일 입암에서 숙영(宿營)을 하거든 자네들은 밤의 어둠을 타고 몰래 나와서 광천(廣川)마을 위에 병사들을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다가 이튿날 날이 채 밝기 전에 그들을 에워싸고 공격하면 적들은 반드시 남쪽으로 달아날 것이니, 그때 자네들은 그들이 달아나는 남쪽 길을 끊고 그들을 노려 공격한다면 가히 그들을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이네”라 하였다.
저녁 무렵 적병들이 과연 예상한 대로 복병한 곳에 이르자 이석 등은 적들을 가볍게 보고 곧바로 병사들을 진격시켰다. 하지만 채 적들을 에워싸기도 전에 뒤따르던 군사들이 잘못 대포를 쏘는 바람에 적들이 모두 이에 대응하여 대포를 쏘았다. 그들의 실수에 크게 놀한 정용기는 이한구 등과 더불어 병사들을 독려하여 나아가 입암원촌(立巖院村) 등지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앞에 위치한 부대에서 “적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라 하기에 정용기, 이한구, 손내숙(영각), 권규섭 등 네 사람은 마을의 집으로 들어가 막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려는데 적들이 몰래 들어와 총을 쏘아 모두 총에 맞아 순국을 하게 되고 말았다.

도찰공(都察公) 정환직이 아들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장졸들이 입암 전투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자식이 있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나는 참으로 유감이 없다. 그러나 오늘의 원수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모두 원한이 깊구나”라 하고, 드디어 추전곡(秋田谷)에 이르러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하고 그들을 통솔하여 흥해와 의흥 두 고을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을 몰아내어 고을을 탈환하고 적병 세 사람을 포획하였다.
청송의 두방리(斗坊里)에 이르렀을 때, 대규모의 적병들을 마주하자 의병대 한 부대가 놀라 흩어졌다. 이에 이석(李錫)이 소모병(召募兵)들을 거느리고 이르고 흩어진 의병들도 모두 다 모이기에 군용(軍容)이 다시 엄숙해졌다.
이후 흥해로 진격하여 청하와 영덕에 이르러 적의 우두머리 등 2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양성리(良城里)에 도착하니, 적병이 세 갈래로 나누어 의병들을 공격하려 하였다. 한 갈래는 청하로부터 출발하였고 한 갈래는 청송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한 갈래는 기계면에서 출발하였다는 말을 듣고 정환직은 크게 놀라서 의병들을 이끌고 금정리(金井里)에 이르렀을 때, 적병들과 갑작스레 마주치는 바람에 장졸(將卒)들이 서로 방향을 잃고 도망을 가고, 정환직 등은 동대산 속으로 들어갔다.
동대산에서 7일을 보내고 산을 내려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대포 소리가 네 번 울렸다. 이어서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끝내 정환직은 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정환직은 적들을 향하여 꾸짖음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고 한 번도 무릎을 꿇지 않았기에 적장은 그를 매우 두텁게 예우하였다. 정환직은 영천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몸은 비록 죽어가나 마음만은 변치 않으니
(身亡心不變)
의리는 소중하고 죽음은 오히려 가벼운 것
(義重死猶輕)
다음 일은 그 누구에게 부탁할꼬
(後事憑誰託)
말없이 앉았더니 때는 이미 새벽일세
(無言坐五更)
이후 정환직은 14일 대구로 갔다가 15일 다시 영천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순국하니 때는 바로 1907년 11월 16일이다. 죽음에 임하여 대포소리가 갑자기 네 번 일어났지만 멀고 가까이 살고 있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기에 다들 이상하게 여겼기에 그것을 천포(天炮)라 여겼다.
정환직의 사후에 시신을 거둘 사람이 없었는데 일견(日見)에 살고 있던 이윤오(李潤五)가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그의 시신을 습렴하여 정환직의 고향인 자양 검단리로 돌아갔다. 군수인 이인선(李仁善)이 전치(傳致)하였고 공은 이 일에 관한 편지를 자신의 아들인 옥기(沃基)에 남기면서 면(面)을 봉하고 겉면에 크게 쓰기를 「일사도무사(一死都無事)」의 다섯 글자를 썼다고들 말한다.
정환기의 아들 정용기는 1862년에 태어났다. 인간 됨됨이는 이마는 넓고 두 뺨은 가늘고 좁으며 비분강개하는 성정이 있고 기이한 절조가 있었다. 천성은 너그럽고 크며 또한 사람들을 잘 포용하였다. 살고 있던 동네의 이름은 본래 거동(巨洞)이었지만 이후로 영천지방의 사림(士林)들이 동네 이름을 고쳐 충효동(忠孝洞)으로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환직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1962년에 아들 정용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