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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1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윤봉길(尹奉吉)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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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 생기 불어넣다 


천지 뒤흔든 폭발로

전 세계 이목 집중


글 | 편집부 


일제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연과 상하이 전승 기념행사를 열었다.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갔고 일본인만 남아 일본 상하이 교민회의 축하연이 벌어졌다.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단상에 물통 하나가 날아들었고 그 물통은 곧 폭발했다.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치며 일본 헌병대에게 잡혀갔다. 


핵심공적

훙커우 공원에서 시라카와 대장, 노무라 중장 등을 폭살하여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주요약력

●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 출생

● 1927년  「농민독본」 저술

● 1928년  부흥원 설립

● 1932년  훙커우 공원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 등을 폭살

● 1932년  12월 19일 (24세)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충남 덕산에서 태어나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을 겪은 후 학교를 자퇴하고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서당에서 공부하던 윤봉길 의사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난다. 산책길에 공동묘지에서 무덤 주인의 이름을 적어놓은 묘표를 여러 개 뽑아들고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달라는 청년을 만났던 것이다. 묘표를 뽑아 무덤 위치조자 알 수 없게 만든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원흉임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과 민족의식을 가르쳤다. 야학에서 끝내지 않고 3권으로 구성된 「농민독본」도 썼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만들어 농가부업장려와 공동판매, 공동구입을 위한 조합, 국산품 애용, 생활 개선 등에 힘썼고 친목과 체력향상 등을 위한 활동도 함께 펼쳤다.


독립항쟁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다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함흥수리조합에 소속된 일본인이 조선인 3명을 살해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독립해야만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달의 고민 끝에 윤봉길 의사는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적은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윤봉길 의사의 고뇌는 중국 청도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잘 적혀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채소 장사를 하며 독립을 앞당길 방법을 찾았다. 상해에 도착한 지 1년이 넘은 1931년 겨울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되고 본인이 독립항쟁에 몸 바칠 각오임을 호소했다.


1932년 4월 29일 의거를 결행하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소식이 상해 일일신문에 보도된다.


임시정부는 이 행사에 참석하는 군 지휘관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했다. 의거 3일 전 윤봉길 의사는 이 의거가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인애국단 단원으로서 단장인 백범 김구 선생의 입회 아래 태극기 앞에서 선서했다.

4월 29일 아침, 윤봉길 의사는 백범 선생과 마지막 아침을 먹은 후 서로의

 시계를 바꾸고 훙커우 공원으로 향했다. 행사장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


오전 11시 40분쯤, 참석한 외교관과 귀빈들이 떠나고 단상엔 일본 측 인사만 남았다. 축하연이 시작되기 전 일본 국가가 시작됐다. 11시 50분, 윤봉길 의사는 물통형 폭탄의 안전핀을 빼서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으로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항쟁의 구심체가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봉분도 없이 묻혔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 품으로 돌아와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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