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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01]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윤형숙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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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주도하다 왼팔과 오른쪽 눈 잃은 열아홉 소녀


“한 팔은 조국 위해, 또 한 팔은 문맹자를 위해”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윤형숙 열사 등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 광주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이 자리에서 윤 열사는 태극기를 든 왼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비극적인 운명과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마르다윌슨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쳤다. 그 후 기독교학교의 사감과 고창의 유치원 등지에서 자라나는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이는 순국열사 윤형숙(이명 윤안정엽, 윤혈녀, 1900.9.13 ~ 1950.9.28)의 무덤 묘비석에 새겨진 글귀다. 전남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마을 입구에 있는 윤형숙 열사의 무덤은 2차선 도로 옆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는 양지 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윤형숙 열사의 후손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KTX로 내려간 필자(2017년 11월 17일)에게 이날 안내를 해준 분은 윤 열사의 조카 윤치홍(77세) 씨 부부였다. 윤치홍 씨는 윤형숙 열사의 작은 아버지 윤자환(尹滋換,1896~1949, 2003년 대통령표창 서훈)의 손자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손자분이 감기 몸살 중이라 부인(72세)께서 손수 운전을 하여 KTX 여천역까지 마중 나와 주셨다.


“고모님(윤형숙 열사)의 무덤은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채 저기 보이는 고향(창무리) 마을 뒷산에 가매장되어 있었지요. 그러다가 10년 뒤에 현재의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1960년 3월 23일, 마을사람들은 윤형숙 열사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후 2013년 9월 28일 무덤 앞에 묘비석과 안내판을 세우는 등 묘비 정비를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윤형숙 열사의 조카 윤치홍 씨로 당시에 그는 여수시 독립유공자 발굴 전문위원이었다.


“윤형숙 열사는 남도의 유관순이라고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만세운동 중 일경에 왼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까지 잃으면서도 그칠 줄 모르는 독립운동에 전념하신 그 투지를 누가 감히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는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를 잘 모른다. 윤형숙 열사는 어렸을 때 안정리라는 마을에서 살아 ‘윤안정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수피아여고 시절에는 ‘윤혈녀’라고 불렸다. 윤 열사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로부터 5년 뒤인 1900년 9월 13일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났다. 윤 열사의 아버지 윤치운은 당시 한학자였으며, 어머니는 윤 열사가 7세 되던 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린 딸을 교육시키고자 순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집에 맡겨 초등학교를 마치게 한다. 


이후 순천 성서학원을 이수한 뒤, 광주지역 최초의 여성중등교육기관인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고)에 진학하면서 나라의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키운다. 당시 수피아여학교는 광주 숭실학교와 더불어 호남지역의 중요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그 명성이 자자했던 학교다. 


1918년, 18세의 나이로 수피아여학교 신입생이 된 윤형숙 열사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반장을 도맡아했다. 특히 수피아여학교의 반일회(班日會)는 실제로 일제에 저항하는 뜻의 반일회(反日會) 성격을 띠었으나 일제의 눈을 피해 반(班)모임으로 위장하여 ‘장발장’, ‘베니스의 상인’, ‘바보온달’ 같은 연극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우는 일에 앞장섰다. 

때마침 수피아여학교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박애순 선생(1896~1969, 1990년 애족장)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영리하고 야무진 윤 열사는 박애순 선생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윤 열사가 1학년 말이었던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서거하고, 서울로부터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전해 들은 수피아여학교는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박애순 선생은 3·1만세운동 전후의 국내 사정과 파리만국강화회의 사정, 매일신보에 실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 등을 학생들에게 알려 자신들도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해야 하는 당위성을 이해시켜나갔다. 


이에 윤형숙 등 학생들은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 광주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이날 만세시위에는 수피아여학교를 비롯하여 숭실학교생, 기독교인, 농민, 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여하였는데 일제는 기마헌병을 투입하여 시위자들에게 위해를 가하며 체포에 열을 올렸다. 


이 자리에서 윤형숙 열사는 태극기를 든 왼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비극적인 운명과 마주치게 된다. 이러한 큰 부상을 입은 윤 열사는 주동자로 잡혀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4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게 된다. 당시 광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수피아여학교는 윤형숙 열사를 비롯하여 교사와 학생 26명이 전원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만세운동 당시 목숨은 건졌지만 왼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잃는 치명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윤형숙 열사는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원산의 마르다윌슨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마쳤다. 그 뒤 전주로 내려가 기독교학교의 사감과 고창의 유치원 등지에서 자라나는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윤형숙 열사는 “왼팔은 조국을 위해 바쳤고 나머지 한 팔은 문맹자를 위해 바친다”는 신념으로 특히 어린이 교육에 매진했다. 그러나 비극이 또 다시 닥쳐왔다. 6·25전쟁이었다. 해방된 조국이었지만 좌우 이념의 갈등 속에서 1950년 9월 28일 밤, 서울이 수복되자 퇴각에 나선 인민군은 윤형숙 열사를 비롯한 손양원 목사 등 기독교인을 포함한 양민 200여 명을 여수시 둔덕동으로 끌고 가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이 비극적인 학살에 윤형숙 열사가 끌려들어가 희생당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팔이 잘리고 눈을 실명당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어린이 교육에 힘써왔던 윤형숙 열사는 사후 63년이 지난 뒤인 2003년에 이르러서야 독립운동 사실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을 추서받게 된다. 


여수시에 있는 윤형숙 열사의 유적지로는 여수이순신공원(여수시 웅천동 산221) 내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서 있는 곳의 벽에 새긴 부조(돋을새김 조각)를 들 수 있다. 이 부조에는 윤 열사의 잘린 팔이 뒹구는 가운데 만세운동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 이름 석 자라도 기억하는 겨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슴에 간직한 채 평생 고모님인 윤형숙 열사의 삶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조카 윤치홍 씨 부부의 노고가 쌀쌀한 11월의 날씨를 훈훈하게 해주었다. 


한편, 여수시에서는 2019년 9월 27일, 여수시와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회장 오룡) 주최로 “의혈지사 윤형숙을 기억한다”라는 학술세미나 겸 추모제를 열었다. 필자도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의 항일정신 재조명’이란 주제로 토론에 참여했다. 이날 학술대회 및 추모제는 3·1만세운동 100돌을 맞아 윤형숙 열사의 삶을 최초로 조명하는 행사였기에 더욱 값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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