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2/05] 건국훈장 대통령장│양한묵(梁漢黙)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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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은 우리의 의무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옥중 순국자
글 | 편집부
반드시 되리라는 생각은 없어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지금 강화회의에서도 민족자결이 제창됨으로써 일본정부의 원조로 자립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금번의 독립항쟁을 한 것이고, 금후도 기회만 있다면 할 생각이다.
-경성지방법원 예심괘의 심문조서 중
핵심공적
주요약력
● 1862년 4월 29일(음) 전라남도 해남 출생
● 1905년 ‘헌정연구회’ 조직해 친일세력에 대항
● 1909년 천도교총부 법도사, 1911년 직무도사 역임
●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
● 1919년 5월 26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다양한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향반의 자제
양한묵 선생은 1862년 음력 4월 29일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양반 명문가였다. 그러나 선생의 12대조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1대 조부터 벼슬길이 막혀 가까운 조상이 벼슬길에 나간 사람은 없지만, 향반으로 대접받던 집안의 장남이었다.
조상들이 관개 수리사업을 벌여 부를 축적했고 아버지 대에는 집안에 상당한 숫자의 노비를 거느릴 수 있는 경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역사회 활동과 선행으로 주변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양한묵 선생의 집안이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선생은 7세 때 어머니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고, 8세 때는 양사재에 들어가 유학을 배웠다. 15세 때는 상서와 춘추 등 유가의 여러 서적을 섭렵하고 18세 때 불교, 선교, 천주교, 신교, 음양복술에 관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후 능주목(현 화순군)으로 이사해 학생을 교육하면서 생활했다. 시간이 나면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구월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묘향산 등의 명산대찰을 둘러보며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백성의 실상을 목격하고, 나라를 구할 방책이 무엇인지 모색했다.
중국과 일본 주유하다 동학에 입교하다

1897년 중국의 북경, 천진, 산동 등지를 돌고 1898년에는 세계열강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조희연, 권동진, 오세창 등과 만났고 이들의 소개로 선생은 동학의 교주 손병희를 만났다.
당시 손병희는 일본에서 동학 자제 24명을 교토 부립제1중학교에서 공부하게 하며 동학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양한묵은 손병희와 교류하며 손병희의 개화사상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1904년 동학에 입교했다.
이후 황무지개척권 양여요구 반대, 공진회 참가, 입헌군주정을 위한 헌정 연구 등의 독립항쟁과 손병희와 동학의 근대화를 위해 천도교 활동에 전념하던 선생은 이재명 등의 이완용 저격 미수 사건으로 체포된다. 일본 경찰은 이 일이 선생의 지시로 일어났다고 생각해서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선생은 4개월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천도교 교리서 편찬과 근대화 활동
양한묵 선생은 손병희를 도와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천도교의 근대화운동을 추진함과 동시에 1905년 말 『천도교대헌』을 작성했다. 1906년 초에 귀국한 선생은 천도교의 교리를 정비하는 활동을 했다. 다양한 천도교 교리서를 편찬하며 사람과 한울과의 관계를 밝히고, 동학의 교리를 현대문명에 맞게 정리했다.
동시에 교리강습소 교육 장려로 천도교인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지방교구에 “종교가 흥왕하는 시대를 맞이해 교인의 정성과 면목이 진리에 몽매하면 교인자격에 큰 흠절이라. 학교를 설립하여 신리학과 인계학을 아울러 가르치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다.
1908년에는 각 교구의 성화실 내에 야간교리강습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했으며 1909년에는 기존의 교리공부 외에 교육을 담당하는 법과를 신설했다. 교리강습소는 근대적인 지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3·1운동 때 천도교인들이 투쟁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배경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후에는 세계질서의 재편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노령, 만주, 중국, 미주의 독립항쟁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조선총독부의 천도교인 회유공작에 맞서 손병희와 힘을 합하여 한국의 문화와 윤리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했다.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와 순국

선생은 보성전문학교 교장 윤익선과 전라남도 화순에 사람을 파견하여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2월 27일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그곳에서 민족대표 독립선언에 함께 했고, 독립만세를 외친 후 출동한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양한묵 선생은 심문과정에서 “이번 거사로 독립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무이며 기회만 있으면 독립항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 후 어떤 권력이나 지위를 획득하려는 야망도 없고 단지 한국인이므로 독립항쟁에 참여한 것이며 독립 후에는 전과 같이 천도교의 포교활동에 전념할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이러한 양한묵 선생의 당당한 답변은 더욱 가혹한 일경의 고문을 불러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56세의 노인이 고문을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선생은 1919년 5월 26일 서대문감옥에서 길지 않은 인생을 마감하고 환원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중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