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2/05] 인재진 (사)문화현상 이사장(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장)
페이지 정보
본문
역사·문화·미래의 연결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
백년 전 ‘독립전사’ 키운 신흥무관학교 정신
‘미래사회 이끌 디지털 전사’ 키워내다
글·사진 | 편집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위치한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 로비에는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흉상이 서 있다.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눈길, 가슴이 뭉클하다. 북카페와 공연장에 온 듯한 분위기, 은은한 커피 향과 잔잔한 음악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우아하게 빛나는 그랜드피아노, 벽면에 전시된 LP판과 헤드셋이 눈에 띈다.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과 뉴미디어, 도서관의 조합이라니, 이채롭고 특별하다. 누가, 왜, 이런 공간을 지었을까. ‘디지털 신흥무관학교’를 지향하는 이곳에선 지금 어떤 일들이 펼쳐지고 있을까.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을 기획한 인재진 ㈜문화현상 이사장(공연기획자·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학부장)을 만나 역사-문화-미래를 연결하는, 매우 참신하고 놀라운 신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명예도 영광도 멀리한 최고 명문 자산가
전 재산 내놓고 독립운동하다 아사(餓死)
백여 년 전 화도읍 가곡리 땅 등(현재가치 약 2조 원) 전 재산을 팔아 오롯이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놓은 선생이 없었다면, 신흥무관학교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터이다. 3천여 명의 정예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도,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의 승리도 요원했을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성정(性情) 탓에 선생은 항상 멀찍이 물러서 있었다. 명예도 영광도 멀리했다. 유일한 직함이었던 신흥학교 교장조차 주위 만류를 끝내 뿌리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독립운동에 전재산과 평생을 바친 조선 최고의 명문 자산가는 빈곤에 시달렸다. 북경에 머물렀던 10년여 동안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다. 팔십 노구를 이끌고 이역만리 빈민가를 전전하며 콩비지로 근근이 연명했다 한다. 현재가치 2조 원이나 되는 거금은 독립군의 생명줄이 되었지만, 선생의 생명줄은 늘 처참하고 위태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내어놓은 대자산가의 사인(死因)이 아사(餓死: 굶어죽음)라니. 눈물이 난다. 하지만 더 피눈물 나는 건, 이토록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사후 87년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목숨 바쳐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디지털 신흥무관학교’로 되살아나다
다행히, 지난 2018년 민선 7기 조광한 남양주시장이 취임하면서부터 이석영 선생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남양주시는 2019년부터 이석영광장과 역사체험관 REMEMBER 1910,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 청년층 창업지원 공간인 이석영신흥상회 등 역사적 가치를 담은 시민 공간에 선생의 이름을 붙이며 기념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 1월 14일 문을 연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은 국내 최초 뉴미디어 음악 특화 도서관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디지털 신흥무관학교’를 기치로 미래사회 주역인 청소년들의 꿈을 키우고 있다.

‘독립운동가 이석영’에 ‘뉴미디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접목한 주인공, 인재진 (사)문화현상 이사장의 이야기다. 사단법인 문화현상은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의 자문·기획·설계 단계부터 시작해 현재 운영·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민간위탁사다.
인재진 이사장은 재즈와 월드뮤직 등 음악 관련 일을 하는 공연기획자로, 현재 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교수이며 재즈 아티스트 나윤선 씨의 반려자이기도 하다. 2004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총감독을 맡아 ‘대한민국 최우수 축제’, ‘아시아 최고의 재즈 페스티벌’로 일궈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 페스티벌 감독으로 손꼽히며, 해외 음악계에선 ‘JJ’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다양한 국제 행사에 중요 패널리스트로 초청되어 대한민국의 음악을 알리는 데도 힘을 보태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남양주시 자문회의에 참석하게 됐는데, 시에서 특화된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어요. 요즘 트렌드에 맞게 음악보다 더 업데이트한 뉴미디어 분야를 접목하되,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제안했죠. 콘셉트 논의과정에서 이석영 선생이 정말 훌륭한 분이시구나, 큰 감명을 받았어요. 지역에서 아직 잘 모르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도서관에 흉상이 있으면 더 의미 있는 공간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석영 선생이 있었다. 선생의 정신이 없었다면, 선생의 삶이 전한 깊은 울림과 감동이 없었다면, 이토록 특별한 공간을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선생이 평생 실천한 애국심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도서관의 근간(根幹)이 되고 예술적 영감(靈感)이 되어 87년 만에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선생이 살았던,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처분했던 남양주시 화도읍 땅 위에서 뿌리 깊은 나무로 우뚝 섰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공간
미래세대 ‘펀(fun)한’ 꿈과 만나다
고정관념을 깨는 공간의 혁신,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모두의 꿈은 행복하게 이루어졌다.
지난 1년간 이곳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아온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타 지자체 도서관 관계자 등만 해도 600명이 넘을 정도로 ‘미래 도서관 문화를 선도하는 좋은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더 의미 있는 결실은, 독립정신으로 채워진 이곳에서 이석영 선생의 후예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사실. 백여 년 전 ‘독립전사’를 길러낸 신흥무관학교처럼,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은 청소년들의 ‘펀(fun)한’ 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미래사회 문화강국을 이끌 ‘디지털 전사’를 키우고 있다.
“우리나라의 희망은 바로 청소년들이죠. 사회가 고착화하고 계층 간 사다리가 끊어졌지만, 이런 부분을 이어갈 수 있는 분야가 뉴미디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죠. 그런 맥락에서 공간의 중요성을 인지했고, 그런 근간이 될 수 있는 공간에 더욱 집중했어요.”
공연이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계단형 관람석을 비롯해 자유롭게 LP음악을 들을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 파란 바닥재 색상과 뉴미디어 작품 ‘미디어 폴’이 인상적인 종합자료실, 전문 공연이 펼쳐지는 블랙박스형 공연장 ‘뮤직아트홀’, 댄스 스튜디오와 크리에이터·레코딩·뮤직 스튜디오 등 곳곳에서 이러한 철학이 엿보였다.

“지난 겨울 눈이 많이 내린 날, 도서관 통유리 창문 너머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은 색다른 힐링을 경험했어요. 일상생활 속에서 공간에서 받는 영향이 크다는 걸 알게 됐죠. 특히 공공공간이 주는 힐링은 그 의미가 훨씬 크다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이 창의성과 재능을 계발하고 뉴미디어 분야의 진로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자, 지역민들이 다양한 인문·문화·예술 욕구를 충족시키며 자유롭게 휴식을 즐기는 공간이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훨씬 행복해지겠죠. 무엇보다 우리 사회 희망인 청소년들이 ‘fun’한 공간, 꿈을 새로 시작하는 베이스가 많아졌으면 해요.”
인재진 이사장은 평소 청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삶의 기록을 담은 책 『청춘은 찌글찌글한 축제다』를 펴낸 까닭도 좌절과 고통에 눈물 흘리는 청춘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대학 교단에 서고 틈틈이 특강을 하면서 ‘돈을 쫓지 않고 꿈을 쫓는’ 인생의 미덕을 논하는 것도 청춘의 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찌글찌글해도 괜찮아. 우리는 고통의 시간을 즐길 필요가 있어.” 재즈처럼 자유롭고 따뜻하게 건네는 그의 유머는, 어딜 가나 인기가 많다.
이석영 선생의 정신이 깃든 이곳에서
대한민국 후손들이 영원히 행복하길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은 지난 1년간 놀라운 성과를 보여줬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활용한 개관식 개최를 시작으로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 역사 강연, 가족이 함께한 어린이날 행사 ‘석영랜드’, 북 토크 콘서트, 문화예술 공연, 미디어아트 전시회, 시 직원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렸다. 일반 도서관에서 접하기 어려운 음악·뉴미디어 특화 프로그램만 54개, 348회를 운영해 9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지난 한 해 전체 프로그램으로 넓히면 374회, 9천 4백여 명에 달한다.
지난 1월 17일에는 개관 1주년을 기념해 음악·댄스 공연, 인문·뉴미디어 강연, 미디어아트 전시회 등 재미와 즐길 거리 가득한 ‘이석영 뉴미디어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영크리에이터 크루’가 행사 기획과 운영 전반에 참여하며 톡톡 튀는 면모를 선보였고,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ZEPETO)’를 통해 가상도서관 ‘메타라이브러리(Meta-Library)’ 개관식과 온라인 투어 등을 진행해 시민들에게 색다른 재미와 현장감을 선사했다. 릴레이 토크콘서트에는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참석해 ‘도서관&영석정신과 사회적기업’을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이석영 선생이 백 년 전 만든 신흥무관학교처럼, 미래사회 문화강국을 이끌 디지털 전사를 키워내고 싶어요. 청소년뿐 아니라 지역민들에게도 사랑받는 공간이 되어서 기뻐요. 개관 1주년 행사에서 이종찬 이사장이 ‘이석영 선생이 여기서 다시 환생하셨다’며 너무 좋아하셨어요. 도서관에 깃든 이석영 선생의 독립정신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거라 믿어요.”
아무리 위대한 역사도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지 않으면 ‘박제된 유물’에 불과하다. 단절된 역사는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역사의 변신은 무죄’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변화된 트렌드에 따라, 동시대인의 바람을 담아, 미래세대 눈높이에 맞게, 독립정신을 담아내는 그릇도 바뀌어야 하리라.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독립정신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길 소망하며, 역사가 현재와 미래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간을 한 번 더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석영 선생의 온화한 눈빛이 가슴속에 스며들어 어여쁜 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