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06] 제주 여성교육과 독립운동 이끌다 33세에 요절한 강평국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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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은 삶 살다간 시대의 선각자
피 흘려 청춘을 불살랐던 여성의 등불이여!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강평국 지사는 제주 신성여학교를 1회로 졸업(1914년)했다. 이후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의사가 되어 헐벗고 가난한 동포를 돌보고자 하는 꿈을 이루고자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강 지사는 유학 시절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동경에서 근우회를 창립해 도쿄지회 의장으로 활약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경성여자고보 사범과 졸업 후 교육자의 길
의사 꿈 위해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유학
이는 제주시 황사평 천주교 공원묘지에 세워져 있는 강평국(姜平國, 1900~1933) 지사의 추도비에 새겨져있는 글이다. 2019년 11월 8일(금) 낮 1시, 강평국 지사의 추도비를 찾아간 제주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추도비가 있는 곳은 공원묘지 입구에서 정면으로 나있는 조붓한 길을 걸어가면 나오는데 중간에 성모상이 서 있고 그 뒤를 조금 더 걸어가면 ‘황사평 순교자 묘역’이라는 커다란 봉분이 나온다. 바로 그 봉분 왼쪽 편에 강평국 지사의 추도비가 작고 아담한 모습으로 서 있다. 추도비에는 ‘아가다 강평국 선생 추도비’라는 글귀가 빗돌에 새겨져 있다. 아가다는 강평국 선생의 세례명이다.
강평국 지사는 1900년도 제주읍 일도리에서 아버지 강도훈과 어머니 홍소사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강평국 지사의 부모는 천주교인으로 강평국 지사가 태어나고 1년 뒤인 1901년 신축교난(辛丑敎難, 1901년 제주도민들 사이에 경제적 이해 대립관계와 종교적인 갈등, 일본인 수산업자들과 프랑스 선교사 세력들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순교하는 불운을 겪었다. 고아가 된 강평국 지사는 오빠 강세독과 천주교의 보호 아래 자라 ‘아가다’라는 이름의 세례를 받았다.
강평국 지사는 제주 여성독립운동가 삼총사로 불리는 고수선, 최정숙 지사와 함께 일찍이 개화의 눈을 떠 제주 신성여학교를 1회로 졸업(1914년)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고향 제주에서 친자매처럼 친하게 자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여자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시절임에도 삼총사는 신성여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는 점이다. 이리하여 삼총사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8년)를 나와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삼총사는 모두 얼마 안 돼 다시 의학공부에 전념한다. 의사가 되어 헐벗고 가난한 동포를 돌보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삼총사 가운데 최정숙, 고수선 지사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고 강평국 지사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 초대 집행위원장
근우회 도쿄지회 의장으로 활약

이에 대하여 강평국 지사와 절친했던 고수선 지사의 아드님인 김률근 선생은 “어머니는 늘 강평국 지사께서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유학시절에도 강평국 지사께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말씀을 어머니를 통해 들었습니다. 강평국 선생은 1927년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으셨고 또한 1928년에는 동경에서 근우회를 창립하여 도쿄지회 의장으로 활약하신 분이십니다”라고 증언했다.
건강 때문에 학업 포기하고 귀국길
광주 비밀결사 활동으로 끌려가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강평국 지사는 전라남도와 고향인 제주의 대정공립보통학교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데 그때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일을 가지고 일제는 끝끝내 강평국 지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한편 강평국 지사가 제주에서 교편을 잡은 것은 여성으로서는 강평국 지사가 처음이다. 당시 강평국 지사 밑에서 공부한 제자들은 스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3·1만세운동 당시 최정숙 선생님은 종로로 나가다 붙잡혔고 강평국 선생님은 일본 기마병에 쫓길 때 어느 집으로 들어가 병풍을 치고 앉아 머리를 쪽지고 앉았다고 해요. 그래서 새색시처럼 보여 붙잡히지 않았던 것이지요”
- 제자 김서옥(1989년 당시 81살)

- 제자 한여택(1989년 당시 91살)
한편, 제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당시 강평국 지사는 최정숙 지사와 함께 여자장학회(1920년)를 조직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업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 장학회를 토대로 이들은 1921년에는 여수원(女修院)을 설립하였다. 여수원은 1922년 명신학교의 모태가 되었는데 이곳은 여성 교육과 여성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문맹퇴치 강습소 역할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강평국 지사는 삼총사였던 최정숙, 고수선 지사와 함께 1925년 12월, 제주에서 조선여자청년회를 조직한다. 제주여자청년회는 여성의 의식향상과 권익보호를 위해 세운 것으로 근대민족여성운동을 주도한 단체로 성장했다.
제주에서 죽마고우로 자라나 신성여학교를 1회로 졸업한 삼총사는 서울로 유학을 떠나 의학전문학교를 다녔다. 이때가 1920년대였으니 선각자 가운데 선각자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최정숙 지사와 고수선 지사는 서울에서 의사가 되었고, 강평국 지사는 도쿄에서 의학전문학교를 다녔으니 33세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분명 명의가 되어 삼총사가 끝까지 제주에서 아름다운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가혹했다.
사후 86년 만에
독립유공자 포상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제주에서 33살에 숨진 강평국 지사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1933년 숨졌을 때 현재의 황사평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했지만 당시 묘비를 세우지 못한 관계로 현재까지도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죽마고우였던 고수선 지사를 비롯한 장시우, 김정순, 한려택, 김소아, 김계숙 등 친구와 동지, 후배, 제자 16명이 강평국 지사의 유지를 받들어 1981년 11월 10일, 이곳 황사평 순교자 묘역 안에 ‘추도비’를 세운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강평국 지사의 추도비가 있는 이곳 황사평 천주교 공원묘지는 1903년, 신축교난(辛丑敎難) 당시 숨진 이들을 위해 조성된 무덤으로 1983년부터 공원묘지화를 시작하여 1990년대에 천주교 제주교구 100주년 사업의 한 고리로 성역화하였다. 지금은 ‘천주교 제주 교구 순례길’ 코스다. 다행히 강평국 지사 사후 86년 만인 2019년 3월, 삼총사 가운데 뒤늦게 강평국 지사가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애족장)로 포상받은 것은 그나마 기쁜 일이다.
황사평 천주교 공원묘지 안의 강평국 지사 추도비를 찾았던 날은 유난히도 제주의 하늘이 높고 푸르렀다. 아름다운 땅 제주의 하늘아래서 오래도록 잊혔던 여성 교육의 선각자요, 독립운동가였던 강평국 지사의 불꽃 같은 삶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래도록 추도비에서 자리를 뜨지 못했다.
참고로, 2022년 3월 1일 현재,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제주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는 강평국 지사와 더불어 고수선(1898~1989, 1990 애족장), 최정숙(1902~1977, 1993 대통령표창),부춘화(1908~1995, 2003 건국포장),김옥련(1907~2005, 2003 건국포장),부덕량(1911~1939, 2005 건국포장), 이갑문(1913~모름, 2018 건국포장), 고연홍(1903~모름, 2019 대통령표창), 김진현(1909~모름, 2019 대통령표창), 이경선(1914~모름, 2021 애족장)을 포함하여 모두 11명이다.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