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07] 이석용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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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와 우리나라 5적 7적 못 죽인 게 천추의 한
“대한의 개와 닭이 될지언정 네 나라 신하는 싫다”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1911년 동지들과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1912년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비밀결사를 결성했던 이석용 의병장은 군자금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1913년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1914년 1월 12일 전주재판소에서 이석용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었다. 재판관이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천황의 은덕이 망극하여 일반 신민이 모두 다 즐거워하는데 너도 역시 충실한 국민이 되고 싶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크게 웃고 대답을 했다. “차라리 대한의 개와 닭이 될지언정 네 나라 신하 되기는 원치 않는다.”
뜨거운 정성 하늘에 고하는 고천제 올려
의진약속 선포하고 ‘격중가’ 지어 부르다
의병장에 추대된 이석용은 ‘일본인 구축(驅逐), 일본 상품 배격, 인물 본위의 모병, 무기 제조 기술자 영입, 푸른색 군복 착용, 간략한 군례(軍禮), 일진회 등 친일 세력 처단, 엄격한 군율 적용, 민폐 근절’등 의병들이 지켜야 할 의진약속(義陳約束) 14개 조항과 10개의 의령(義令)을 선포하고, 다음과 같은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불렀다.
이들은 대오를 편성한 후에 곧장 진안읍을 공격하여 분파소와 우편취급소, 일본어 통역의 가옥 등을 불사르고, 통신선을 절단하는 등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석용이 1907년 8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약 2년간 직접 쓴 일기인 <창의일록>에 의하면, 1907년 9월 16일 추졸산(酋窣山) 내원사(內源寺) 전투에서 포장(砲將) 박만화(朴萬華)와 동자(童子)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을 비롯하여 임실, 남원, 순창 등의 지역에서 모두 11명의 의병이 희생되었다. 이듬해인 1908년 3월 21일 비가 퍼붓는 운현(雲峴)의 야간 전투에서는 포장 최덕일이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하자 자결하는 등 16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3명이 상처를 입었고 2명이 잡혀가는 등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희생된 동료 의병들 유해 수습하여
순국선열 28위께 합동제례 올리다

이제 경건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하고 이석용과 28 의사의 영전에 향을 사른 후에 제문을 읽어 보자.
“성상(聖上: 고종황제) 45년(1908) 무신(戊申) 하(夏) 4월 을묘(乙卯) 삭(朔) 28일 임오(壬午) 패군장(敗軍將) 이석용(李錫庸)은 삼척(三尺)의 제단(祭壇)을 베풀어 제물(祭物)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祝文)을 지어 통곡”하면서 이석용은 먼저 간 동료 의병들을 한 분 한 분 불러내고 있으니, 우리 역사가 영원히 기억하고 기려야 할 인물들은 바로 다음과 같다. 용담(龍潭)의 전망의장(戰亡義將) 박만화(朴萬華), 의동(義童)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 순창(淳昌)의 전망의졸(戰亡義卒) 최일권(崔一權), 두봉(斗峯)의 전망의사(戰亡義士) 이광삼(李光三), 남원(南原)의 전망의사 김사범(金士範)과 의졸 서상렬(徐相烈), 장수(長水)의 전망의사 허윤조(許允照)와 의졸 성경삼(成景三)과 의졸 양경삼(楊敬三), 줄리(崒里)의 피화의졸(被禍義卒) 오병선(吳秉善), 운현(雲峴)의 전망의장 최덕일(崔德逸)과 여주목(呂柱穆), 의사 한사국(韓士國), 의졸 윤정오(尹正五), 한득주(韓得周), 김춘화(金春華), 정군삼(鄭君三), 박운서(朴雲瑞), 김치삼(金致三), 박인완(朴仁完), 김여집(金汝集), 서성일(徐聖一), 박달천(朴達天), 의동 김동관(金東觀), 김학도(金學道), 의승(義僧) 봉수(鳳洙), 덕홍(德弘)의 영소(靈所)에 결별을 고하나이다.
이어서 이석용은 인간세계의 불합리와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따지고 있었다. 하늘은 착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화를 주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마이산에서 거의할 때 하늘을 우러러 맹세를 했던 이석용에게 하늘의 대답은 너무나 가혹했기에 다음과 같이 절규할 수 밖에 없었다.
아! 황천(荒天)은 인자(仁慈)하지 못하고 지신(地神)은 영험(靈驗)하지 못합니다. 인자하고 영험하다면 정의의 군사가 어찌 죽게 되었겠나이까? 사직이 복이 없고 생민이 운이 없나이다. 복이 있고 운이 있다면 정의의 군사가 어찌 병들어 죽었겠나이까?
하지만 이석용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부터 패전(敗戰)의 책임은 장수(將帥)에게 있었으니 엊그제 실패한 것은 내가 실로 총명하지 못해서였다”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리고 “제사에 임하여 충의를 다한 넋을 위로하며 붓으로 적어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남겨진 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절절한 제문을 마저 읽어 보자.
아!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의기는 흩어지지 않고 충혼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응당 뇌부(雷斧, 번갯불)가 되어 저 요망한 자들의 무릎을 자르소서. 역사가(歷史家)의 눈은 우리 침사(忱士, 義士)들을 제대로 볼 것이니 장차 밝은 세상이 오면 어찌 먼저 의사들을 표창하지 않겠나이까? 의연한 박장(朴將: 박만화)은 분기탱천 적을 무찔렀고, 장렬한 최장(崔將: 최덕일)은 적을 꾸짖고 스스로 자결하였으니, 우뚝 세운 절의(節義)는 옛날 사람에게 비하여도 양보하지 않을 만하겠나이다. 진주(晋州)와 금산(錦山)의 일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겠나이다.
… 그 충절은 일월처럼 빛나고 산악처럼 높으며, 그 이름은 하해처럼 마르지 않고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 파리 떼처럼 왜놈에게 머리를 굽혀 나라를 더럽히면서 욕먹고 살다가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해 죽을 난신적자(亂臣賊子)와 비교하면 누가 귀중하겠나이까?
… 그대들의 철천지원수는 되갚겠으며 그대들의 혈육은 앞으로 잘 보살필 것입니다. … 촛불처럼 밝은 영령이 곁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군사들은 모두 소복을 입고 한없이 웁니다. 초목도 슬픔을 머금고 구름과 아지랑이도 음산한 기운을 더합니다. 손을 씻고 술을 따르니 그대들은 와서 흠향하소서.
그러나 이석용 의진은 항전이 길어지면서 의병의 전력이 약화되었고,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강화되면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이석용은 1909년 3월에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일본 천황 암살 계획 세우고
조국 광복 위해 비밀결사 결성

그러나 군자금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1913년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1914년 1월 12일 전주재판소에서 이석용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었다. 순국선열 조희제가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1918년 까지 애국투사들의 절의실적(節義實蹟)을 기록한 『염재야록』에 실려 있는 그날의 공판 기록은 우리에게 이석용 의병장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 공판 기록을 소리내어 함께 읽어보자. 그러면 우리는 분명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석용과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글을 많이 읽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사서삼경 이외에 제자백가의 글도 역시 읽었다.
재산이 있는가?
빈한한 선비가 어찌 재산이 있을 리가 있겠느냐.
무슨 목적으로 감히 폭도 노릇을 했느냐?
너희 일본 놈들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다.
통솔한 부하가 3백 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느냐?
그렇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천황의 은덕이 망극하여 일반 신민이 모두 다 즐거워하는데 너도 역시 충실한 국민이 되고 싶지 않느냐?
(크게 웃고 대답을 했다) 차라리 대한의 개와 닭이 될지언정 네 나라 신하되기는 원치 않는다.

제 나라를 배반하고 일본놈에게 붙은 자는 부득불 죽이고 집을 불태울 수밖에 없으며, 공금에 있어서는 본시 대한국 국세이다. 임금이 잃어버린 것을 신하가 찾아 쓰고, 아비가 잃어버린 것을 자식이 찾아 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무엇이 불법이란 말이냐?
그렇다면 군대를 해산하고 잠적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시기가 불리하여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잠깐 동안 군사를 휴식하고 후일에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 그런 것이다.
충신 의사라고 자부하면서 이미 성공 못할 줄을 알았다면 죽음이 있을 따름인데 하필 구구히 살아남아서 이런 곤욕을 당하느냐?
네놈들이 어찌 내가 죽지 않은 까닭을 알겠느냐. 옛날 제갈공명은 여섯 차례나 기산에 나가서 싸웠고, 강유가 아홉 번째 중원을 친 것도 모두 성공 못할 줄을 알면서도 강행한 것이다. 비록 성공 못할 것을 알았으나, 충성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뿐이다. 나는 당당한 국사(國士)로서 후일의 광복을 계획하지 않고 어찌 스스로 죽을 수 있겠느냐.
창의록을 장황하게 기록하였는데 어디에 사용하려 그리하였는가? 불망록은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렇게 수다하게 적었느냐?
창의록으로 말하면 충분심(忠憤心)이 격동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것을 일본정부에 전달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불망록으로 말하자면 의병을 일으킨 5~6년에 걸쳐 많은 친구의 보조를 받았기 때문에 뒷날 은혜를 갚고자 해서 그런 것이다.
사실심문은 이로써 끝났다. 너도 자신에게 이익될 말이 있으면 기탄없이 다 말하라.
지금 포로가 되었으니 다만 빨리 죽여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무슨 자신을 유리하게 할 말이 있겠느냐. 비록 그러하나 다만 한 되는 바는 이등박문이 안중근의 손에 죽었는데, 나는 데라우치(寺內正毅)와 우리나라 5적 7적을 죽이려다가 못 죽인 것이요. 또 동경, 대판에 불을 지르려다가 못한 것이다.
이어서 재판장이 판결을 앞두고 석용에게 기립하라고 하자 석용은 말했다. “기립(起立)이란 바로 경의(敬意)를 표하는 것인데 원수 놈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치가 어디 있느냐. 이 때문에 전일에도 실행하지 않았던 것인데 또 어찌 번거롭게 하느냐.”
왜놈들이 간수를 시켜 부액(扶腋)하여 강제로 일으키므로 석용은 크게 꾸짖었다. “네놈들이 강제로 나를 일으키지만 내 마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판사가 사형선고문을 낭독하고 퇴석(退席)하므로 석용은 태연히 말했다. “집안일을 부탁하고자 하니 내 아들과 면회시켜 주기를 청한다.” 왜놈들이 아들을 데리고 와서 이석용 앞에 절을 올리자 이석용은 다만 효도하고 우애에 관한 두어 마디 말만 부탁하였다. 이때 그의 안광(眼光)은 번쩍번쩍 빛나며 특이한 광채가 밖으로 빛났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