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2/08] 건국훈장 대통령장│남상덕(南相悳) 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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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지킨 마지막 불꽃
정미의병 도화선 되다
글 | 편집부
대한제국군들의 용감한 방어는 심지어 적군도 높이 찬양하였다고 하면서,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일인들은 그들이 이전에 말해온 이상으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 영국 데일리 메일 신문, 멕켄지(Mackenzie) 기자
핵심공적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항의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주요약력
● 1881년 경상남도 의령 출생
● 1906년 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 보병 참위
● 1907년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시가전
● 1907년 8월 1일 전사,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일본군의 철통같은 보안 속
대한제국군대 해산

1907년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는 각 시위 대대장을 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인 대관정에 소집하여 융희황제의 조칙을 하달했다. 이때 사령관 하세가와와 군부고문 노즈가 배석했는데, 조칙 하달 후 맨손체조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오전 10시까지 시위대 장졸들을 훈련원에 모이도록 했다. 당시 대한제국 군대의 편성은 서울에는 시위 제1, 제2연대가 있어 산하에 각기 3개 대대 규모를 두었다. 지방에는 수원을 비롯하여 청주, 원주, 대구, 광주, 해주, 북청, 안주 등 8개의 주요 지역에 진위대를 두는 한편, 각 진위대에는 분견대를 두고 있었다.
훈련원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서울 동대문 운동장 부근에 만들어진 무관시험, 무예연습, 병법에 대한 책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이날 이곳에는 조선주차군 참모장 무다(牟田), 군부고문 노즈 및 한국군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장졸들은 하나둘 모이는 중이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미리 병고를 들어 참석지 않았다. 전날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서울 요처에는 일본군이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중무장으로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기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거라 다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날의 자리는 대한제국군대를 해산하는 자리였다. 간단한 해산식이 있고 모인 병사들에게 정부로부터 계급에 따라 은사금을 지급했다. 군인들은 더욱 울분에 떨었고, 일부 병사들은 돈을 찢어 버리고 통곡하며 병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시위대 병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총포를 모두 거두어갔기 때문에 병영은 텅 비어 있었다.
“마땅히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
한국군 교관 구리하라(栗原) 대위는 시위 제1연대 제1대대를 정렬시켜 훈련원의 해산식장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때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과 중대장인 정위 오의선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해산한다는 이야기를 차마 장병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자결했던 것이다.
대대장 자결 소식을 접한 병사들은 울분을 토하며 교관에게 달려들자 구리하라 대위는 병영으로 도망하였다. 같은 시각 인근에 있던 시위 제2연대 제1대대는 일본인 교관 이케 대위의 지휘로 훈련원으로 향하여 영문을 나가려던 중,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의 소식을 듣고 교관에게 폭행을 가하였다. 시위 제1연대 제1, 2대대의 병사들은 곧바로 탄약고를 접수한 뒤 무기를 휴대하고 병영으로 모였다.
남대문 안쪽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시위 제2연대 제1대대의 남상덕 참위가 “윗 장교(上將)가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의로움을 보였는데, 내가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마땅히 저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며 일본군과의 항전을 주장했다.
조선 건국 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서울 시가전에서 장렬히 전사

시위대의 병영을 접수하려고 한 일본군 제9, 10중대와 시위대 병사들 간에 사격전이 시작됐다. 이로써 일본군과 시위대 사이에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이 바로 남대문 전투다.
한국군 시위대의 저항이 예상외로 맹렬하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군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장 사카베(坂部義男) 소좌에게 남대문 병영에 있는 2중대와 기관총 3문으로 남대문 수비병 및 소의문 수비병과 협력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의 항쟁을 속히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이후의 전투 상황은 더욱 치열해졌다. 양측이 맞붙어 전투를 벌일 때, 오오타(太田) 공병소위는 수류탄을 영내에 던져 다수의 시위대 병사들을 전사시켰다. 이 틈을 노려 일본군 제12중대 또한 영내에 돌입함으로써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시위대 병사들은 영내로 침투한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병영을 넘어들어오자 남상덕 참위는 칼을 빼들고 크게 소리치며 앞장서 대항했다. 러일전쟁 중 여러 차례 용맹을 떨쳐 도깨비대장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가지하라 대위가 이때 시위대에게 사살됐다. 하지만 남상덕 참위도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27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했다. 시위대는 중과부적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밖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의병 도화선 된
남대문 전투
병영을 탈출한 다수의 시위대 병사들은 민가로 숨어 들어갔고, 일부는 계속 일본군 남대문 수비병들을 공격함으로써 항쟁 의지를 불태웠다. 이날 전투의 한국군 시위대의 피해는 전사자가 장교 11명, 준사관과 하사 57명, 부상자 100명, 포로 516명이었다. 탈출한 시위대는 500명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신문기자 멕켄지(mackenzie)는 이날의 전투에 대해 “그들의 용감한 방어는 심지어 적군도 높이 찬양하였다고 하면서,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일인들은 그들이 이전에 말해 온 이상으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주목할만한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에서는 “당일의 서울 시가전 이후 나머지 군인들은 각자 흩어져 정미(丁未)의 팔로(八路) 의병으로서 다시 일어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으로 복무했던 남상덕 참위가 주도한 남대문 전투는 대한제국을 지키는 마지막 불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