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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10] 건국훈장 독립장│고광순(高光洵)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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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조차 감탄한 호남의 의병장


을미사변 원흉 

단호한 척결 주장


글 | 편집부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 이에 부장 고제량이 죽음을 함께 할 것을 맹약했다. “당초 의(義)로써 함께 일어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하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는가!” 


핵심공적

1906년에 의병을 일으켰고 노구의 나이를 이끌고 일제와 싸워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약력
● 1848년 2월 7일   전라남도 담양 출생
● 1895년   광주의진 참여
● 1906년   창평에서 거의, 의병장으로 활동
남원·화순·능주·화개 전투에서 승전
● 1907년 10월 16일  지리산 연곡사에서 전사,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

고광순 선생은 1848년 2월 7일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의 가문이었다. 고광순은 그 가운데서도 고인후의 제사를 모시고 있는 후손이었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절개와 의리가 높은 선비의 기운을 타고났다.

어려서부터 고광순은 재능이 뛰어나고 행동이 남달랐다. 외조부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얼마 후 그가 종가의 양자로 가게 되자 외조부는 외손들 가운데 제일가는 아이를 빼앗겼다며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학문에 전념하면서도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남다른 데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덕을 좋아하는 군자로 칭송됐다.
 고광순은 젊은 시절 과거에 응시한 적이 있었으나 비리와 부정이 가득한 과거장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해 그대로 귀향하고 말았다.

고광순 선생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창했다.

을미사변으로 호남의 유림인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다

을미사변에 뒤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사람들 사이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졌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고광순은 호남지방 유림계의 명사들인 송사 기우만, 성재 기삼연 등과 연락을 취하며 각 고을로 격문을 보내 의병 규합에 나섰다.

1896년 2월(음) 광주와 나주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의병에 속속 참가했다. 기우만을 주축으로 광주향교에 집결해 규칙을 정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했다. 기삼연도 이때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광주로 합세했다.

하지만 영남지역의 의병을 격파한 여세를 몰고 호남으로 행군해 온 이겸제가 거느린 관군의 공격을 받아 의병 측에 가담한 해남군수 정석진이 희생됐고 선유사 신기선이 해산 칙령을 가지고 오자 의병들은 더 이상 항거할 명분을 잃고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국왕의 명령인지라 의병을 해산하기는 했지만, 그 명이 국왕의 본심이 아니고 일제와 매국대신의 협박 때문에 내려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고광순과 기우만 등의 선비들은 전국 각지를 돌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광무황제로부터 애통조를 받고 
복수를 다짐하다

고광순 선생은 의병을 일으킨 이후 집안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을 재기하겠다는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선생의 나이 58세 때인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 일로 다시 전국에서 항일 투지가 크게 불타올랐으며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최익현 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여기에 동참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이미 출동한 진위대에 의해 최익현은 체포당하고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

고광순 선생은 그해 11월에 다시 백낙구,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 모여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날 모인 사람이 얼마 없어 오히려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받았다. 선생은 감격해 하며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인근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놓고 담양군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오랜 기간 대항을 위해 
지리산에 근거지를 마련하다

그 후 고광순 선생은 고령의 나이로 오로지 충의에 의지하여 고군분투했다.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07년 9월 임기응변식의 즉흥적인 전투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추고자 지리산 피아골에 사람들을 모았다. 피아골 계곡 아래에 있는 연곡사를 본영으로 삼고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워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췄다. 

지리산이 영·호남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변모하자 일제 군경은 대대적인 탄압작전에 돌입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이 공격을 개시했고 의병들은 연곡사 구석으로 몰렸다. 의병은 우세한 인원을 바탕으로 완강히 저항했지만, 워낙 무기의 차이가 컸다.

이 전투로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25~6명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했다. 일제 군경은 연곡사 안팎을 모두 불사르고 퇴각해 연곡사가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될 수 없게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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