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0/10]평산·풍덕 심노술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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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을 근거지 삼아 강화도까지 진출
국권침탈 논리 깨뜨린 신출귀몰 명장
글 │ 이태룡(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심노술 의병장은 1907년 박정빈(朴正彬) 의진의 중대장으로 황해도 배천·연안·평산·해주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1908년 이후에는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임진강 유역과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도·황해도 도서지방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1908년부터 융희황제의 의병해산 조칙과 함께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이를 물리쳤던 심노술 의병장.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심노술 의병장에 대해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공훈록에는 ‘그는 중국 요동으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재조직,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분사(憤死)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박정빈 의진에서 의병활동 시작
그는 1907년에는 박정빈(朴正彬) 의진의 중대장으로 황해도 배천·연안·평산·해주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1908년에는 김용기(金龍基) 의진의 부장(副將)으로, 혹은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임진강 유역과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도·황해도 도서지방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박기섭(朴箕燮:박정빈의 이명-필자 주)은 군대해산 직후에 황해도 유림계 인사들의 추대로 거의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박기섭 의진은 황해도 평산에 근거지를 두고 각 지방에 격문을 돌려 4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부대편성을 마쳤는데, 이때 심노술은 김정환(金正煥:金正安-필자 주)·한정만(韓貞萬)·인두정(印斗鼎)·변승준(邊承準)·신도희(申道熙)·신성보(愼成甫)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심노술은 박기섭 의진의 중대장으로서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황해도 해주·연안·평산 등지와 연해의 여러 도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순사주재소 및 출장소를 공격하는 등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 28쪽)
평산의진을 이끈 박정빈은 황해도 수안 출신으로 문과 급제 후 내무아문 주사, 청산현감을 거쳐 1895년에 청주군수, 1899년 친위대 참위, 1904년 목천군수를 지낸 유인석(柳麟錫) 문인이었다. 그가 평산의진을 이끌게 된 것은 군대해산 직후 전 군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전 연안군수 명범석(明範錫)과 전 중화군수 신종균(申從均)으로 하여금 그에게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라는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평산과 해주 등지의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모여 거의를 위한 논의 끝에 그 해 9월 박정빈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격문을 돌리자, 모여든 의병이 4천여 명이었다. 이때의 의진을 일반적으로 평산의진이라 일컫지만 실제는 황해도 중남부 지역의 의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의진이었다.
평산의진은 여느 의진처럼 의병대장이 직접 의병을 이끌고 산야를 누비면서 의병투쟁을 벌이던 경우와는 달리 선봉부대, 5~7개 중대, 돌격부대, 마산부대로 나누어 실제 의병투쟁은 중대장과 돌격장, 마산 도총장 중심으로 운용되었고, 이들 부대가 연합작전을 전개할 때는 선봉장 이진룡(李鎭龍)이 대대장으로서 부대를 총괄하고, 심노술과 김정안, 한정만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박정빈은 1907년 겨울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전개된 13도창의대진의 교남의병대장(嶠南義兵大將)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여 영남지역 의병을 이끌기도 하였다.
강춘삼·이근수 의진 등과 연계하여 의병투쟁

그는 강춘삼(姜春三) 의진과 더불어 연안·평산·해주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인 것이 일제의 기록에 드러나고 있다.
적도(賊徒:의병-필자 주) 봉기 이후 한때는 그 수가 6~7백 명에 달하여 여러 개의 부대로 분리되어, 우 판관(禹判官:평산 판관 출신 우병렬-필자 주)이 은밀히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고, 더욱이 신경칠(辛景七)은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해주·강령 기타의 여러 군을 돌아다녔고, 심노술(沈魯術)과 강춘삼(姜春三)은 해주·연안·평산의 여러 군과 연해(沿海) 여러 섬에 출몰하였으며, 이야천(李野天)은 재령군에, 김상현(金相鉉)은 신천군에, 한경옥(韓京玉)과 허덕천(許德天)은 옹진군에, 기타의 소집단은 각지에 출몰하여 주재소·출장소의 순사 및 수비병을 습격하는 등 한때 창궐을 극하였으나, 수색·토벌이 진척됨에 따라 혹은 토벌되고, 혹은 귀순하고, 혹은 도주하는 등 근래에 와서는 일부 방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진정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심노술·강춘삼은 아직도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평산군 서쪽, 해주군 사이의 바다와 육지를, 장명서(長明瑞)의 일파는 해주군 서부지방에 출몰하고 있으므로 목하 수비대와 협력하여 수색에 전념하고 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권. 625~626쪽)
심노술 의진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인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드러나고 있다.
경기와 해서지방에는 의병이 치열하여 양주는 황재호(黃在浩), 광주는 김춘호(金春浩), 삭녕은 연기호(延基浩:연기우 이명-필자 주), 파주는 이인순(李仁順:윤인순의 오기-필자 주), 평산은 이진룡, 연안은 심노술·이근수(李根洙) 등이 있었다. 그들의 수는 1천명 내지 1백명으로 수효가 같지 않고 혹은 10명도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살 수가 없었고, 일본인들도 매우 괴롭게 여겼다.
(황현, 『매천야록』 6권. 1908)
심노술 의진은 연안에서 이근수 의진과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근수는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온정원·연안·청단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연평도에 본거지를 두고 도서지방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해주수비대 공격으로 전사한 의병장이다.
일제의 귀순공작, 논리적으로 반박하다
심노술 의진이 황해도 평산군 도평산(桃坪山)에 본거지를 두고 맹렬하게 의병투쟁을 전개하자 일본군은 수비대와 헌병대를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를 거듭하였다. 마침내 해주경찰서장은 심노술 의병장에게 귀순 권유서를 발송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그는 논리적으로 반박하였다.
… 을미년의 변은 천고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받았고, 신조약(新條約:을사늑약-필자 주)의 체결에 이르러서는 간사함을 품고서 의사·충량을 죽이고, 철도 기타를 점령하고, 산림천택을 강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노예로 삼았다. 귀하의 이른바 보호라는 말은 참으로 이에 있는가? … 만약 그 성유(聖諭:융희황제의 의병해산 조칙-필자 주)와 같음이 원래부터 폐하의 마음이 아니라 만약 조약을 폐기하고 세계열강에 자주 독립을 선언한다면, 황제 폐하의 명령이 내리는 날 감격하여 즉시 덕화(德化:황제 폐하가 덕을 베풂-필자 주)의 말에 복종하였을 것이다. 불복종함에 있어서는 천토만벌(千討萬伐:수많은 의병 토벌-필자 주)을 당해 인류가 다함에 이르러도 나라를 위한 마음을 멸할 수 없을 것이다.
(후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145~146쪽)
강화도 지역에서 활약하다

노획한 적선에 승조하고 있던 뱃사공 2명을 취조한 바, 적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는 전 육군 기병(騎兵) 부교(副校)였던 경성 사람으로서 김봉기(金鳳基)라고 칭하며, 키가 작고 용모는 고상한 인물로서 부장(副將)은 풍덕군 거주 심노술(沈魯述), 1명은 주소 등 불명인 지(池:지홍윤-필자 주) 아무개라는 자로 적의 세력은 70~90명에 불과하나 전연 해적이 아닌 자로 진술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508쪽)
일제의 기록에는 심노술 의병장이 경기도 풍덕에 거주한 것으로 나와 있다. 풍덕은 경기도 개성·장단·통진을 이웃으로 한 군이었는데, 현재는 개성 일부와 합쳐 개풍군이 된 지역으로 1908년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임진강 유역과 강화도·교동도·장봉도 등 도서지방과 함께 의병들의 활약이 매우 많았던 지역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경기의병이 강화에 모이니, 무릇 7천 명이었는데, 왜병과 일진회원 피살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기록한 것처럼 그가 강화도를 비롯한 도서지역까지 진출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 전개 후 재거의
심노술 의병장은 박정빈 의진의 중대장으로 활약하였고, 박정빈 의병장이 1907년 겨울부터 이듬해 1월까지 13도창의대진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진동(鎭東:경기·황해) 의진의 아장(亞將)으로 활동하다가 교남(嶠南:영남)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한 후 황해도 지역으로 돌아와서 다시 의병을 모집, 의병투쟁을 준비하던 것이 『폭도에 관한 편책』(1908.10.21)을 번역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에 나타나 있다.
정보
폭도수괴(暴徒首魁:의병장-필자 주) 박정빈(朴正斌)
동 심노술(沈魯術)
위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 소식이 불명이었던 바, 지난 9일 황해도 배천군으로부터 상경한 한인 아무개의 말에 의하면, 지금 그들은 황해도 안악과 곡산군 지방 산중에 있으며, 서로 기맥을 통하고 각각 4, 5백 명의 무리를 모집하여 각처에 산재시키고, 가까운 날에 다시 활동하고자 하는 계획인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리들의 대부분은 원래 평양·강화도의 해산병으로 총기와 탄약은 모두 다수를 휴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240쪽)
심노술 의병장은 박정빈 의병장과 기맥을 통하고, 각각 4, 5백 명의 의병을 모아 각처에 분산 배치한 후 다시 의병투쟁을 벌일 계획이라는 정보이다. 박정빈 의병장이 스승 유인석 의병장을 따라 연해주 방면으로 떠나기 전의 모습이었다.
이듬해 활동에 대한 기록은 『통감부문서』 제6권 「폭도수령 심노술 경기도 교하 지방 출몰 건」(헌기 제591호. 1909.03.18)에 드러나고 있다.
정보
경기도 교하군(交河郡:현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교하읍·탄현면 일대-필자 주)에서 입경한 한국인의 말에 의하면, 폭도수령(暴徒首領:의병장-필자 주) 심노술은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이달 7일 한밤중에 교하군 북면 낙하진(落河津)을 도선(渡船)하여 배천군 방면으로 향했다고 한다. 또 이 일행 중에는 청국인 몇 명이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100여 명의 의진을 형성하여 경기도 교하군에서 배를 이용하여 황해도 배천군으로 이동했는데, 일행 중에 청국인 몇 명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당시 청국인을 용병으로 고용한 사례가 이인영(李麟榮) 의진에서도 있었다. 이인영 의병장은 농토를 매각하여 청국인 용병 300명을 의진에 투입해서 의병투쟁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청국인 용병들이 오는 도중에 일본군의 습격으로 일부가 사망하고 되돌아가는 바람에 가산만 탕진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청국 용병을 고용하기까지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임을 명약관화하다.
독자적인 의진 형성하여 명성 떨치다

해주 동부, 특히 연안·배천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 출몰 상황은 지난번 누차 보고한 바, 그 후 해주경찰서에서 그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 상황을 정찰한 결과, 최근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적도(賊徒:의병-필자 주)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및 총 인원수
주괴(主魁:중심 의병장-필자 주) 심노술인 바, 그 부하의 “지중대(池中隊)”이라 칭하는 지홍일(池洪一)(강화도로부터 도피하여 온 자)이란 자가 150여 명을 모아 그 지휘 아래에 삼삼오오 각 방면을 출몰하고 있었다. 기타 이근수(李根守)·지석남(池石南) 2명이 이끄는 각 수십 명의 집단이 있다. (후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62쪽)
이 보고서에는 심노술 의병장을 ‘주괴(主魁)’로 칭할 만큼 그 영향력은 컸고, 지홍윤 의병장이 심노술 의진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어진 보고서에는 의병의 근거지로 경기도 강화도와 황해도 평산군 도평(桃坪)이라 했으며, 의병들은 이합집산이 비상하여 황해도 배천군 화산·상금산·하금산·운산 등지로부터 경기도 각지로 나아갔고, 황해도 연안군 탁영대 방면으로부터 해주군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의병투쟁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에 1909년 1월 16일 연안수비대가 해주군 청단 부근에서 약 100명의 의병과 전투를 벌였는데, 의병들은 해안 방면으로 후퇴하자 해주수비대는 기선으로 연안과 연평도 부근으로 향하고, 해주경찰서에도 일·한 순사 5명을 파견하고, 수비병 10명, 헌병 3명에 합하여 1월 16일 오후 12시경, 용당포(龍塘浦)로부터 배를 타고 정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심노술 의병장의 출생지에 대한 것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다양하지만 『통감부문서』 제6권 「폭도 수령에 대한 조서 보고 건」(1909.03.12)에는 황해도 연안군 방동면(方洞面)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 나온 경기도 강화와 황해도 연안·평산·해주 등지에서 활동한 주요 의병장에 대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출신 성명 출생지 부하원수(어림수) 적요(횡행지방)
불명 지홍률 불명 · 강화도·연안군·
배천군
(개성경찰서에서 체포)
동 이진룡 평산군 100 평산
동 우중렬 평산군 마산면 50 동
엽부 심노술 연안군 방동면 200 평산·재령·해주
이 문건에서 심노술의 신분을 ‘엽부(獵夫)’(포수)라고 하였으나 주요 의병장의 신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보고서이라서 신뢰하기 어렵다. 1909년 3월에 200명으로 구성된 의진을 이끌었으니, 비교적 대규모 의진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으며, ‘지홍률(池弘律)’은 지홍윤(池弘允) 의병장의 이명으로 강화도 출신이었다.
1908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의병진압을 위한 일제의 총공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2년여 동안 의병을 후원한 민중들도 힘겨운 나날이었다. 의병들에게 식사, 옷, 짚신 등을 제공한 마을의 주요 인물을 처단하고, 연대책임을 물어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의병활동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융희 원년 폭도(暴徒:의병-필자 주) 봉기 이래 황해도내 각지를 배회하며 다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위대한 세력을 떨치며 횡포를 마음대로 부리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심노술은 그 후 토벌대의 수색이 엄밀해짐에 이르자 마침내 도내에 잠복할 수 없게 되어 지난해 3월경, 만주 안동현을 거쳐 만주 지방으로 도주했다는 풍평(風評)이 있었는데, 이번에 재령경찰서에서 파견한 토벌대에 의해 해주군 대덕면내를 수색 중, 심노술은 1명의 동행자를 데리고 평산 지방으로 비밀리 온 것 같다.
그는 통상 한인이 입는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양반용의 갓(상품의 검은 갓)을 쓰고, 등에는 괴나리봇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고서 3월 7일 오후 8시경, 대덕면 아현동 귀순자인 조대순(趙大順)의 집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조대순으로 하여금 국전동(菊田洞. 지관식池寬植이 살육당한 마을) 부근까지 길 안내를 하게 하더니, 서쪽을 향해 떠났다는 것을 탐지하고, 수색대는 즉시 그 귀순자에게 대해 힐문(詰問)하자, 사실이 틀림없다고 대답하므로 어떻게 하여 심노술임을 알 수 있었냐고 추궁하자, 길 안내 후 이별에 즈음하여 내가 심노술이라고 인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서방 고산면 지방에 대해 엄중한 정찰을 했지만 끝내는 행방불명이라고 하므로 즉시 관하 각 경찰서 및 헌병 분견소에도 통지하여 목하 엄중 수배 중에 있으므로 이에 보고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권. 534쪽)

일제는 1908년부터 융희황제의 의병해산 조칙과 함께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이를 물리쳤던 심노술 의병장.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심노술 의병장에 대하여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공훈록에는 ‘그는 중국 요동으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재조직,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분사(憤死)하였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