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2020/11] 유도발 · 유신영 선생 부자(父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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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이어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부자 독립운동가
후대 독립항쟁 위해 나를 버린 큰 울림
글 | 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유도발(1832. 6.~1910. 10) · 유신영(1853. 6~1919. 3) 선생 부자를 2020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부친 유도발은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을 차마 살아갈 수 없다며 1910년 11월 11일 단식에 돌입하였으며, 단식 17일째 유도발은 향탕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맞이했다. 아들 유신영은 선대의 가업을 철저히 익히고, 항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학문과 사상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두 차례 의병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1월 광무황제(고종)가 서거한 이우 친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투쟁방법은 죽음뿐이라며 1919년 3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두 분 부자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유도발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신영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안동 출신의 유림 유도발·유신영 부자는 세 가지 투쟁방법 가운데 자결을 선택했다. 아버지 유도발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1910년 11월 17일 단식하여 순절했다. 아들 유신영은 광무황제 고종이 서거하자 지인들에게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면서 나라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신념으로 1919년 3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순절했다.
충효의 가문에서 태어나다
유도발(柳道發)과 유신영(柳臣榮)은 부자관계로 풍산(豊山)을 본관으로 하는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10세, 11세 후손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로 영남학맥을 이었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힘써 마땅히 삼갈지어다. 충효(忠孝)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충’과 ‘효’를 가문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유성룡 이후 풍산 유씨(柳氏) 가문은 충효를 가업(家業)으로 삼았다. 유성룡의 장손 유원지(柳元之)는 후손들에게 “우리 집안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충효청백(忠孝淸白)만 있을 뿐이다”라고 하여 할아버지 유성룡의 유지를 전했다. 또 “졸(拙)하면 분수에 편안하고 만족할 줄 알게 되어 재주와 임기응변 같은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성(誠)하면 자연스럽게 실제에 힘쓰게 되어 꾸밈에 힘쓰거나 스스로 속이는 병에 빠지지 않게 된다”고 하면서 ‘졸성’(拙誠)을 가학(家學)으로 제시하였다. 졸성은 사전적 의미로 ‘보잘 것 없는 정성’이라는 뜻인데, 유원지가 제시한 졸성의 뜻은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하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후 풍산 유씨 가문의 가업과 가학은 유의하(柳宜河), 유후장(柳後章), 유성화(柳聖和), 유규(柳氵奎 ), 유종춘(柳宗春), 유상조(柳相祚), 유이좌(柳台佐), 유심춘(柳尋春), 유후조(柳厚祚), 유주목(柳疇睦) 등 후손을 통해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대를 거듭하여도 ‘충효졸성’의 가치는 변함없었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18세기 후반 유상조와 유이좌가 관직에 등용되면서 가문이 부흥기를 맞이했을 때 유종춘은,
충효는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이고 졸성은 우리 집안의 가학이니 잃을 수 없다. 충효는 원래 이치가 없고 졸성은 어느 곳이든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 진실로 이것을 힘써 생각하고 힘써 행하는 것, 이것이 조정에 임할 때나 집에서 있을 때 지켜야 할 네 글자 증표이다.
라고 하여, 충효를 가업으로, 졸성을 가학으로 표명하면서 공직에 임하는 자손들이 충효졸성을 상기하여 어느 곳에서나 성심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렇게 충효졸성을 중시하던 풍산 유씨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유도발과 유신영은 선대의 가업과 가학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에게 충효는 20세 초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응하는 가치관으로 작용하였고, 졸성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심사숙고하여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로 나타났다.
▪ 유도발의 학문과 사상

유도발 집안은 유성룡의 아들 유단(柳褍) 이후 자손이 없어 줄곧 양자로 이어졌다. 유단은 형제 유진(柳袗)의 둘째 아들 유백지(柳百之)를 양자로 삼았고, 그 후 유후승(柳後升), 유성흠(柳聖欽), 유익(柳瀷), 유필조(柳必祚), 유진휘 등 선대가 양자로 대를 이었다. 그만큼 그는 집안에서 매우 귀한 자손이었다. 큰아버지 유진황(柳進璜)과 작은아버지 유진우(柳進瑀) 등 집안의 어른들은 ‘우리 가문을 번창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다’라고 하면서 유도발을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학연관계는 유주목(1812~1872)의 학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황-유성룡-정경세(鄭經世) -유진-유세명(柳世鳴)-유후장-박손경(朴遜敬)-정종로(鄭宗魯)-유심춘-유후조-유주목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서애학맥을 연원으로 한다. 유주목은 유심춘의 손자이자 유후조의 아들로 당대 영남지역에서 탁월한 학자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소모사(召募使) 정윤우(鄭允愚)의 추천에 의해 의장(義將)으로 참전하고, 1872년에는『의상육조소(擬上六條疏)』라는 상소를 통해 외세에 대비한 대책을 제시하는 등 척사적(斥邪的) 성향을 보였다.
유도발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유주목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학문에 대한 회의가 들 때 자신이 나아갈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기도 하고, 유림들이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모일 때 강회하는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또 유도헌(柳道憲), 유도직(柳道直), 유도구(柳道龜) 등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인사들이 모두 유주목의 제자였다. 따라서 유도발은 이들과 함께 유주목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 문하에서 공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학문적 영향으로 유도발은「학요설(學要設)」이라는 글에서,
심(心)은 한 몸을 지배하는 것으로 본성을 이끌고, 이기(理氣)를 갖추어 덕행을 담고, 일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귀와 눈, 코, 입 그리고 손과 발의 움직임이 모두 심의 명령을 듣는다.
비유하자면 집안에 가장이 있은 뒤에야 백가지 일에 대응할 수 있고, 나라에 임금이 있은 후에야 세계의 통솔을 주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현(聖賢)의 여러 가르침을 모두 심 한 글자로 설명할 수 있으니 (중략) 성(誠)과 경(敬)은 이에 심을 기르는 단 한 가지 방법이다. 옛 사람의 공부가 모두 이 심에서 말미암는데, 성학의 도(道)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라고 하면서 ‘심’ 즉, 마음 다스림을 공부의 가장 기본으로 삼고, 성심과 공경의 자세로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 여기에서 ‘성경(誠敬)’은 선대 유원지가 강조한 졸성과 같은 뜻으로 유도발의 학문과 사상이 가업과 가학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무편사론(時務便私論)」에서는 개항과 개화의 사회변화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 이 글에서 그는 아무 대책 없이 문호를 개방한다면 일본의 노예나 포로가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다른 국가와 교류의 방법을 찾을 것, 대내적으로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재정 확충 및 자강 대책을 수립할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옛 것에 얽매이는 습관을 버리고, 각자가 나라의 일을 스스로 맡아 힘과 정성을 다해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임박하던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단결하고 자강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유도발이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충(忠)은 그의 일상에서 효(孝)의 형태로 실천되었다. 그의 행적을 기록한『회은유고(晦隱遺稿)』의「가장(家狀)」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일화는 부모에 대한 내용이다.
1864년 어머니 안동 김씨의 몸에 큰 종기가 생기자 유도발은 여러 달 그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면서 극진히 간호하여 어머니의 병을 완치시켰다. 또 아버지 유진휘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집안의 경제적 사정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서울로 올라가 음식을 조달하였고, 1877년 아버지가 송화군수로 재직할 때 바쁜 업무로 지치자 그 옆에서 공무를 돕기도 했다. 1881년에는 아버지가 고원군수로 재직하던 중 병마에 시달리자 모든 일을 뿌리치고 달려가 9개월 간 극진히 간호하였고, 끝내 별세하자 400여 km의 먼 길에도 시신을 모시고 와 고향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와 같이 평소 부모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한 그의 삶은 충효를 실천해 가는 과정이었다. 부모에게 성심을 다하는 ‘효’가 그에게 있어서는 국가에 의리를 다하는 ‘충’이었다.
이러한 충효사상은 외세의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1895년 일본의 영향으로 복식을 간소하게 바꾸는 변복령(變服令)이 발표되었다. 전통복식인 한복을 버리고 서양식 옷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변화를 거부하고 고향을 떠나 경상북도 의성군 신평면 덕암리(新平面 德巖里) 문봉산(聞鳳山)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스스로 숨어 지내겠다는 뜻으로 ‘회은(晦隱)’이라고 호를 지었다. 조선의 사회질서가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고, 나라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숨긴 것이다.
경술국치에 죽음으로 맞서다

이때 유도발은 이미 자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는 유도필에게 “내 나이 80세에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되게 되었으니 그 욕됨이 심하다. 하물며 나라의 신하(유성룡)된 후손임에 있어서랴”라고 하면서 통탄했다. 유성룡의 후손으로서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을 차마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죽음으로써 경술국치에 맞서기로 결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드디어 유도발은 1910년 11월 11일 일체의 물과 음식을 끊고 단식에 돌입했다. 그는 “종사가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백성이 되겠으니 남은 해가 얼마 없는데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욕된 일이 아닌가? 이후로는 다시 음식을 나에게 권하지 말라”는 유서와 함께 명정(銘旌)에 ‘대한처사(大韓處士)’로 써 줄 것을 부탁했다. 명정은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이름을 적은 기(旗)로, 유도발이 대한처사로 써 달라고 한 것은 죽어서도 영원히 대한제국의 선비임을 천명한 것이다.
아들 유신영이 눈물로 만류했으나 유도발은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는 길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11월 12일「자탄(自歎)」이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결단이 늦었음을 한탄했다.
태어나 재주와 지혜 없음이 나만한 이 없는데
차마 우리나라의 옛 모습과 다름을 볼 수 있겠는가
풍하(楓霞)의 이령(二令)이 나보다 앞서 서거하셨으니
같은 때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이 시에서 ‘풍하’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楓井里) 출신의 이면주(李冕宙, 호 하계 霞溪)를 지칭한다. 이면주는 예안 의병장 이만도(李晩燾, 호 향산 響山)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1910년 10월 10일 자결한 인물이다. 즉 한달 여 전 이면주가 자결했을 때 같이 죽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할 만큼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들 유신영에게는,
우리가 할아버지(유성룡)의 후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세 고을의 녹을 먹었으니 어찌 관직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10세를 이어온 것이 충효대절(忠孝大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아침에 죽을지 저녁에 죽을지 모르는 날을 당해 구차하게 살기를 구하는 것 또한 비루하지 않는가. 의리상 그 곡식을 먹지 못하겠다.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더 이상 긴 말을 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강제병합을 당했으니 충효의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다고 했다.
단식을 시작한지 15일째인 11월 25일 일본인 관리가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찾아왔다. 일제는 유도발의 죽음이 지역사회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단식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도발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를 어찌 상대하겠는가? 울분을 이기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일본인 관리를 만나지 않은 채 단식을 계속해 나갔다.
1910년 11월 27일 단식 17일째, 오후 5~7시 경 유도발은 자식들에게 향탕(香湯)을 가져오라고 했다. 향탕은 향을 넣어 끓인 물로 시신을 씻을 때 사용한다. ‘향탕을 가져오라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은 차마 올리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러한 망극한 상황을 당해서는 순응하여 따를 뿐이니 속히 향탕을 가져오라”고 다그쳤다.
결국 유도발은 향탕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맞이했다. 대한의 선비로서의 삶이 죽음을 통해 영원히 계속되는 순간이었다.
유도발이 순절하자 전국 각지에서 그를 애도하였고, 혹 하루이틀간 단식하며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李中業)은 제문(祭文)을 지어 ‘그의 죽음은 의(義)를 실천한 것이고, 모든 사람이 선생의 마음을 가지고 실천한다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유도발의 죽음을 ‘의’의 실천이자 독립을 향해 가는 시발점으로 평가하였다.
가문의 가업과 가학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실천해 온 유도발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죽음으로써 충효졸성의 가치를 완성했다. 그 죽음은 일제의 강제병합에 대한 강력한 항거이자, 사람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우는 울림이었다.
그는 해방 후 전라북도 진안군에 위치한 대한이산묘(大韓駬山廟)에 배향되어 항일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이산묘는 유림들이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1925년 건립한 사우(祠宇)로 을사늑약 이후 순국한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안중근(安重根),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등 독립운동가 34인이 배향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도발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유신영의 삶과 투쟁
유신영(1853. 6. 17, 음력~1919. 3. 3, 양력)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마을에서 아버지 유도발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은(霞隱), 석간(石竿)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의지가 굳세고 강직하며 영리했다고 전해진다.
7세부터 수학하였는데 큰 할아버지 유진황이 집안의 교육을 맡았고, 작은 할아버지 유진우가 서당 훈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이 영향으로 유신영은 평소 “사람이 충효의 마음이 없으면 집에 있어서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자식이 되고, 나라에 있어서는 임금을 반역하는 신하가 된다”, “사람이 불의(不義)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면서 가문의 가업인 충효와 아버지가 죽음으로 실천한 의리를 가장 중요한 신념으로 삼았다. 그 역시 선대의 가업과 가학을 철저히 익혔던 것이다.
이어 유도성(柳道性, 1823~1906)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과 사상을 익혔다. 유도성은 아버지 유도발과 긴밀하게 지내던 사이로, 풍산 유씨 가문의 가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특히 1896년 안동지역 유림 대표들과 의병 거의를 논의해 권세연(權世淵)을 1차 안동의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2차 안동의진에서도 김도화(金道和)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승관계 뿐만 아니라 교유관계에서도 유신영의 사상적 성향을 볼 수 있다. 김명한(金明漢), 권준희(權準羲), 오석도(吳錫燾), 강낙형(姜樂馨), 이만호(李晩護), 이중기(李中虁), 이인선(李仁善) 등 여러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사상을 넓혀 나갔는데, 함께 시를 지어 주고받거나 서로를 격려하면서 항일 의지를 다졌다. 이들 가운데 몇몇 인사는 적극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권준희(1849~1936)는 외사촌 형으로, 1913년 조직된 풍기광복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고, 1918년 광복회의 고문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유신영은 권준희와 책상을 같이 쓰며 함께 공부했다. 오석도는 유신영이 속리산에 은거할 때 친하게 지내면서 뜻을 같이하고 따랐던 인물이다. 그 인연으로 유신영의 자결 순절 후 시신을 수습하고 행장(行狀)을 기록하였다. 이인선은 1919년 광무황제의 서거 소식을 유신영에게 전하고 망국의 한을 함께 나누었던 인물이다. 유신영은 이인선에게 “의친왕(義親王)을 모시고 상해(上海)로 가서 우리나라의 여러 사람과 함께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계획을 하라”고 하면서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라고 했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유신영과 항일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었다.
이렇게 유신영은 선대의 가업을 철저히 익히고, 항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학문과 사상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두 차례 의병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그의 항일투쟁은 『하은유고(霞隱遺稿)』의 「행장」을 통해 확인되는데, 1895년 유인석 의진과 1896년 권세연 의진에 참여한 기록이 보인다.
1895년 유인석(柳麟錫) 의진의 호서소모장(湖西召募將) 서상렬(徐相烈)이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 안동에 도착하자 스승 유도성이 유신영을 추천하였다. 이에 유신영은 서상렬과 만나 협의하여 제천의 유인석 의병부대에 참여해 군사 전략을 자문했다. 1896년에는 안동의 권세연 의진에 참모로 초빙되어 군사훈련 및 군량 운반 등 전략과 전술을 자문했다. 이러한 유신영의 의병 참여 기록은 『하은유고』외 다른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스승 유도성이 안동지역 의병 거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과 행장을 집필한 오석도가 평소 유신영과 밀접하게 지내면서 기록했다는 점으로 볼 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두 차례 의병 참여 후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안동에서 경상북도 의성군 덕암리로 터전을 옮겼다. 급변하는 사회에 흔들리지 않고 대한제국의 선비로서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곳에서도 의성지역 의병장이 초빙하는 등 주변에서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만큼 유신영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입지와 영향력이 있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아버지 유도발이 단식을 결행하면서 죽음으로 맞섰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죽음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유신영은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막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단식을 결행한 지 17일째인 1910년 11월 27일 순절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유신영에게 큰 충격이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울부짖으며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결국 따라 죽고자 했다. 그러나 “상황(上皇)이 위에 계신데 어찌 기다림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국왕의 존재에 독립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을 잠시 미루었다. 광무황제가 반드시 국권을 되찾을 것이고 이때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신영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일상적인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에 3년 상을 마친 1912년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천왕봉(天王峯) 아랫마을 삼가리(三街里)로 이주했다. 이때 호를 ‘하은(霞隱)’이라고 지었다. 속리산을 일명 광하산(廣霞山)이라고 하는데, 광하산을 의미하는 ‘霞’자와 은거한다는 뜻의 ‘隱’자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아버지가 거처를 옮겼던 것과 같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타협하지 않고 나라에 대한 의리를 수호하는 한편, 몸과 마음을 바르게 처신하기 위해 자신을 숨긴 것이다.
이후에도 거처를 두 번 더 옮겼다. 1915년 겨울 보은군 장안면 구병산(九屛山) 아래 봉비리(鳳飛里)로, 마지막에는 인근의 장안면 불목리(佛目里)로 이주했다. 집을 자주 옮긴 것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아버지 유도발이 단식할 때 지방 관리까지 파견해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한 후 늘 그의 집안을 예의 주시하였다.
실제로 경찰에 연행된 일도 있었다. 일제 경찰이 1918년 2월 11일 오전 그의 집에 들이닥쳐 문서들을 압수하고, 다음날 유신영과 아들 유종묵(柳宗黙)을 체포하였다. 일제는 문서를 모두 조사한 후 이틀 뒤에야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조사 이유는 유신영의 집안이 대대로 충효를 숭상하고 아직도 옛 법도를 지키면서 식민지 정책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입장에서 유신영은 항일적 성향을 지닌 인사였기 때문에 식민지 사회에서 철저히 차단해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유신영은 은거하면서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용(中庸)』을 자주 읽으며,
일찍이 인(仁)하고 그 어버이를 버리는 사람이 없으며, 의(義)하고 그 임금을 뒤로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임금과 어버이의 큰 절개에 털끝만큼이라도 직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여 인의(仁義)로써 부모에게 효하고 국가에 충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유도발이 충효졸성에 철저했던 것 만큼 유신영 역시 선대의 학문과 사상에 충실했다. 또 제갈량(諸葛亮)의「출사표(出師表)」를 자주 큰소리로 읽었다고 한다.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펼치고 싶은 심정을「출사표」 낭독으로 대신 표출한 것 같다.
광무황제 서거에 죽음으로 항거하다

광무황제의 서거 소식은 유신영이 자결을 실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인선에게 “나는 나이가 많아 일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마땅히 목숨을 바쳐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투쟁방법은 죽음 뿐임을 다짐했다.
그런데 유신영이 죽음을 결심한 것은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1910년 11월이었다. 다만 국왕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국권을 회복할 때를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광무황제가 서거한 이상,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유서에서 “참고 견디며 오늘에 이른 것은 우리 임금께서 위에 계시어 혹 천일(天日)이 다시 밝아질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한 것처럼 국권회복을 도모할 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었으나 더 이상은 죽음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일을 자결 날짜로 정했다. 이것은 친구 나채정(羅采正)에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도 돌아가셨는데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계책이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편안합니다. 이에 인산하는 날을 길이 떠날 기일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스스로 아끼어 지키고 보호하시고, 때로 저의 외로운 아이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거두어 주신다면 또한 친구의 도리에 반드시 어여삐 여기고 미더운 것이 될 것입니다. 죽는 날이 절박하여 길게 쓰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죽는 날짜를 친구에게 알리고 아들을 부탁한다는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전했다. 권준희에게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연의 이치로 볼 때 다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순리인데, 현재로서는 나라도 없고 임금도 없으니 구차하게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가느니 죽음으로써 충효를 다하는 것이 옳은 처신”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국장(國葬)의 배종관(陪從官)을 맡은 이일선(李一善)에게도 이러한 자신의 뜻을 전했다. 이일선은 경상북도 예안 출신으로, 의병장 이명상(李明相)을 찾아가 항일투쟁을 전개하려다 발각되어 1909년 청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나채정, 권준희, 이일선 등 지인들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힌 것은 그의 자결이 일제에 대한 항거임을 표명하고, 자신의 죽음을 그들이 독립운동에 나서줄 것을 당부한 것이다. 이 점은 동생 유동준(柳東濬)에게 당부한 글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동생에게,
도성 안에는 평민들이 땅을 치고 하늘에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사람이 몇 만 명인지 알지 못하고, 상복을 입고 곡하는 사람 또한 얼마인지 알지 못하며, 상인들은 3일간 시장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고을의 한 평민촌에서도 부음을 들은 후 남녀노소가 종일 산에 올라가 임금을 향해 곡을 한다고 하니 인심이 가상하다.
편지를 본 후에 동지들과 함께 상의하여 병산(屛山)으로부터 동쪽으로 각 문중에 통문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일을 다해 대궐문 밖에서 나를 따라 준다면 다행일 것 같은데 어떻게 기약할 수 있겠는가? (중략)
상주군 우천(愚川) 마을에 사는 유건일(柳建一)에게도 이러한 뜻으로 편지를 보냈으니 이미 전달 되었을 것이다. 편지로는 말을 다할 수 없고 말로는 뜻을 다 표현할 수 없으니 다시 어찌 길게 늘어놓겠는가?
라고 하면서 신분이 낮은 일반 사람조차 광무황제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시장까지 열지 않는 마당에 유림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촉구했다. 자신이 죽음을 결행한 후, 풍산 유씨 문중부터 각 문중에 확대하여 동지들을 모아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를 호소한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독려했던 것이다.
결국 유신영은 1919년 3월 3일 저녁 7~9시 무렵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이어 일제에 투쟁하고, 남은 이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한 것이다.
유신영이 순절하자 경찰서에서 사인을 조사한다고 하여 9일이 지나도록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평소 친하게 지냈던 오석도와 이만호, 이중기가 시신을 수습했다. 심지어 3월 16일에는 일제 경찰이 아들 유종묵을 연행하는 바람에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은거하던 봉비리 집 뒤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일제는 유신영의 장례가 정상적으로 치러질 경우 전국의 항일 인사들이 결집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묘소는 1945년 해방 후 충청남도 대덕군 진잠면 방동리(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방동)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신영의 공훈을 기려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 상훈제도가 바뀌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유도발·유신영 부자의 학문과 사상은 풍산 유씨 가문의 가업과 가학인 충효졸성으로 집약된다. 충효는 국가에 대한 의리로, 졸성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로 나타났다. 이 신념으로 경술국치와 광무황제 고종의 서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아버지는 나라에 대해 의리를 실천했고 아들은 나라와 아버지에 대해 충효를 실천했다. 충효졸성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실천사상으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들의 자결 순절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선 항일투쟁의 일환이었다. 그 죽음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남은 이들의 항일정신을 일깨워 독립운동에 나서게 만드는 울림이었다.
유도발, 유신영은 대를 이어 죽음으로 일제에 맞서 항거한 대한의 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