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People

의병전쟁과 의병장 [2020/11] 연평도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 이근수

페이지 정보

본문

경기·황해 섬 일대 활약…30여 전투 무패 기록   

못 이룬 '조국 독립'의 꿈 안고 장엄한 최후


글 | 이태룡(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연평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을 구성하는 섬으로, 이곳 연해는 예로부터 조기가 많이 잡혀 파시(波市)로 유명했는데, 최근에는 연평해전으로 인해 널리 알려졌다. 평산의병장 이근수(李根秀)는 이곳에서 부하 50여 명과 함께 전사했다. 황현은 『매천야록』 제6권에서 이근수 의병장에 대해 ‘이진룡 의진의 부장(部將) 출신으로 정미년(1907)에 의병을 일으켜서 평산과 해주 사이를 왕래하며 정병 5백여 명이 있었고, 일병과 30여 회 싸워 일찍이 패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정예 병사(의병) 5백여 명을 이끌었다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정부에서는 이근수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연평도 역사


  연평도(延坪島)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을 구성하는 섬으로 북방한계선에 매우 가깝다. 인천시청에서 북서쪽으로 약 83.2㎞(뱃길 145km) 지점에 대연평도가 있고, 대연평도에서 남쪽으로 약 4.5㎞ 지점에 소연평도가 있다. 


연평도는 『고려사절요』 제6권 선종 10년(1093) 조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관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황해도 해주 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해주목에 속한 섬으로 나와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나라에서 군마(軍馬)를 기르는 목장이 있었음이 『조선왕조실록』에 드러나 있다.


연평도 연해는 예로부터 조기가 많이 잡혀 파시(波市)로 유명했는데, 최근에는 연평해전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섬이다. 그런데, 연평도 홈페이지에는 ‘충민사(忠愍祠)’ 사진과 함께 그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중기의 명장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청나라를 치기 위해 명나라로 가던 중 연평도에 들러 식수와 부식을 구하기 위해 가시나무를 무수히 꺾어다가 지금의 당섬(堂島) 남쪽 '안목'에 꽂아놓고 간조 때 이름 모를 물고기를 무수히 포획하였다.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이며, 그의 전설적인 지혜를 숭모하고, 임경업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사당 충민사를 지어 해마다 봄에 전주민이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풍어제)를 지내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이 친명배금 정책을 지향하자 1627년 1월 후금(청국 전신) 3만여 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공하고 3월에 강화를 한 것이 정묘호란이었다. 조선이 여전히 친명 색채를 이어가자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홍 타이지(청 태종)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청군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던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쳐들어와서 마침내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의 항복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청군은 서해의 가도(椵島)에 있는 명군을 치기 위해 조선군의 동원을 강요해 임경업 장군이 조정의 지시에 따라 출전하게 되었을 때 청군은 육로로, 조선군은 바다로 가기로 했는데, 매우 천천히 전장에 도착한 임경업 장군은 명군과 내통하여 싸우는 척만 하였다.


청국에서는 친명배청 사상의 핵심에 임경업 장군이 있다고 여겨 감언이설로 임경업 장군을 청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관리(칙사)를 보내서 그를 문초하려 했다. 이에 임경업 장군은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하다가 명나라가 망하기 전해인 1643년 5월, 비밀리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명나라로 향하였다.


임경업 장군은 명나라가 망하자 청국 관리에게 피체되어 조선으로 보내져 국문을 당할 때의 모습이 실록에 실려 있다.


  

▶ “경강(京江:한강-필자 주)에 이르러 배 한 척을 빌려 계미년(1643) 5월 26일에 마포에서 출발하여 해서(海西)를 통해 바다로 들어갔는데, 칼을 빼들고 뱃사람들을 협박하기를 ‘내가 바로 임 병사(林兵使)이다. 중원으로 가려 하는데 너희가 만일 따르지 않으면 이 칼로 결단을 내겠다.’ 하였더니, 모두가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에 녹도(鹿島)로 갔다가 이 해 가을에 해풍도(海豊島)로 옮겼으며 명나라 장수 진영에 구금되었다가 마침내는 중국 장수 황비(黃飛)·송길(宋吉)과 함께 군사를 내어 의주를 막아 끊을 방법을 모색하면서 대군(大君)을 우리나라로 귀환시킬 계책을 세우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 6월 17일)


여기서 말하는 ‘녹도(鹿島)’는 오늘날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있는 섬인데, 조선시대는 해서지방 어느 섬의 이름인지 알 수 없으나 ‘해풍도(海豊島)’는 중국 산둥반도 제남부(濟南府)에 있는 섬이다.

임경업 장군이 1643년 명나라로 향할 때 연평도에 들렀는지, 청국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명군을 치기 위해 임경업 장군이 수로를 통하여 전장으로 가면서 연평도에 들렀을 때의 일화였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 경기・황해도 섬 지역 의병활동


일제침략기 의병은 전기의병(1894~1896) 때는 주로 대도시 지역에서 활약했고, 후기의병(1904~1910) 때는 산야와 도서지방에서도 활동하였다.

경기・황해도 섬 지역의 의병투쟁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4월 이후인데, 당시에는 일제에 피체된 의병이 없어서 의병장이나 의진의 규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의병들이 처음에는 한두 척의 범선(帆船:돛단배)를 이용하다가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심지어 일본인 어선이나 어선 지도선을 빼앗아 활동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자 일본군사령부는 러일전쟁 때 사용했던 군함과 다수의 수뢰정을 동원하고, 현재 우리나라 해병대에 해당하는 육전대(陸戰隊)를 파견하여 의병 진압에 나서게 된 것은 그 해 8월 중순부터였음을 「일본 군함・수뢰정과 맞선 강화의병장 김용기」 편에 기술한 바 있다.

그리고 경기・황해도 해안지방에서 의병투쟁을 벌인 심노술(沈魯述)・지홍윤(池洪允) 의진에 대하여 연재한 바 있는데, 이때 이근수(李根守) 의진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 융희 2년 4,5월부터 7,8월에 걸쳐 황해도 평산군・배천군・연안군 및 강화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의 각지에 전전 횡행 약탈을 자행하고, 동년 9월 자칭 의병대장 김봉기(金鳳基:김용기金龍基의 이명-필자 주)와 서로 호응, 기맥을 통하고, 동(同) 돌격진(突擊陣) 부장(副將) 지홍일이라 자칭하고, 10월 중 강화군 간점면(艮岾面)에서 강화분견소 헌병 및 보조원의 한 부대와 접전, 3시간여에 이른 일이 있다. 그달 해주로부터 강화도에 와서 외가면(外可面) 삼거동(三巨洞)에서 일본인 고려자기 도굴범 6명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59쪽)


융희 2년(1908) 4,5월부터 7,8월에 걸쳐 황해도 평산군・배천군・연안군 및 강화군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지에서 김용기・지홍윤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이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심노술 의병장은 박정빈(朴正斌) 의진의 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지역에서, 김용기 의진의 부장(副將)으로 강화도에서도 의병투쟁을 펼쳤는데, 그 해 11월 초순 김용기 의병장이 무기구입을 위해 서울에 잠입했다가 피체되자 심노술 의병장이 독자적인 의진을 형성하여 크게 활동하였다. 그는 강화도 출신 지홍윤 의진은 물론, 박정빈 의진의 대대장 이진룡(李鎭龍) 휘하의 여러 의진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이 황해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폭도 정찰 상황의 건」(1909.01.18)에 나타나 있다.

 

▶ 해주 동부, 특히 연안・배천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 출몰 상황은 지난번 누차 보고한 바, 그 후 해주경찰서에서 그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 상황을 정찰한 결과, 최근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적도(賊徒:의병-필자 주)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및  총 인원수

주괴(主魁:중심 의병장-필자 주) 심노술인 바, 그 부하의 “지중대(池中隊)”이라 칭하는 지홍일(池洪一)(강화도로부터 도피하여 온 자)이란 자가 150여 명을 모아 그 지휘 아래에 삼삼오오 각 방면을 출몰하고 있었다. 기타 이근수(李根守)・지석남(池石南) 2명이 이끄는 각 수십 명의 집단이 있다. (후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62쪽)


이 보고서에서 황해도 해안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심노술 의병장을 ‘주괴(主魁)’로 칭할 만큼 그 영향력은 컸고, 지홍윤 의병장이 그의 의진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한 것과 이근수(李根守)・지석남(池石南) 의병장이 각 수십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있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08년 봄부터 여름까지 황해도 해안과 경기도 도서지방에는 김용기・심노술・이근수・지홍윤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의 활약이 매우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신비의 인물 이근수 의병장 


 ▶ 평산의병장 이근수(李根秀)가 해주 연평도에서 전사했으며, 부하 50여 명도 모두 전사했다. 일병 전사자도 또한 20여 명이었다. 이근수는 정미년(1907)에 의병을 일으키면서부터 평산과 해주 사이를 왕래하며 정병 5백여 명이 있었으며, 일병과 30여 회 싸워 일찍이 패하지 않았으나 연말에 병대(兵隊) 해체하고 단지 60여 명을 인솔하고 연평도에 들어가 해를 보내고자 했다. 일병은 그를 감시하면서 상황을 파악한 후 먼저 들어가 매복하고 있었다. 결국 이근수는 그들의 꾀에 빠져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황현 저/김준 역, 『매천야록』 제6권. 825~826쪽)


이근수 의병장은 한자 이름부터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매천야록』에는 ‘李根秀’로 기록했고,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에도 ‘이근수(李根秀, 미상~1909)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으로 1907년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이진룡(李鎭龍) 의진에 소속되어 부장(部將)으로 활약하였고, 이명은 없다.’고 기록하였다.


을사늑약 직전 장례원경을 지낸 종1품 이근수(李根秀)와 동일인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일제의 의병학살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32차례 모두 ‘李根守’로 나와 있다. 게다가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본적・주소를 모두 황해도 평산이라고 했으나 일본군 북부관구사령부에서 작성한 이른바 「폭도수괴명부(暴徒首魁名簿)」에는 그가 황해도 연안군 방동면(方東面) 출신으로 나와 있다.


이근수 의병장이 연평도에서 전사한 후 일제에 의해 그곳에 매장됐다가 훗날 그의 형이 ‘연안군 거래포 현암동(玄岩洞)에 개장(改葬)’한 기록으로 보아 그의 고향은 황해도 연안이 아닐까 하고 추정해 본다. 


◆ 이진룡 의진에서 시작한 의병투쟁


  황현은 『매천야록』 제6권에서 이근수 의병장은 ‘이진룡 의진의 부장(部將) 출신으로 정미년(1907)에 의병을 일으켜서 평산과 해주 사이를 왕래하며 정병 5백여 명이 있었고, 일병과 30여 회 싸워 일찍이 패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특히 정예 병사(의병) 5백여 명을 이끌었다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이근수 의병장이 부장으로 활약한 이진룡 의진의 출발은 평산의진에서 나온 것이었다. 1907년 8월, 광무황제가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거의하라’는 광무황제의 밀지가 청주・목천 군수를 역임한 정3품 박정빈(朴正斌)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평산과 해주 등지의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모여 기병을 논의하여 박정빈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격문을 돌리자, 4천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어 대규모 의진을 구성했는데, 일반적으로 평산의진이라고 하지만 황해도 중남부 지역의 의병으로 구성된 의진이었다. 박정빈을 비롯하여 전 해주・순천 군수 정3품 정인국(鄭寅國), 전 영월・김화 군수 정3품 이창하(李昌夏), 전 육군 참위 정3품 김창호(金昌浩), 전 내부기수 정3품 신창균(申昌均), 전 중추원의관 이진룡 등 일제침략기 전・후기 의병사에 전무후무할 정도의 전직 고관들이 대거 참여한 평산의진에서 이진룡 의병장은 유격장・선봉장・대대장을 맡았고, 이근수 의병장은 주요 직책을 맡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박정빈 의병장과 호응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것도 드러나고 있다.


평산의진의 총대장 박정빈 의병장은 그 해 11월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전개되었던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여 신돌석(申乭石) 의병장 뒤를 이어 교남(영남) 창의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7월 유인석 의병장과 함께 연해주로 향하게 되자 평산의진은 이진룡 의병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이근수 의병장은 이진룡 의진의 부장(部將)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나아가 독립의진을 이끌면서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 황해도 해안과 섬 지역에서 활동


이근수 의병장의 활약상이 일제의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08년 9월이었음이 일본인 황해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황경수(黃警收) 제66호」(1908. 09. 22)에 보인다.


▶ 황해도 해주군 화양면(花陽面) 6리 

농업 이만경(李萬京) 31세 


우자(右者)는 본년 7월 해주경찰서에서 귀순을 허가하고 면죄문빙(免罪文憑)을 교부한 자이었던 바, 본월 14일 오후 1시 30분 폭도수괴(暴徒首魁:의병장-필자 주) 이근수(李根守)가 인솔하는 부하 30명에게 납거되어 해주군 화양면 천중(川中)에 총살당하고 있었음을 발견한 것을 해주경찰서장으로부터 보고가 있었으므로 이에 회보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72~73쪽)


이근수 의병장이 의진 30여 명을 이끌고 귀순한 의병을 처단한 보고서다.

일제와 그들 앞잡이 내각은 의병해산을 위해 군수와 수비대장, 경찰서장 등으로 하여금 감언이설로 ‘귀순하면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을 선전하는 바람에 많은 의병들이 관청에서 마련한 자리에 나아가 융희황제께서 내렸다는 하사주(下賜酒) 한 잔을 마시고, 의병활동의 죄를 면제해주는 이른바 면죄문빙(免罪文憑)이라는 종이를 받고는 의병활동을 그만두거나 의병학살에 나선 일본군・헌병・경찰에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 의진에서는 의병들의 동요를 막고, 의병에 참여한 자들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염려하여 귀순한 의병을 처단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해 10월 이후 이근수 의병장은 이진룡 의진은 물론, 강춘삼(姜春三)・김용기(金龍基)・심노술(沈魯述)・연기우(延起羽)・지홍윤(池洪允)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과 서로 호응하여 의병투쟁을 펼쳐나갔다.


▶ 평산관구

전기에 비하여 적도(賊徒:의병-필자 주)의 출몰이 증가하고 점차 불온의 경향을 나타냈다. 엄밀 정찰 중,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이진룡(李鎭龍)은 7,80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평산군 멸악산(滅惡山)을 중심으로 야음을 타서 부근의 부락을 배회하고 있다.

연안지방은 작금(昨今) 한층 불온하여 수십 명의 적도가 누차 출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적괴 심노술(沈魯述)・이근수(李根守) 등의 부하 이외에 또 소수괴(小首魁:규모가 작은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필자 주)가 인솔하는 적 다수가 침입하여 바다와 육지 공히 교묘히 우리 시선 외에서 행동하고 있다. 금천군 수룡산(水龍山:금천을 거한 동북방 약 50리 수룡산은 금천・개성・장단・연천・삭녕・토산에 과한 고산이다)에 적괴 연기호(延基浩:연기우延起羽-필자 주)가 인솔하는 약 1천명의 적이 침입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으나 믿기 어렵다. 

▶ 마산관구

전기에 비하여 대차 없다. 그러나 해주 동쪽은 심노술(沈魯述)・강춘삼(姜春三)・이근수(李根守)의 무리가 출몰하여 인심이 불안한 상태에 있다. 해주 서쪽은 소수괴 조명서(趙命瑞)의 일파 10여 명이 배회하는 데 불과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339~341쪽)


일제의 기록에는 이근수・지홍윤 의진이 황해도 해안지방인 배천・연안・평산 지역과 강화도・교동도 등 섬 지역에서 맹활약을 벌여도 소수의 일본 군경으로 대적하기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들 의진의 보유한 100여 정의 「모젤」 총, 촌전식 총은 여느 의병들이 소지하고 있는 화승총에 비해 매우 정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 5시간 격전의 연평도전투


일본군은 이근수・지홍윤 의진을 진압하기 위해 황해도 해안지방의 수비대로 하여금 변장대와 밀정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정찰활동을 벌이면서 추적에 나섰다.


▶ 12월 28일, 장교 이하 12명에게 주재소 일・한 순사 4명을 함께 보내 밀정을 풀어놓고, 변장 후, 그 수괴라고 지목되는 지홍일(池洪一:지홍윤池洪允-필자 주)・이근수(李根守)의 소재 정찰을 위해 향하였던 바, 양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가 일단(一團)이 되어 부하 150여 명을 인솔하고, 며칠 전부터 평산・금천・배천을 횡행, 도처에서 금품을 강청하고, 식사를 하고 간 흔적이 있었으므로 각자 수배하여 그 행로를 추적한 결과, 배천군 화산면 목장동(木場洞)에서 재빨리 우리 정찰대가 옴을 깨닫고 삼삼오오 나누어 드디어 그 종적을 감추었으나 수괴들은 아직 부근에 잠복하고 있는 흔적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59쪽)


일본군은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이 심노술・이근수・지홍윤 등이라는 것을 파악한 후 황주・연안・해주수비대가 협공을 하고, 해주경찰서는 헌병과 순사를 파견하여 1909년 1월 16일 마침내 해주 용당포(龍塘浦)로부터 배를 타고 연안과 연평도 정찰을 하였다.

1월 18일, 일본군의 추격에 이근수・지홍윤 두 의진은 연안에서 두 척에 배를 이용하여 이튿날 새벽 1시경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하루 전에 도착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상륙하는 이근수 의진에 사격을 가하였다.


▶ … 16일 오후 12시 용당포(龍塘浦)를 출항하여 우선 연안 연안을 우회하여 동 18일 이른 아침 연평도 부근에 이를 영격(迎擊)하도록 동도 이면으로부터 상륙하여 동남의 구상(丘上)에 보초를 펴고 전망하고 있었던 바, 다음날인 19일 오전 밤 1시경 동도 북방 연안에 괴이한 어선 2척이 내도(來到)함을 보고 주시하였던 바, 모두 카키색의 복장을 한 자 수십 명이 분승을 하고 총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까지 판명하기에 이르렀다. 일동은 서로 경계하고 적의 상륙을 기다려 돌격코자 잠복하고 있었던 바, 적도 충분한 주의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북방의 산악에 전망을 펴고 암벽의 사이에 산개하였다. 시기가 이미 익었다. 일행은 부대를 이분하여 협격하도록 준비하자 일제히 전진 돌격을 가하였던 바, 저들은 이미 동도 산악의 지형을 실지(悉知)한 것으로 교묘히 암애(岩崖)를 이용하여 완강한 저항을 하고 겸하여 그 총기의 예리함과 탄착점의 적확함에 그 세를 얕보기 어려워 산악절벽을 악전고투 약 5시간의 영섭(永涉) 드디어 수괴 이근수 이하 46명을 죽이고 거의 적을 전멸시킨 것은 실로 근래에 있어서의 장쾌한 거사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64~166쪽)


이 전투에서 지홍윤 의진은 한 척의 배로 탈출을 하였으나 이근수 의병장을 비롯하여 46명은 5시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전사 순국하기에 이르렀고, 그 시신은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2월 8일 이근수 형 등 친척이 30여 구의 시신을 발굴, 육지로 운반하여 다시 장례를 치렀는데, 이근수 의병장은 연안군 거래포 현암동(玄岩洞)에 안장되었다.


  ▶ 지난번 연평도에서 우리 토벌대에 의하여 전멸한 폭도수괴(暴徒首魁:의병장-필자 주) 이근수(李根守) 이하 30여 명의 사체는 연평도 사람들이 가매장하여 둔 바, 지난 달 8일 폭도(暴徒:의병-필자 주)들의 친족 등 4명이 연평도에 와서 이장에게 교섭 후 섬사람들로부터 사체 전부를 발굴하여 어선으로 맞은편 해안인 연안군 거래포(去來浦)에 묻었다고 하는 것을 해주경찰서에서 이를 듣고 취조한 바, 우 폭도 등은 모두 해주 동부의 연안・평산 지방의 사람들로서 수괴 이근수의 사체는 그 형이라고 칭하는 자가 거래포 현암동(玄岩洞) 부근에 개장(改葬)하였음을 위시하여 소대장 강병근(姜炳根)은 해주군 청운면 3리 이장 이화경(李華卿)의 처남으로 그 마을 이장이 인수 개장하고, 기타 친족・지기 등이 각각 개장 후 부근에서 장의를 치른 듯하다. 이에 보고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770쪽)


정부에서는 이근수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