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2020/12] 12월의 독립운동가 - 윤창하 선생(1908. 4~1984. 12, 건국훈장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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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차별과 식민지 교육에 맞서 싸운 학생 독립운동가
용감히 싸워라, 학생 대중이여!
우리의 승리는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
글 | 국가보훈처 제공
윤창하는 1908년 4월 9일 전남 해남군 화산면 율동리의 용동부락에서 부친 윤주백과 모친 밀양 박씨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이다. 용동부락은 해남 윤씨의 집성촌이었다. 윤창하의 집안이 언제부터 율동리에 거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반 출신이었다고 한다. 부친 윤주백은 서울로 유학하여 신식 교육을 받은 것 같다. 그는 한말에 보성군 주사로 재직했으나 경술국치 후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윤주백은 슬하에 창하, 진하 형제를 두었는데 윤창하는 장남이었다. 윤창하는 해남군 현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에서 하숙하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의 양상 : 대일 항쟁의식이 고조되다 일제는 교육환경에서 한일 학생의 차별대우를 통해 일인 학생의 우월감과 한인 학생의 열등감을 조장했다. 교육자원의 배분도 일인 학교에 편중되어 한인 한생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일인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우리 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일제 식민통치의 억압성은 일상생활의 전 부문에 걸친 것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교육상의 민족적 불평등은 한일인의 차별대우를 가장 잘 보여주는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한일 학생들이 외형적인 조건에서 가장 선명하게 대비되는 비교집단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일제 식민정책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였던 것이다. 학생들은 식민지 교육이라는 학습상황에 공통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학생들은 상시적인 접촉으로 인해 의견 결집이 용이한 집단 특성이 있었다. 이는 학생들이 경험의 공유를 통해 식민지교육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켜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그 결과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항쟁의식은 갈수록 높아갔다. 1920년대 학생운동은 주로 동맹휴학(이하 맹휴)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는 학생들이 학교 당국에 일정한 요구조건을 내걸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등교거부, 수업거부, 농성 등을 행하는 것이었다. 학생이라는 신분조건이었으므로 수업거부가 가장 일반적인 저항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휴는 1920년대의 전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나, 6.10만세운동 이후인 1927년을 기점으로 크게 증가했다. 1926년 55건이던 맹휴가 1927년에는 72건, 1928년에는 83건으로 늘었다. 1927년에는 전국 13도 전체에서 맹휴가 전개되었다. 맹휴가 전국적 현상으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 초중반에 전개된 맹휴는 주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생 중심의 맹휴였다. 따라서 맹휴의 성격이 단순하고 일회적이었으며 투쟁성도 강렬하지 못했다. 맹휴의 요구조건도 학교 설비의 개선, 자질이나 자격이 없는 교원의 배척 등이 많았다. 그런데 1927년을 기점으로 중등학교의 맹휴가 증가하고 ‘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한 자각이 확산되면서 요구조건도 변화해갔다. 종래 학교 설비, 교원 자질, 학교 승격 등 개별 학교 문제에 국한되던 요구조건이 식민지 교육제도로 확대되었다. 배우는 학생이 ‘조선인’인만큼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 역사, 우리말에 대한 교육요구로 나타났다. 즉 ‘조선사 교육’, ‘조선어 교육의 확대’, ‘학생회(교우회)의 자치권 획득’ 등 교과과정이나 식민지 교육 자체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민족의식의 강화에 따른 결과였다. 광주고보의 동맹휴학에 참가 : 식민지 교육에 맞서 싸우다 윤창하가 광주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광주고보에 맹휴가 일어났다. 광주고보 5학년생인 이경채(李景采)가 항일 선언서를 작성하여 경찰관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 앞 전주 등 10여 곳에 붙이고 전남 각 중등학교, 경찰서 등에 우송했다. 이로 인해 이경채는 동년 6월 8일 체포되었다. 학교에서는 형이 확정되지 않은 6월 19일 이경채를 퇴학시켰다. 학교측에 이경채의 퇴학사유 해명을 요구하던 4, 5학년 학생 대표 11명은 24일 학부형회 석상에 진정서를 배포했다. 학교에서는 11명의 학생 대표에게 즉시 근신 처분을 내렸다. 이에 6월 26일 1학년을 제외한 2~5학년 학생들은 교장에게 다음과 같은 진정서를 제출하고 맹휴에 돌입했다. 학교에서는 이튿날 바로 맹휴 주동 학생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 처분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학생들 역시 맹휴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실현이 불가능할 경우 교장이 사직할 것을 요구하며 대립했다. 이경채 사건은 맹휴를 촉발시킨 계기였을 뿐 실제로는 학생들의 학교당국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 불만이란 일인 교사와 교장의 기만적이고 강압적인 태도, 열악한 교육환경, 그리고 일제 식민지교육에 대한 저항이었다. 고보에서 맹휴가 시작된 3일 후인 6월 29일 광주농업학교 2, 3, 4학년생 130명이 맹휴에 돌입했다. 이후 1학년도 맹휴에 참가했다.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의 맹휴 요구조건 역시 ‘민족적 차별을 심하게 하는 교사 거부’, ’조선어 교수시간 증가‘, ’조선역사 교수‘ 등이었다. 농업학교의 맹휴는 고보 맹휴에 대한 동조맹휴의 성격이 강했다. 학교 당국은 역시 주모자 12명을 퇴학시키고 102명을 무기정학, 나머지 참가 학생들에게 근신처분을 내렸다. 학교 당국의 즉각적이고 완강한 탄압은 오히려 광주고보 맹휴생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맹휴 직후인 6월 30일 맹휴 결속 위반자를 감시하던 허진환, 주재성 등의 맹휴생들은 교사를 만나러 간 1학년 홍모를 구타 응징하기도 했다. 7월 10일에는 고보 맹휴활동의 통일적인 지도를 위해 최규창이 하숙하던 최동문의 집에서 임주홍, 최규창, 정동화, 변진설, 박세영, 이만동, 김기권, 서재호 등을 중심으로 맹휴중앙본부가 결성되었다. 중앙본부는 참모부, 통신부, 외교부, 회계부를 설치하고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지방 학생들의 결속을 위해 지방대표기관도 조직했다. 농업학교에도 모계부(謀計部)와 탐정부(探偵部) 등의 맹휴 지도본부가 결성되었다. 고보의 맹휴 중앙본부는 학부형들에게 통고문 등을 우송하여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맹휴생에게는 격문, 경과보고 등을 통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결속을 다졌다. 시라이(白井) 교장과, 맹휴생들이 졸업한 보통학교의 교장에게 보내는 항의문도 작성 배부했다. 학교 당국에서 맹휴생들이 졸업한 각 지역의 보통학교장에게 맹휴생들의 회유를 맡겼으므로 이들의 간섭을 비난하는 항의문을 발송한 것이다. 광주고보는 지방의 통학생이 많았으므로 맹휴중앙본부의 결성은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투쟁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학부형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고보 맹휴 중앙본부의 격문을 통해 이들이 맹휴를 단순히 학교 차원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일합병 후 18년 이래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주의의 철제하(鐵蹄下)에서 극도로 유린당하여 왔습니다. 피등(彼等)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를 감행하는데에는 악독한 정치적 압박이 있고 그를 미식(美飾) 하는데에는 음험한 문화적 만착(瞞着)이 있습니다. 현하의 조선 교육은 피등의 만착정책의 노골적 전형입니다.(중략) 교장 시라이씨는 조선총독부 식민지 노예교육 정책의 전형적 이행자로서(하략) 맹휴 중앙본부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더 나아가 이들은 맹휴운동을 항일 민족운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단순히 교육 현실에 대한 항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일제의 압제하에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적시했다. 식민지 노예교육은 일제가 우리 민족 전체에게 행한 기만정책의 전형적인 한 형태에 불과하고 ‘민족적 파멸의 경향’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또 다른 격문에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맹휴를 단행했는가를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학원내의 자유 획득, 다시 말해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다”라고 맹휴의 성격을 규정했다. 또한 “우리들의 승리는 맹휴 중인 우리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들 피압박 백의민족 해방의 첫 발걸음이요 소생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맹휴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간주하고 폐교를 각오한 결사 투쟁을 선언하고 있었다.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이와 유사한 생각이었다. 광주농업학교의 격문에도 “싸우자, 싸우자, 모국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우자, 모국의 생명은 우리들의 활동 여하에 있다. 2천만 동포를 부활시켜 3천리 강산을 빛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양 어깨에 있다”고 하여 맹휴를 민족적 사명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맹휴 지도본부는 맹휴 학생들의 행동강령 등을 통해 행동 통일과 결속을 강화해갔다. 지도본부가 맹휴 학생들에게 배포한 실행요목에는 일반 사회인과 경찰 취조시의 답변 요령까지 자세히 열거되어 있었다. 고보의 맹휴에 대해 졸업생 대책위원회, 학부형회 등이 학교와의 중재에 나섰다. 특히 광주고보 출신의 동경 유학생들이 대책강구회를 결성하고 장재성, 최동문, 전창모를 대표로 선정하여 맹휴의 진상 조사와 대책을 강구토록 했다. 맹휴는 결국 학부형회가 학교 당국에 굴복, 타협하여 학교측의 최후 통첩일인 9월 17일 자제들을 등교시킴으로써 종결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농교에서도 9월 12일 수업을 재개했다. 등교 후에도 9월 18일 고보 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퇴장했으나 경찰이 학교로 난입하여 주모 학생 수명을 검거했다. 당시 윤창하는 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4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된 맹휴 중앙본부에 소속되지는 않았으나, 3학년 학생의 중심인물로 맹휴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다른 3학년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았으므로 3학년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고보와 농교 맹휴생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매우 강도 높은 것이었다. 고보의 배반자 응징 가담자 뿐아니라 고보 맹휴 지도본부와 농교 맹휴지도본부의 학생들이 검거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광주고보 독서회 활동 : 민족의 현실에 대해 탐구하다 이후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그리고 전남사범학교 학생들은 각자 학교 단위로 소규모 독서모임을 결성하고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이들은 서로 사회과학 서적을 돌려보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탐구하고 민족해방의 방안을 모색했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경우 성진회 출신의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서모임을 재결성하고 사회과학을 학습했다. 전남사범학교에도 하의철, 이동선, 임종근 등이 후배 학생들을 이끌었다. 이러한 각 학교의 독서모임은 서로 연계되어 있었고, 강해석, 지용수 등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지역 청년인사들의 지도를 받았다. 광주농업학교의 경우 1927년 11월 성진회 회원이었던 문승수, 정동수가 하급생인 김복만․김재용․유상걸․주당석․유치오 등과 함께 사회과학 연구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에는 성진회원이었던 고보 졸업생 왕재일이 참석하여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격려했다. 광주고보에서도 성진회 회원이었던 최규창과 임주홍, 김광용 등이 후배, 동급생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이끌었다. 독서모임의 최규창, 임주홍은 1928년 광주고보의 맹휴 당시 맹휴 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격문과 성명서를 제작 배포하는 등 맹휴투쟁을 주도했고, 경찰에 체포되어 실형을 언도받았다. 1928년 9~10월경에는 광주고보 맹휴로 인해 퇴학당한 김시성을 중심으로 4학년의 김상환, 김보섭, 김몽길, 여도현 등이 독서모임을 만들어 사회과학을 연구했다. 이들은 전남청년연맹 간부인 장석천 등 사회인사의 지도를 받았다. 독서모임의 김몽길과 여도현은 ‘소행불량’을 이유로 1929년 3월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당하자 졸업식날 ‘조선인 본위의 교육’ 등의 요구를 담은 선전격문을 배포하며 항쟁하기도 했다. 윤창하 역시 이즈음 독서모임에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창하는 김상환, 김보섭 등 고보 학생들과 함께 사회과학을 연구하며 민족해방운동의 방안을 고민하였다. 각 학교의 독서모임 학생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1929년 5월에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 장석천과 나승규의 지도로 각 학교의 사회과학 연구모임 학생들이 소비조합 결성을 추진하였다. 즉 고보에서 윤창하를 비롯하여 김상환, 김보섭, 광주농업학교에서 조길룡, 김순복, 전남사범학교의 송동식, 이신형, 강달모 등의 독서모임 학생들이 서로 출자하여 소비조합 결성을 추진한 것이다. 이러한 긴밀한 움직임 속에서 1929년 6월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재성이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성진회원으로 1927년 광주고보를 졸업한 장재성은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 중이었으나 방학때면 귀향하여 독서모임 학생들을 지도했다. 장재성이 귀국하자 각 학교의 사회과학 연구 학생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하는 등 학생들의 결속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각 학교의 사회과학 연구실태를 파악한 장재성은 각 학교별로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연구 모임의 통합에 나섰다. 그는 동년 6월 중순 윤창하를 비롯한 광주고보의 김상환․김보섭, 사범학교생 송동식․강달모, 광주농업학교생 조길룡․김순복 등과 함께 김기권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운동의 방향을 논의했다. 장재성은 이 자리에서 각 학교의 학생들이 각기 별도로 학습하고 있는 단점을 지적하고 조직적인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장재성의 지적에 공감한 학생들은 즉석에서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책임비서 : 장재성 조사선전부 위원(동지획득, 선전 보급) : 김상환, 김보섭 조직교양부 위원(반 편성, 사회과학 연구방법 지도) : 송동식, 김순복 출판부 위원(인쇄물의 인쇄 반포) : 조길룡 재정부 위원(회비 징수 회계사무) : 강달모, 윤창하 윤창하는 독서회 중앙부의 재정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매주 1회씩 회합하여 협의할 것, 3개 학교별로 독서회를 조직하고 중앙부에서 연락 통일을 도모할 것, 학교별 결사원에게는 중앙부의 존재를 비밀로 할 것 등을 협의 결정했다. 조직구성도 조직교양부, 조사선전부, 재정부 등으로 구분하여 성진회 당시에 비해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각 학교별 독서회 중심으로 운영하되 이를 통할하는 독서회 중앙부를 설치함으로써 독서회의 통일적인 운영을 도모하고자 했다. 독서회 중앙부에는 출판부를 두어 각 학교별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을 등사하여 공유하도록 했다. 장재성은 독서회 중앙부의 ‘책임비서’에 선임되어 독서회 중앙부를 총괄했다. 이어 고보, 농교, 사범학교에 각각 개별적으로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각 학교의 독서회 조직은 다시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어 사회과학 연구의 밀도를 높였다. 고보에서는 1929년 6월 하순 무등산에서 윤창하를 비롯하여 김상환, 김보섭, 오쾌일 등 22명이 참석하여 광주고보 독서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임했다. 회대표 겸 조직교양부 위원 : 김상환, 조사선전부 위원 : 윤창하, 박기원, 이영범 조직교양부 위원 : 오쾌일, 김대원, 재정부 위원 : 김보섭, 이형우 윤창하는 조사선전부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회원을 5개의 반으로 구분하여 윤창하를 비롯한 오쾌일, 김보섭, 김상환, 김대원이 그룹대표를 맡아 그룹별로 사회과학을 연구하기로 했다. 학교별 독서회는 광주농업학교와 전남사범학교에도 결성되었다. 각 학교의 독서회는 학년별로도 구성되었다. 광주학생운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된 독서회 관련자만 54명에 달할 정도로 각 학교의 독서회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독서회 중앙부는 종전에 계획한 바 있던 소비조합의 결성도 추진했다. 소비조합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고, 독서회 운영자금을 조달할 목적이었다. 각 학교 독서회원이 1구좌당 3원씩 징수하고 광주고보 출신의 김기권이 5백원, 나승규가 1백 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보 독서회원이 60원, 김기권이 5백 원을 출자하여 1929년 9월 초순 문방구점을 열고 경영은 김기권이 전담했다. 문방구점은 독서회원의 모임 및 토론 장소로 활용되었다. 문방구점의 개설은 독서회에 대한 경제적 지원 외에 안정적인 모임장소의 확보라는 점에서도 중요했다. 그러나 독서회 중앙부와 각 학교별 독서회가 장기간 유지되지는 않았다. 광주고보와 광주농교는 동년 9월, 사범학교는 동년 10월 각각 독서회를 해산했다. 조직 재정비를 위해 해산한 것으로 보이나, 세 학교 모두 11월 학생시위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조직을 재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29년 말까지 광주지역 전 중등학교에 비밀 독서회가 결성되었던 경험은 유사시 강한 조직력을 발휘하는 근간이 되었다. 11월 3일의 학생시위 이후 대규모 학생 검거사태가 벌어지자 독서회원들을 중심으로 11월 12일의 제2차 학생시위운동을 추진해 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 : 국내 민족운동의 역량을 보여주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5분경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 학생이 광주여고보생 박기옥(朴己玉)을 밀친 것을 계기로, 광주중학교 학생 후쿠다(福田)와 광주고보 2학년생인 박준채(朴準埰)의 격투가 벌어졌다. 현장에 있던 한국 학생들도 박준채를 도와 후쿠다를 구타했다. 당시 나주에서 통학하던 한인 학생들은 인척관계인 경우가 많았고 나주보통학교의 선후배 사이여서 결속력이 매우 강했다. 이튿날인 10월 31일 통학열차 안에서 다시 박준채와 후쿠다의 다툼이 있었다. 나주역에서의 충돌이 통학열차 안으로 이어진 것이다. 박준채가 고보생 3~4명과 함께 의도적으로 광주중학생들이 탄 차량에 탑승하여 사과를 거부한 후쿠다와 또다시 격투를 벌였다. 동승한 광주고보생들이 가세하여 이날도 후쿠다가 코피를 흘리는 등 수세에 몰렸다. 11월 1일에는 박준채와 후쿠다의 다툼이 통학생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날 광주역에서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유도 교사까지 동원하여 광주고보 학생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였다. 일인 학생이 한인 학생에게 두차례나 구타당한 사실이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나주역 구타보다 통학열차 안에서의 구타사실이었다. 다수의 일인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격투가 있었으므로 일인 학생들의 사기와 연결된 문제로 간주되었다. 기차 통학생이 아닌 학생까지 포함된 일인 학생 30여 명이 “어제는 우리 학교 생도가 고보생에게 당했으니 오늘은 복수한다”며 통학열차로 몰려들었다. 개인간의 다툼이 통학생 전체의 감정적인 대립으로 발전하여 광주역에서 한일 통학생 수십 명이 서로 철길을 마주하고 무력 충돌에 돌입할 상황이 된 것이다. 경찰과 교사들의 제지로 학생들은 해산하였고 학교에 집결한 광주고보생들은 박준채로부터 지난 2일간의 경과보고를 들은 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학생의 결집력을 강화하고 학생충돌 시 집단적이고 일사불란한 동원을 가능케 한 동인이 되었다. 일인 학생들은 시내에서 단도를 구입하는 등 학생충돌에 대비하여 무장하기도 했다. 한일 학생의 대립은 통학생간의 대립을 넘어 광주지역 한일 학생들의 집단적인 충돌 분위기로 발전했다. 특히 11월 1일에는 학교가 밀집한 광주에서 집단적인 대치상황이 전개됨으로써 광주지역 한일 중등학교 전체 학생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었다. 맹휴 등의 교내투쟁이 아니라 교외에서의 투쟁이었고, 한일학생의 충돌이었으므로 민족적 대립각이 형성된,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통학생 간의 대립은 11월 3일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폭발하였다. 11월 3일은 일요일이었으나, 일본 왕의 생일인 명치절 행사가 열렸다. 누에고치 6만석 생산 기념식까지 열려 한인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더욱이 이날은 음력으로 개천절이기도 했다. 11시경 수기옥정 우편소 앞에서 고보생 7~8명과 일인 광주중학교 학생 십여 명의 시비를 계기로 광주역전에서 고보생과 광주중학생 수십 명의 집단 난투가 벌어졌다. 격투 소식을 들은 두 학교의 학생들이 몰려들어 수백 명이 토교(土橋)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사태가 확대되자 양교의 교사들이 나서고 경찰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을 제지, 해산시켰다. 양교 학생들은 각기 학교로 돌아갔으나 고보생 2백여 명은 고보 강당에 모여 사건의 대책을 논의했다. 전년도인 1928년에 있었던 장기간의 맹휴로 단련된 학생들은 집단행동으로의 전환이 빨랐고 단결력도 강했다. 이 자리에는 광주의 중등학교 독서회를 지도했던 장재성도 참석하여 독서회원을 통해 운동의 방향을 지도했다. 독서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운동이 제안되었다. 독서회원인 김병기가 솔선하여 농구실(農具室)을 열어 곤봉을 반출하였다. 광주농업학교생까지 가세한 300여 명의 학생들은 독서회원인 김보섭, 김상환, 김무삼과 김향남 등 주도학생들이 앞장서고 5학년생을 선두로 교가(校歌)와 운동가를 부르며 시가로 진출했다.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를 지나 광주우편국을 경유하여 광주도립병원 앞으로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사범학교와 광주여고보의 일부 학생들이 시위대에 참가했다. 경찰과 소방대가 우편국 앞 등에서 저지했으나 학생들의 기세를 막지는 못하였다. 시위대가 광주도립병원 앞에 이르자 경찰과 소방대가 시위대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으나 학생들은 이에 불응하고 행진을 계속했다. 이들은 광주천을 건너 소시장(小市場)을 거쳐 오후 3시경 광주고보로 귀교했다. 광주농업학교와 전남사범학교 학생들도 학교 앞에서 해산했다. 이 시위 이후 광주의 일인 사회는 벌집 쑤신 듯 들끓었다. 일인이 운영하는 광주일보와 경성일보 등은 일인 소학교 학생 70~80명이 한인 학생들에 의해 부상당했다는 허위기사를 보도하는 등 앞장서서 반한분위기를 조성했다. 일인 유지들은 시위 주동학생들의 처벌과 광주고보의 폐교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 조선총독과 일본군사령부에 군대 출동을 요청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은 이에 호응하여 70여 명의 한인 학생들을 검거하고 그 중 62명을 검사국에 송치했다. 일인 학생들은 7명이 체포되었으나 한 명도 송국되지 않았다. 이러한 한인 학생에 대한 편파적인 대규모 검거 선풍은 11월 12일의 2차 시위운동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11월 3일의 시위를 배후 지도했던 장재성은 11월 4, 5일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인 장석천을 비롯하여 동 연맹의 간부인 국채진, 강석원, 박오봉 등과 시위학생 검거의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장재성의 제안으로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운동 계획이 추진되었다. 한편 장석천 등은 11월 7일 서울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중앙청년동맹에서 광주학생사건의 조사를 위해 파견한 권유근, 부건을 만나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강영석, 권유근은 7일 밤 상경했다. 이어 장석천은 10일 광주학생사건의 조사를 위해 광주에 온 신간회 집행위원장 허헌에게 시위운동의 전국 확산을 제의하고 신간회의 협조를 구했다. 즉 광주의 2차 시위와 서울 시위운동 추진 계획을 알리고, 신간회에서도 그 뒤를 이어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허헌은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자금제공도 약속했다. 장재성은 전남청년연맹 간부들과의 합의에 따라 9일 학생들에게 배부할 3종류의 격문 원고를 작성했다. 이어 10일 밤 각 학교의 독서회 주도인물들을 소집하여 독서회원을 중심으로 격문 인쇄와 시위운동 계획을 수립했다. 독서회원인 오쾌일이 격문의 제작을 맡았다. 한편, 11일 밤 장재성, 장석천, 강석원, 박오봉, 국채진 등은 다시 모여, 광주의 시위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11월 12일 계획대로 고보와 농업학교의 학생들이 수업 개시와 동시에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전교생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리 배부한 격문이 시가에 살포되었다. 즉 광주고보의 독서회원인 오쾌일이 김삼석, 김동섭, 송만수, 김홍남, 강민섭 등에게 격문을 전달했고, 이들은 시위 도중 고보 교정과 광주여고보 부근의 도로에 이를 살포했다. 학생들은 교문을 나와 우편국과 형무소를 거쳐 사범학교 앞까지 시위행진했다. 사범학교 부근에서 경찰의 제지로 190여 명의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은 광주고보 시위대와 합류하여 광주형무소로 진출하기 위해 광주고보로 시위행진했다. 시위대는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를 지나 사범학교 앞에 이르러 고보생들과 함께 함성을 높이며 시위를 벌였다. 이곳에서 6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29년 11월에는 전남 목포와 나주 등지에서 동조시위가 벌어졌다. 12월 초에는 서울에서 대규모의 동조시위가 일어나 30여 개의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나 맹휴를 전개했다. 1930년 1월 신학기 개학 이후에는 동조시위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동조시위가 벌어졌다. 100여 개에 달하는 보통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간도의 한인 학생들도 동조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검거된 광주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대한독립 만세”, “피압박 민족해방 만세”, “제국주의 타도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쟁했다. 태극기나 적기를 제작하여 시위에 사용하기도 했다. 인근의 학교들이 서로 연합하여 시위를 벌이는 일도 많았다. 신간회 지회나 지역 청년동맹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국내외에 걸쳐 최소한 300개 이상의 학교에서 5만 4천여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크게 전국으로 확산된 대중운동이었다. 그리고 운동의 주체가 학생이었으나 학내문제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교육문제,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에서 나아가 민족독립, 민족해방을 제기한 총체적 민족운동이었다. 또한 1920년대에 축적된 민족역량을 전국 규모로 분출했다는 점에서 국내 민족운동의 역량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윤창하는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의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독서회 중앙부와 광주고보 독서회의 간부로 활동하며 사상과 행동 모두 대일투쟁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11월 3일의 시위운동으로 체포되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일제 검사국은 그의 시위와 독서회 활동을 모두 문제삼았다. 결국 1930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시위운동으로 금고 4월에 집행유예 5년,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독서회 활동으로 징역 2년을 각각 언도받았다. 두 번째 판결로 인해 앞의 집행유예 판결이 취소되어 총 2년 4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윤창하는 옥고 후유증으로 일제강점기나 광복 이후에도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84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