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0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김좌진(金佐鎭)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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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의 최고 주역
조국 독립이 가장 큰 가치
글 | 편집부
핵심공적
대한광복회 부사령으로 활동하고 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1920년 한국독립군 전투사상 최대의 성과인 청산리대첩의 승리를 이끄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 1889년 12월 16일 충청남도 홍성 갈산 출생 ● 1908년 호명학교 설립 계몽운동 ●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 ● 1920년 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청산리대첩 ● 1925년 신민부 총사령 겸 군사부 위원장 ● 1929년 한족총연합회 결성 ● 1930년 1월 24일 (40세)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정미소에서 피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일제는 만주에 있던 독립군이 한반도에 진출하면 식민통치가 불가능해진다는 판단에서 사건을 조작해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병력을 만주로 파견한다. 독립군 3천~4천여 명, 일본군 3만~3만 5천여 명이 벌인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그때 독립군 사령관이 김좌진 장군이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평생의 신념 병정놀이에서만 내세운 말은 아니었다.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친구를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 입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거지를 보면 밥을 먹이고 자신의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한다. 이런 신념은 무럭무럭 커서 청년이 된 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집에서 거느리던 30여 명의 노비를 모아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전답을 나눠주었다. 그리곤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무관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는 무관학교에서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던 조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겪었다. 일제의 방해에도 멈출 수 없었던 독립항쟁에 대한 의지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의병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수시로 조사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독립항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서간도 지역에 독립항쟁기지를 마련하고자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몇 번이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지만, 결코 그를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1917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로 떠나게 됐다. 청산리 전투의 주역을 배출한 사관연성소 일제의 압박은 날로 심해져 독립항쟁의 중심은 국내에서 만주로 옮겨졌다. 김좌진 장군은 1919년 3월 중순 길림군정사를 조직했다. 길림군정사는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된 무장투쟁 조직이다. 그해 가을쯤에 대한정의단과 연합했다. 대한정의단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군사전문가가 없었고 길림군정사는 조직을 뒷받침해줄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이루어진 연합이었다. 1919년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하는 조직이 됐다. 군사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관이다. 김좌진 장군은 1920년 2월 초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또한 사관연성소 교장이 되어 미래의 독립군 간부에게 역사·군사학·병기사용법·부대지휘법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함양시켰다.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교성대를 만들었다. 교성대는 잘 훈련된 최정예 부대로서 이후 김좌진과 함께 일본군을 섬멸시킨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군정서군의 주축이 됐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독립 위해 헌신하다 3·1 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훈춘사건’을 일으켜 2만 명의 병력을 만주에 파견했다. 4천여 명의 독립군은 총 3만여 명의 일본군과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했다. 청산리 전투는 간도 출병을 저지시켰으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전투였다. 일제는 이때의 패배로 중국 정부에 압력을 넣는 한편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독립군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 등지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좌진 장군은 흩어진 독립군을 다시 모아 대한독립군단을 만들고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항쟁단체을 통합해 신민부를 조직했다. 신민부는 무장활동, 교육 및 홍보활동, 산업활동 등 자치활동을 통해 한인동포들의 생활향상에 주력했다. 신민부 조직 이후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했으며 특수공작대를 국내에 파견해 국내의 작전지도 등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좌진은 영안현 일대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1930년 1월 24일 중동선 산시역(山市驛)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