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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1/01]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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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주는 메시지


생지옥 속에서 샛별처럼 빛나던 

눈들을 기억하길 


글, 사진 | 편집부


  겨울바람은 살을 에는 듯 매서운데, 겨울하늘은 어찌 이리 아름답게 푸를까. 두 눈에 행복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리고 투명한 쪽빛 겨울하늘 아래 의연하게 서있는 붉은 벽돌 건물들. 아, 찰나의 순간 무언가가 가슴속으로 훅 들어왔다. 보통 눈을 통해 뇌로 사물이 인식되기 마련인데, 이 공간은 이상하게도 가슴을 세게 두드리고 나서야 뇌와 눈을 거친다. 십여 년 전에도, 그 후 몇 번 이 공간을 방문했을 때도, 그리고 오늘도 그러했다. 왜일까. 오랜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 꽤 오랫동안 이 공간에서 살아온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을 만났다.


“아마 이 공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시설이 아니기 때문일 거예요. 현장에 가보면 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주는 메시지가 있어요. 그 메시지는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현장과의 정서적 교감 때문이죠. 현장이 주는 가치와 중요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요즘 독립운동사는 공간이 주는 의미에 중요성을 두고 사적지를 발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시간만 갖고 역사를 얘기하는 건 한계가 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공간 속에서 시간의 단층들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서대문형무소가 아닐까 싶어요.”


박경목 관장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무엇보다 ‘켜켜이 쌓인’ ‘정서적 교감’ ‘시간의 단층’ 등등 역사적 논리를 감성 언어들로 풀어내는 그가 돋보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을 때마다 느꼈던 섬세하고 따뜻한 스토리텔링이 아마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고난의 장소’에서 ‘소통의 공간’으로


  그는 2004년부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출근했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듯, 우연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부터 대일항쟁기 전후 성리학자들이 국망(國亡)의 상황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했는지에 대해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대일항쟁기를 연구했지만 형무소는 낯선 분야였다. 


당시 전시관 한쪽에 있던 사무실은 오월에도 등유 난로를 피울 만큼 춥고 열악했다. 비가 오는 날엔 퇴근도 못했다. 옥사에 물이 새서 직원들과 비닐로 물을 받아 퍼내느라 밤을 꼬박 샜다. 몸도 힘들고 못다 한 공부에도 미련이 남았지만, 무던한 성격과 성실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거창한 명분으로 애써 포장하지 않고 ‘월급 값은 해야 하는’ 직장인의 마인드로 주어진 역할에 진심을 담았다. 


“보람을 느낀 부분을 꼽으라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전반적으로 대중들에게 많이 인식시킨 것과 완벽하지는 않지만 문화재 복원 개념으로 시설 정비를 하고 전시를 새롭게 바꾼 것이 아닐까 싶어요.”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던 ‘고난과 수난의 장소’는 조금씩 대중들 곁으로 다가갔다. 특별한 영웅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독립운동으로 시선을 확장했고, 쉬운 언어와 보편적 감성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외부 업체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 직원들이 직접 전시를 기획·준비하면서 색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선한 마음, 진심어린 손길들이 이어지면서 큰 파장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남녀노소가 저마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현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소통과 깨달음의 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시련의 종착점에서 독립의 희망을 꿈꾸다


서대문형무소는 명실상부한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의 상징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참담한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렀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더 아픈 부분은 이 공간이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서대문형무소는 대일항쟁기 이전인 1908년, 일제가 식민 지배를 위해 사법권을 장악하면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에요. 전통시대 감옥과 달리 자율적인 감옥제도의 개혁으로 만들어진 선진화된 시설이지만, 불행하게도 식민 침략을 위해 이식된 감옥이라는 역사의 한계가 있어요. 대일항쟁기에 전국을 대표하는 가장 큰 감옥이었고, 수감인원도 가장 많았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곳이죠. 또한 해방 이후 1987년까지 운영되면서 우리 근현대사 80년을 관통하고 있는 특수한 공간이에요.”


그의 말처럼,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에 문을 열어 1987년 11월 폐쇄될 때까지 80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대일항쟁기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갇혔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가들을 가두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1908년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뒤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해 보안과 청사, 제9~12옥사,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등을 남겨두고 나머지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후 서대문구에서 현장을 보존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심훈 선생이 어머니께 올린 글을 보면 ‘생지옥 속에서 눈은 샛별처럼 빛나고 있다’고 썼어요. 서대문형무소는 시련의 종착점이자 고통스러웠던 장소였음에도 여기에서 다시 독립을 꿈꾸었어요. 좌절했을 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희망을 찾은 거죠. 서대문형무소에 와서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을 찾는 것도 좋지만, 거창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문득 깨달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오면 슬픔과 분노 이면에 무언가 따스한 위로를 느끼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과거의 독립운동가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건넨 희망이었음을.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증거들


  그는 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메시지와 교감하면서 6천 장에 이르는 방대한 서대문형무소 수감자기록카드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일이었다.


“1990년대 초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감자기록카드를 스캔해서 묶어낸 자료집이 있었어요. 분류가 되어있지 않다보니 출신지는 어디가 많은지, 어떤 죄명이 많은지, 어떤 연령대가 많은지, 평소 궁금한 부분을 알 길이 없더라고요. 워낙 방대한 자료인데다 한자 초서로 갈겨 쓴 글자가 많아 쉽지 않았지만, 후배들과 품앗이도 하고 틈날 때마다 작업했죠.”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수감자기록카드 분류작업은 역사적 기록을 뒷받침할 객관적 증거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3·1운동사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3·1운동은 전 연령층, 전 계층이 참여했다고 학교 때 배웠지만 사실 통계를 안 봤거든요. 그동안 독립운동사가 사실관계에 미진했기 때문에 통계를 기반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연구 패턴을 달리 해봤어요. 수감자기록카드 6만 장 가운데 남아있는 6천 장을 분류했더니 15세에서 71세까지 연령대가 다양했고 농업, 학생, 종교인, 교사, 마차꾼, 고물상, 순사보 등 80여 종류의 직업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죄목의 80% 이상이 사상범이었고, 항일운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죄목이 많았고요. 3·1운동이 남녀노소와 계층 구분 없이 참여했던 민족운동이었음을 통계적으로 실증한 거죠.”


수감자기록카드를 보면 10대가 전체 수감자의 10%를 넘었다. 다수가 학생이었다. 배화여학교 학생인 김성재, 소은명, 왕종순 등이 만세운동으로 피체되었다. 여관급사였던 임갑득은 15세로 3·1운동 최연소 수감자였다. 덕수궁 순사보였던 일본경찰 정호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만세’라고 써서 당시 열 살이었던 딸의 학교로 달려가 만세운동을 선동했다. 서대문형무소에 다섯 번 수감된 박진홍은 마지막 수감 땐 임신 상태였고 이곳에서 출산해 키웠다. 아이 이름이 ‘철창이 한이다’란 뜻의 ‘철한(鐵恨)’이었으나 두 해를 못 넘겨 사망했다. 형제·부자 등 가족 독립운동가도 많았다. 


“흔히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거창하게 생각해서 그들은 영웅이고 나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한 괴리가 기억으로부터 우리를 멀게 하고 있어요.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사람들인데 정당하지 못한 사회 시스템이 자신의 꿈을 좌절시키는 환경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위치에서 잘못됐음을 표현한 게 독립운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박경목 관장은 대일항쟁기 근대 감옥과 수감자에 대한 연구 분야를 개척해 국내에서는 드물게 ‘감옥사’ 전공자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 펴낸 492쪽에 달하는 저서 『근대감옥 서대문형무소』는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이전에 나온 서대문형무소 관련 책들이 사람을 중심으로 서술했다면, 그는 감옥 자체에 집중했다. 서대문형무소가 어떤 과정을 거쳐 확장되었는지, 수감자들이 어떻게 먹고 입고 잤는지 등 수감 데이터를 통해 생활적인 부분을 다루었다. 수감자기록카드처럼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만 가능한 고난의 행군을 그는 기꺼이 감행했다.   


순국선열, 시민들의 기억 속에 조금씩 스며들어야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바깥에는 ‘통곡의 미루나무’라 불리는 나무가 있다.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원통함에 선열들이 미루나무에 기대 울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1923년에 심어졌으니 백여 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를 지켜보고 있었던 셈이다. 미루나무는 보통 생장이 빠른데, 선열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날 함께 심어졌던 사형장 안쪽의 미루나무는 2017년 고사했다. 순국선열의 통곡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아 명치끝이 아려왔다.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는 단순히 국가적으로 뭔가를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시민들의 기억 속에 조금씩 스며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국가는 어떻게 스며들어가야 할지 방법을 고민하고 만들어야겠죠. 가장 중요한 건 시민들의 기억으로 남는 건데, 기억을 되살리려면 생활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쉽지 않지만,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코로나19로 관람객이 없는 텅 빈 서대문형무소 곳곳은 시설 정비로 분주했다. 2007년부터 시작된 보수작업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박경목 관장은 대일항쟁기 때 서대문형무소가 있었던 원형의 터를 복원해서 공간의 의미에 맞게 회복해갈 계획이다. 특히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집중적으로 수용됐던 옥사를 원형대로 복원하려 한다. 서대문형무소 터의 3분의 2가량이 현재 서대문공원에 편입되어 있는데, 부지를 확보하고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고 원형대로 복원하려면 15년에서 20년이 걸린단다. 늘 그랬듯, 그는 서대문형무소라는 공간에 시간을 켜켜이 쌓으며 역사의 일부로 살아 가리라.       


“올해는 3·1절에도 광복절에도 행사를 못했어요. 마음고생이 심했죠.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어 직원들과 함께 유튜브를 개설해 강의도 올리고 여성항일운동, 근대사특강 등 다양한 비대면 강좌를 열었어요. 덕분에 서대문형무소까지 오기 힘들었던 지방에 사시는 분들이 좋아하셨고, 어린이들에게 만들기 키트를 보내 유튜브로 소통하는 새로운 경험도 했어요. 어려운 시기였지만 사업을 다각화할 수 있는 아이템을 얻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저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생지옥 속에서 두 눈이 샛별처럼 빛났던 선열들처럼, 어려움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지고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꿈을 꾸길 소망합니다.”


그는 유독 희망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어쩌면 그 희망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뿌리이자 존재이유일지 모른다. 역사에서 발견한 희망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그래서 역사는 항상 미래로 향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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