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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01] 면암 최익현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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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바른 역사 옳게 지켜내고자 혼신 다한 의병장  

민족수호 위해 역사적 자살 감행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2021년 새해 새롭게 의병장 열전을 시작합니다. 조선 유학의 거봉 율곡 이이의 정치사상으로 박사학위를 하였고, 한국 정치사상사에 관심을 기울여 온 최진홍 박사가 집필합니다. 최진홍 박사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5세 직계 후손으로서 의병장 열전을 통해 우리 시대의 가치와 정신, 이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죽음을 앞둔 최익현 선생의 마지막 상소


1906년 음력 7월, 죽음을 앞둔 면암은 적의 땅 대마도에서 고종에게 자신의 마지막 상소를 남긴다. 가슴 절절한 면암의 유소(遺疏)를 옷깃을 여미고 읽어본다. 


 죽음을 앞둔 신 최익현은 일본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아룁니다.


 신이 금년 윤4월에 거의(擧義)를 시작할 때 대략 상소로 아뢰었는데 그 상소가 전달되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신이 거사를 잘못하여 마침내 체포되는 욕을 당하여 7월 8일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어 지금 그들의 경비대 안에 수감되었으니 스스로 헤아리건대, 필경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없사옵니다. 


   (중략)

 삼가 생각하건대 신이 여기에 온 뒤로 한 술의 밥이나 한 모금의 물도 다 적에게서 나온 것인즉 설령 적이 신을 죽이지 아니한다 해도 신이 차마 배를 채우려 자신을 더럽힐 수는 없기에 식사를 거절하고 옛사람의 ‘자신을 깨끗이 하여 선왕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의리를 따르려 결심했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리까만, 다만 역적을 능히 치지 못하고 원수를 능히 없애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흙탕에 빠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의 선왕의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오나 왜놈은 멀어도 4~5년 사이에 반드시 망할 징조가 있는데 다만 우리가 대응할 도리를 다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이제 청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밤낮으로 이놈들에게 이를 갈고 있으며 영국과 미국 등도 이놈들과 반드시 잘 지내는 것만은 아니니 조만간 틀림없이 싸움을 할 것입니다. 전쟁을 치르면 백성이 궁하고 재물이 바닥나서 민중이 그 윗사람을 원망할 것이니 밖으로 틈을 엇보는 적이 있고 안으로 위를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망하는 것은 발를 들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폐하께서는 국사를 할 수 없다고만 하지 마시고 마음을 분발하고 뜻을 넓게 세워서 퇴폐함을 진작하시고 인순함을 일으켜 참지 못할 것은 참지 마시고, 믿지 못할 것은 믿지 마시며, 허위에 겁내지 마시고, 아첨하는 말을 듣지 마시어 더욱 자주하는 정신을 굳게 하셔서 의뢰심을 끊고 와신상담하는 뜻을 새겨 능히 자수(自修)하는 방법을 다하십시오.  

  (중략)


 신은 죽음에 임해서 정신이 어지러워 하고 싶은 말을 일일이 진달할 수 없어서 이것만 써서 신과 함께 갇힌 전군수 임병찬에게 부탁하고 죽으면서 그로 하여금 때를 기다려 올리게 부탁하였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폐하께서는 어여삐 여기시어 살펴주소서. 신은 울면서 영결하는 심정으로 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을 아룁니다.   <유소>    


스스로 붓을 들어 글을 쓸 힘도 없어서 제자 임병찬이 받아 적은 자신의 마지막 상소에서 면암은 먼저 지난 4월에 의병을 일으킨 사실과 그 거사의 실패로 대마도 경비대에 수감되었음을 보고한 후, 그곳에서 적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한 채 단식으로 순국하겠다는 결의를 고종에게 아뢰고 있다. 


이어서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되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華夏)의 바른 길[正道]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구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토로 한 후, 머지않은 장래에 일본이 반드시 망할 것을 예견한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과는 상관없이 우리 대한의 대응을 걱정하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제 이 세 가지 내용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찾아가본다.


역인종지계(易人種之計), 간악한 일제의 간계


  우리 역사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면암이 본 을사조약의 전모는, ‘다섯 역적은 위로는 사직을 편안하게 하려는 성교(聖敎)를 무시하고 아래로는 참정으로서 강경하게 거절하는 의논도 없이 제멋대로 조종이 전해준 강토와 인민을 밤중에 쪽지 한 장으로 적국에 넘겨 준 것’이었다.


이 조약의 결과 ‘나라도 없고 땅도 없고 백성도 없게’ 되어버렸다. 면암의 눈에 비친 을사늑약의 충격은 첫째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나라가 문서 한 장으로 망해간다는 사실과, 둘째 종전에는 나라가 망한다고 인종까지 없어지지는 않았는데 이젠 그 인종마저 없어진다는 끔찍한 사실이었다. 

‘역인종지계(易人種之計)’!


면암은 일제의 간계를 바로 ‘역인종지계’라고 말했다. 일제가 우리민족을 이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없애버리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중국 민족도 아니고 일본 민족과도 다른 우리 민족이 이제는 더 이상 이 지구상에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엄청난 시대상황을 마주한 면암의 심정을 상상하자니 오싹한 전율이 흐르고 만다.


옛날에 나라가 망할 때에는 종사(宗社)만 멸망할 뿐이었는데, 오늘날에 나라가 망할 때에는 인종(人種)까지 함께 멸망하는구나. 옛날에 나라를 멸망시킬 적에는 전쟁[兵革]으로써 하더니 오늘날에 나라를 멸망시킬 적에는 계약으로 하는구나. 전쟁으로 한다면 그래도 승패의 판가름이 있겠지만 계약으로 하는 것은 스스로 복망(覆亡: 나라나 집안이 망함)하는 길에 나아가는 것이다.   <포고팔도사민>


면암은 당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먼저 고종의 결단을 촉구했다. 1905년 11월 면암은 고종에게, ‘오늘은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다 같이 멸망하였다’면서, 남아 있는 방법은 ‘역적을 토죄하고 조약을 해제하는 길만이 마지막으로 시험할 독삼탕(獨蔘湯)’임을 강조하였다. 


면암은 ‘사람마다 꼭 죽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살 수 있는 방법이 그 가운데서 나올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여, 왜놈들로 하여금 ‘인종을 바꾸려는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침내 면암은 고종에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순국한 대의를 역설하였다.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서 면암은 먼저 고종에게 순국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왕조 국가에서 40여년 이상을 받들어 온 임금에게 자살할 것을 요구하는 면암의 모습을 상상하자면 우리의 가슴은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고종은 이를 결행하지 못했다. 그러자 면암은 민족과 조국 앞에 목숨을 바친 것이다. 민주주의만 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운명도 피를 먹고 지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면암이 고종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그것이 좌절되자 스스로 순국의 길을 가면서 지키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하면 순국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대포로 중무장한 일본을 훈련도 안 된 의병들로 상대한 면암의 거사를 두고 혹자는 국제정세에 너무나 어두웠다는 등의 비난을 하기도 한다. 과연 면암은 국제정세에 어두운 무모한 사람이었는가. 사실 면암 또한 중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의병으로 상대하는 일이 성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암이 역사적 자살을 감행한 목적은 그러지 않고서는 역사가 유지될 수 없다는 절실함에 있었다. 


앞서 면암의 유소에서 살펴보았듯이 면암은 일본의 패망을 분명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이 곧바로 대한의 광복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점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일본이 망해도 우리 민족이 나아가 우리의 혼이 사라져 버린 상태라면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패망했을 때 대한이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순국이 절실함을 인식하고 먼저 고종의 희생을 요구하였다가 이것이 용이하지 않자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면암의 순국은 출발이 바로 우리 민족이었다는 바로 그 사실 말이다. 이제 우리는 민족과 조국을 나누어 생각하기에 이른다.


사실 우리 역사에서 나라가 망한 경험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가 망했으며, 고려가 또한 망했다. 하지만 과거의 망국은 왕조만 망한 것인데 비해 당시 면암이 목도한 것은 민족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는 실로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조국보다 앞서 민족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우리는 면암의 순국이 단순한 군주에 대한 충성이나 왕조의 연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중국에 대한 맹목적 사대는 더욱 아니었다.


면암의 유소에 있는 ‘화하’라는 단어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관이 떠올라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면암은 말한다.


우리는 당당한 예의자주(禮義自主)의 백성으로 (중략) 우리나라가 고려 이후로 명칭은 비록 중국의 번속이었지만,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하고 자주하여 털끝만큼도 저들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포고팔도사민>


여기서 면암은 자신의 중화론이 결코 중국화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면암은 ‘성인들이 만세의 큰 법으로 세워 만세의 표준을 만든 것’을 ‘화하(華夏)’라고 한 것이니, 화하란 문명이란 뜻으로 곧 ‘그 전장과 법도가 찬란하게 문명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며, 이 ‘소중화’란 바로 ‘마지막 남은 큰 열매는 먹지 않는다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주역 박(剝)괘 상구(上九)의 상과 같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석과불식이란 말은 과일나무에 달린 가장 큰 과일은 따먹지 않고 두어서 다시 종자로 쓰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어려운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미약하게나마 지속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박괘의 다음 괘가 바로 복(復)괘이다. 복괘는 대한의 광복으로 연결된다. 결국 면암이 인식한 석과불식은 마지막 하나 남은 양(陽)으로 이것을 지키고자 자신의 목숨을 던진 것이다.


이 마지막 남은 양은, 일제가 패망하고 난 후에 조국 재건의 씨앗이 될 것으로 여긴 것이다. 여기서 면암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제도 의복, 두발 등은 바로 이 마지막 남은 양의 모습으로 읽어내야 마땅하리라. 면암은 ‘땅밑의 미약한 양을 부지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인식하였다. 


면암이 주장한 의리는 조선의 기존 의리 개념과 일치하면서도 더 넓게 재정립된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단순한 군주에 대한 충성이나 왕조의 연장도 아니요, 조선의 사상과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것만도 아니다. 이유는 민족자주의식, 그리고 당시의 상황이 기존 국가위기와는 다른 인종이 바뀌는 멸망이라는 인식, 그리고 외세의 침탈이 어떻게 백성들의 삶을 무너뜨리게 되는가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과 동포에 대한 강조, 민족의식을 강조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 위에 의리 개념이 펼쳐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꺼질 것만 같던 독립운동의 불씨가 이어져 드디어 민족은 살아났고, 살아난 민족은 마침내 국권을 회복한다. 광복 이후에 조국에 돌아온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 벅찬 감격을 알리는 환국고유제를 면암을 모신 사당인 모덕사(慕德祠)에서 올린다. 그 자리에서 백범 주석은 다음과 같은 뜨거운 정성을 면암의 영전에 고한다. 


외로운 소자(小子)는 어려서 스승의 가르침에 선생의 말씀을 받잡고 내내 잊지 못하였습니다. 나라 잃고 안팎의 난리 속을 헤매다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선생의 위대한 훈업에 격려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그렇다면 과연 그 무엇이 면암으로 하여금 민족과 조국을 목숨과 바꾸면서 지키게 하였을까? 어리석은 필자는 바로 역사의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면암은 평생을 바른 역사를 옳게 지키며 살아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순국의 국면에서 남긴 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皓首奮畎畝  백발을 휘날리며 밭이랑을 뛰어나옴은

草野願忠心  초야의 충성심을 바치려 함이로다

亂賊人皆討  왜적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 할 일

何須問古今  고금이 다를소냐 물어 무엇 하리오


起瞻北斗拜瓊樓  이른 아침 북쪽 향해 임금님께 절 올리니

白首蠻衫憤涕流  흰머리 만삼자락 분한 눈물 흐르누나

萬死不貪秦富貴  만 번을 죽는다고 어찌 부귀 탐하리요

一生長讀魯春秋  평생을 읽은 글은 노나라 춘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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