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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2] 건국훈장 대통령장│문태수(文泰洙)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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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 기치 드높이 세운  

호남의병대장 덕유산 호랑이


글 | 편집부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倡義)하는 마음으로 뭉쳐 있으니, 4천 년 역사와 5백 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 문태수 선생이 1908년 2월에 쓴 격문 중


  핵심공적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근거로 삼남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주요약력

● 1880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함양 출생

● 1905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킴

● 1907년   13도연합 호남창의대장

● 1913년 2월 4일   대구 감옥에서 옥중 자결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금강산에 들어가 전술 전략을 익히다


  문태수 선생은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신기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조부 문주욱이 순조대의 가선대부에 증직(贈職)되고, 부친 문병현은 인격과 덕망을 갖춘 유생 신분이었다고 하니 문태수 선생은 향촌사회에서 상당한 기반을 가진 가문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장성해 가던 무렵, 일제의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문태수 선생은 이러한 상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어 구국을 위한 거사를 준비했다. 지인의 소개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박처사라는 병법 전문가를 만나 항일전에 필요한 전술, 전략을 익혔다고 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전국적으로 을사늑약 반대투쟁이 불길처럼 번져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최익현이 이끌었던 태인의병과 민종식이 주도한 홍주의병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다. 을사늑약의 비보를 들은 선생은 금강산을 떠나 서울을 거쳐 호서지방을 돌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항일의 거두인 면암 최익현을 만나 구국의 방책을 논의한 것도 이 무렵으로 전해진다.


항일전의 선봉에 서다


1906년 봄, 문태수 선생은 덕유산 일대에서 동지들을 모으고 포수를 규합하여 덕유산 영각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곧 원통사로 이동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전에 들어갔다. 


1906년 9월, 박춘실(본명 박동식)이 거느린 부대와 규합해 의진의 전력을 증강한 선생은 9월 하순 장수로 들어가 그곳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이들을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이 전투 후 근거지를 무주 구천동의 덕유산으로 이동했고 1907년에 들어 선생은 구천동의 근거지를 신탁광에게 맡긴 뒤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무주군 부남면에 주둔했다. 이때 선생의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출동하자 기습하기에 유리한 고창곡에 매복한 후 일본군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기습하였다. 일본군 전사자만 43명에 달할 정도였다.


수차의 항일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자 선생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졌다. 이에 따라 선생의 휘하에 지원해온 자가 2백 명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서울 진공 작전에 참가하다


 1907년 하반기는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올랐지만,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중부지방에서 활동하던 허위, 이인영, 이은찬 등 의병 지도자는 전국 의병을 규합하여 서울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호남을 주 무대로 영남, 호서 일대에 걸쳐 활동하며 명성이 자자하던 선생에게도 연합부대 결성에 동참해 달라는 격문이 도착했다. 문태수 선생은 즉시 이에 호응해 정예병 100여 명을 선발해 이들을 거느리고 집결지인 양주로 향했다. 이동거리가 멀어 소수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참가했던 것이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3도창의대진소를 구성했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가 노출된 상태였고 지휘 계통을 세우기 어려워 허위가 거느리는 3백 명의 별동대는 1908년 1월 말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공격했지만, 결국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고 말았다. 


서울진공작전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고 덕유산으로 귀환한 선생은 심기일전하여 다시 항일전의 기치를 드높이 세웠다.


망국의 한을 품고 옥중 자결하다


1908년 2월 28일 이종성을 선봉으로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제의 무주 헌병주재소를 습격, 적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외곽에 주둔 중이던 적의 반격을 받아 선생은 적에게 체포되고 말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무주에서 퇴각한 선생은 이후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고 인근 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항일전을 지속했다. 1908년 4월 10일에는 일제 주재소와 관공서 등을 공격했으며 1909년 10월 30일 선생이 이끄는 의병은 이원역에서 일본군이 군수물자를 화물열차에 적재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이를 습격했다.


1909년 하반기가 되자 일제는 집중적인 공격에 나선다. 문태수 선생의 의병은 계속되는 전투로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1911년 여름, 8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장수로 들어가 헌병대를 기습한 끝에 10여 명의 일제 군경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그러나 추격해온 일제 군경의 파상적 공격으로 전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다. 선생은 이때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덕유산을 넘어 함양 안의 방면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곳에 몸을 숨기며 피신을 하던 선생은 1911년 8월 17일 일시 고향을 찾았다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지인들의 흉계에 속아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5년간에 걸친 선생의 항일전은 종막을 고하게 됐다. 문태수 선생은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34세를 일기로 자결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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