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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2] 건국훈장 대통령장│신채호(申采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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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 비판하며  

민족사학 실증적 토대 마련 진정한 민족주의자


글 | 편집부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 줄 줄 흘러 내려오리니/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韓)나라 땅에 골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1910년 압록강을 건널 때 선생이 읊은 시

「한(韓)나라 생각」


  핵심공적

언론가, 사학자, 독립항쟁가로 활동하며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동시에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추진했다.


주요약력

● 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 출생

● 1907년   신민회 가입

● 1911년   권업회 조직, 권업신문 주필

●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 1923년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작성

●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옥중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성균관 시절, 개화자강·민족운동에 관심


  신채호 선생은 충청남도 대덕의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언(定言)을 지낸 조부 신성우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한학을 교육받아 10살 때 행시를 짓고 12살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 18살 때 조부의 소개로 유학자이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사저를 출입하면서 소장된 신·구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학문을 깨우쳤다. 신기선은 동도서기적 개화사상을 가진 정치가로 신채호 선생은 이곳에서 개화에 대한 인식변화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살인 1898년 가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그곳에서 백암 박은식이 주도한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하며 기존 유학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당시 서울에선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는데 신채호 선생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문서부 간부로 활동했다. 그해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자 청원군에 있는 문동학원의 강사로 부임, 신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언론계 활동하며 민족주의적 역사 저술


  선생은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얼마 후 위암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했다. 그러나 이 해 11월 을사늑약으로 황성신문의 사장인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빌미로 황성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에 참가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공식적인 사주는 영국인 베델이었으므로 일제 통감부의 보안규칙이나 신문지법에 저촉을 받지 않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얼마 후 이 신문의 주필이 됐으며 ‘독사신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의 역사물을 연재했다.


당시 문화계에는 존화사관에 젖은 중세유교사학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또 일본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이란 이름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이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신채호 선생은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해 온 국민에게 읽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함을 깨달았다. ‘독사신론’에서 격렬한 필치로 존화주의에 젖은 중세사학과 일제의 거짓학설을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 재구성에 노력했다.


망명길에 올라 독립항쟁에 나서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은 국외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신채호 선생은 안창호 등 동지들과 함께  1911년 12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신문의 주필로 취임했다.


1913년에는 박은식, 문일평 등과 함께 박달학원을 세워 중국에 있는 한국 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를 갖게 됐다. 1918년경부터 북경대학 이석증 교수의 주선으로 보타암에 자리를 잡고 한국사 연구를 계속했는데 이석증 교수와 동 대학 채원배 총장은 중국 무정부주의 초창자들이다. 이때부터 선생은 무정부주의에 대한 사상적 기반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에 참가했다. 제2회 회의 때는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고 제5회 회의에서는 전원위원회 위원장과 충청도 위원에 선출됐다. 1919년 9월 이승만 박사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그가 미국에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일로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 임시정부 노선을 취했다. 


의열단 ‘조선혁명선언’ 작성


1919년 10월 상해에서 ‘신대한지’를 발행해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했으며 1920년 4월 북경에서 제2회보합단을 조직했다. 1920년 9월에는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해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과 독립항쟁 노선의 무장투쟁 노선의 통일을 추구했다.


1923년 1년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의 독립항쟁 이념과 방략을 이론화한 선언서인 ‘조선혁명선언’을 썼다. 조선혁명선언은 일제 요인 제거와 기관을 파괴한 의열단원들이 휴대하는 필수품 중 하나였으며, 국내, 중국, 일본 등 각지에 널리 뿌려졌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선생은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해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열중했다. 


신채호 선생은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항쟁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일경에 잡혀 10년형을 받았다. 신채호 선생은 여순 감옥에서 1936년 2월 21일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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