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1/02] 이육사문학관 이옥비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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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문학관 채우는 육사의 외동딸
민족시인 이육사를 기리는 공간
아버지 이원록을 기억하는 시간
글·사진 | 편집부
너무나 컸던 나의 아버지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뼈아팠던 역사의 한 자락으로, 가슴 먹먹하도록 울림 깊은 시인으로, 나라를 사랑했던 올곧은 민족주의자로, 부서질지언정 타협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로, 그리하여 여전히 우리 앞에 ‘살아 있는 과거’로 존재하는 이육사 선생. 그의 흔적들을 안동 이육사문학관에서 더욱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현재 상임이사로 상주하고 있는 이옥비 여사일 것이다. 서른일곱 늦은 나이에 낳은 금지옥엽 외동딸에게 “욕심 부리지 말고 소박하게 살아가라”는 뜻을 가진 “비옥할 옥(沃), 아닐 비(非)”의 이름을 주었던 아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만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평생을 아버지는 커다란 나무였고 벗어나기 힘든 그늘이었다. “유명한 아버지 이육사보다는 평범한 지게꾼이라도 나의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릴 때는 아빠, 아버지라는 호칭이 부러웠고 학창시절에는 불러보지도 못한 아버지 덕택에 선생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청포도를 외워봐라, 읽어보아라, 여기에는 무슨 뜻이 담겨있니….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시간들이었어요.”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이옥비 여사의 얼굴에 웃음이 인다. “선생님들은 절더러 문예부에 들어가야 한다고 무조건 넣어놓으셨거든요. 그러면 한 달을 떼를 써서 가사반으로 옮겨가고 그랬어요. 그때는 글 한자 쓰는 것도 부담스럽기도 했고 무언가 집중해서 만드는 일이 더 재미있었거든요. 어쩌면 청소년기를 지내며 불편하기만 했던 시선에 대한 나름의 작은 벽을 세웠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아버지라는 그늘에 가려져 늘 움츠려들었던 작은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을 만나면서 그늘을 더 이상 답답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늘이 힘든 순간마다 쉼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모든 게 불편하다는 저에게 너의 아버지는 멋진 분이시고 감사한 분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나라를 위해 살다 가신 아버지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말라고요. 그 후로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내고 내성적이던 성격도 활발해졌지요.” 용수와 포승줄,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 부족한 추억을 메워준 건 집안 어른들과 다섯 삼촌들이었다. 신학문 학원에서 일한 큰아버지 원기, 서화가 셋째 삼촌 수산, 문학평론가로 조선일보 학예부를 담당했던 넷째 삼촌 원조, 조선일보 인천 지국의 기자를 지낸 다섯째 삼촌 원창, 이른 나이에 요절한 여섯째 삼촌인 원홍까지 육형제의 우애는 “형 있는 데 반드시 아우 있고, 아우 있는 데 반드시 형 있다”고 했을만큼 당시에도 자자했다고 한다. 어린 조카를 끌어안고 울거나 어머니에게 술, 담배를 권하는 모습이 싫은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빈 공간을 빼곡하게 채워주던 삼촌들의 온기는 이옥비 여사가 살아오며 헛헛한 순간마다 두고두고 꺼내어보는 벅찬 감정들이다. 특히 넷째 삼촌인 이원조가 있었기에 ‘청포도’, ‘광야’ 등 이육사 선생의 시가 사후에나마 <육사시집>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될 수 있었다. 강인한 의지와 올곧은 기개의 어머니 어머니 안일양 여사 또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란 기개가 곧은 분이었다. “삯바느질, 하숙집, 건어물상, 미곡상은 물론 평생을 아궁이도 손수 만드시고 미장일도 직접 하셨어요. 어머니의 강한 생활력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먹고 입는 데 불편함 없이 컸고요. 궁중 요리도 하셨는데 꼭 저 있는 날 놋그릇을 닦으셨거든요. 그땐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엄격했던 교육이 저를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잡아주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 이육사 선생도 어머니 안일양 여사도 매사에 휩쓸리지 않고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는 강인한 분들이었기에 “우리 아버지처럼은 못 산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만 어느 날 “이야기는 다 들어주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하고자 하는 건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남편의 이야기에 두 분의 딸임을 확인받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처럼은 못 살지요.” 다시금 말하는 이옥비 여사의 얼굴에 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어머니가 일주일에 한 번 면회를 갈 때면 한복을 다섯 벌, 여섯 벌 가지고 가도 죄다 피에 물들어 왔었다고 해요. 수인번호를 따서 ‘이육사’ 호를 삼고 온갖 고문에도 단 한 번을 굽히지 않으셨대요. 매일 아침 끌려가서 저녁이면 반 시신이 되어 끌려나오고. 같이 있던 수인들이 끌려 나간다, 끌려 들어온다 수신호로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상황들을 공유했었답니다.” 아버지에 대한 회상 속에 세월의 무게를 더한 슬픔과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아픔이 묻어난다. 일본에서 다시금 배우고 이해했던 이육사의 삶 “육사 선생의 딸이 왜 일본에 갔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에는 ‘그 일본’에 간다는 자각이 없었어요. 그저 내가 육사의 딸임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있었거든요. 꽃꽂이 자격증으로 어딘지도 잘 모르고 무작정 가서 보니 니가타(新潟)였고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연이 닿은 분들에게 소소하게 꽃꽂이도 가르치고 김치나 궁중요리 등도 조금씩 알려드렸지요.” 오히려 살면서 일본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아버지 이육사에 대해 다시금 회고할 수 있었기에 아버지를 이해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2004년 이육사문학관 개관과 함께할 수 있었다. “전 김휘동 안동시장님의 권유에 많이 망설였는데 막상 와서 보니 아버지를 더욱 가까이서 느낄 수 있어 좋아요. 망설이지 말 것을. 일찍 와서 봤으면 자료도 더 챙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어요.” 아쉬움에 더 많은 시간을 이육사문학관에서 보내던 중 2008년부터는 퇴계 이황의 후손이며 조선후기 문신인 목재 이만유 생가인 목재고택에 기거하며 오가는 한옥스테이를 찾는 손들에게 방을 내어주고 때때로 시간을 내어주고 있다. “알고 오는 분들도 있고 모르고 와서 이야기 나누다 놀라시는 분들도 있고 그래요. 소소한 재미가 있지요. 이곳에서 지내는 모든 시간들을 사랑합니다.” 다시 육사의 딸이 되어 감사한 시간 2020년은 코로나19로 인해 개관조차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단계가 완화되었을 때는 문학관을 찾아오는 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목재고택을 찾는 이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답답했던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문을 닫았던 초창기에는 푹 쉬었어요. 그다음에는 집 정리를 했고요. 장을 담아야겠다 싶어서 장도 담았지요. 꽃꽂이도 계속해서 가르쳤어요.” 분명 미루었던 일들을 하며 바삐 지냈음에도 문학관에서 한 걸음 떨어지자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육사의 그늘이 더 이상 무겁지 않다. 든든한 버팀목이며 힘든 순간에 기댈 수 있는 너른 품이 되었음을 느낀다.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안온한 쉼이 되었음에 감사하다. “조금만 더 살다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해요. 제가 조금만 더 클 때까지 계셨더라면 많은 걸 배웠을 텐데 말이죠.” 아쉬움 가득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에게 받은 이름, 옥비(沃非)부터가 가르침이었다. 평생을 욕심내지 않고 양보하는 삶을 살아왔다. 함께 살다시피 하던 사촌들에게도 내 것을 주장하지 않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왔다. “사촌들이 제 몸 돌보지 않고 바보같이 산다고들 답답해하기도 했는데 저는 그게 좋았어요. 내가 조금 섭섭해도 내색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면 진심으로 돌아온다고 믿었거든요. 이기려는 삶 말고 후회하지 않는 최선을 다하는 삶, 배려하는 삶은 내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생애 남은 시간은 오롯이 육사의 딸로서 살고자 한다. 국어책에 실린 이육사의 시는 알지만 ‘이원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 문학관의 존재는 알지만 언제라도 가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나치는 많은 분들의 발길도 붙들고 싶다. 그토록 멀리하기만 했던 펜을 뒤늦게 잡은 이유다. 찬찬히 기록하고 있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기다려진다. ------------------------------------------------------------------------------------------------------------------------------------------------------ 이육사문학관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25 전시관에서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의 생애와 연도별 활동, 교육적 환경과 혈연적 관계, 장진홍 의거사건과 수감 및 이육사의 변천 과정, 독립운동과 문학활동, 17번의 수감, 6형제, 서훈, 추모 등 이육사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육사문학관 2층 북카페 ‘노랑나븨’는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 독립운동을 테마로 하는 작은 문학카페로 좋은 책을 선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