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02]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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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 처단하고 민본주의 실천했던 백마장군
“임금의 명령도 따를 수 없는 것이 있다”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의병장 열전’에서 소개할 두 번째 인물은 1908년 2월 3일 순국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대장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 1851~1908) 선생이다. 지난 1월호에 수록된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7년 1월 1일 순국하였다. 『월간 순국』에서 매월 연재하는 의병장들은 순국한 달을 기준으로 선정하고 있다. 3월호에는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안중근 의사를 소개할 예정이다.
기삼연이 누구인지 살펴보기에 앞서,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이라는 왕조국가에 살았던 유가 출신 인물이 “유자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다[儒者不可與同事]”는 말을 하고 나아가 “임금의 명령도 따를 수 없는 것이 있다[君令有所不受]”는 표현을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제 이 말이 가진 의미를 화두(話頭)로 삼아 기삼연의 삶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먼저 “임금의 명령도 따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서 필자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의병’이란 단어를 다시 주목해보았다. 의병은 민(民)군이다. 민은 관(官)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서 민은 역사의 본체로 작용해 왔다. 이 역사의 본체인 민의 가치는 주체인 군왕보다도 선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민본이라는 단어를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면 임금과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의미의 민유방본(民維邦本)이란 용어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편한 사실은 어전 회의에서 신료들은 수도 없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구체적인 사안을 향하여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 말만 반복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내용을 접하고 나면 우리는 민본이라는 말의 허구성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근본으로서의 백성의 역할을 몸소 실천한 분들을 만나면 그 민본이라는 의미를 생생하게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우리가 계속 만나고 있는 의병은 바로 불의(不義) 앞에서 역사의 본체인 민이 정치의 주체인 군주의 명령과 상관없이 분연히 일어났던 우리 겨레 민본주의 정신문화의 뜨거운 역사적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임금의 명령도 따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기삼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유자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는 기삼연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주지하듯이 조선왕조는 부패한 고려의 불교를 대신할 사조로 성리학을 활용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이 주목한 것은 바로 ‘실천성리학’이었고 이 성리학은 조선 건국과 동시에 국가지도이념으로 정립해 갔다. 그러나 조선이 점차 안정화되면서 ‘실천성리학’은 ‘이론성리학’으로 바뀌어갔다. 마침내 조선의 성리학은 형식화, 관념화되어가면서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유자와는 더불어 일을 함께 할 수 없다” 기삼연의 탄식은 바로 이 형식화되고 관념화된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이었을 것이다. 기삼연이 말하는 ‘유자’란 바로 공리공담을 일삼는 형식화되고 관념화되어 고루하기만한 학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기삼연은 유자라는 표현보다 ‘글쟁이’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기삼연과 동학이자 동갑이었던 오준선이 남긴 기록에는 “서생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書生不足與謀]”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자라는 용어에 대신 ‘서생’이라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오준선은 노모가 집에 계시어 의병에 동참은 못하고 당시 호남 지역의 의병들의 활동을 기록한 <의병전>을 남겼다. 오준선은 <의병전>에서 기삼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기삼연은] 자질구레한 예절에 구애 받지 않았다. 겉으로만 유행(儒行)을 하는 척하면서 헛된 명성을 따르는 자들을 보면 심히 더럽게 여겨 그 얼굴에 침을 뱉으려 하였다. 그러나 스승을 높이고 현자(賢者)를 사모함은 진실로 성심에서 우러나왔고…
‘얼굴에 침을 뱉으려 했다’는 오준선의 이 기록에 의하면 기삼연이 당시 겉으로 유자인 척하는 썩은 유학자들을 얼마나 경멸하였는지 알 수 있다. 기삼연의 이러한 사고와 행동은 그의 스승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의 영향이 컸다. 기정진은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깊숙이 연구해낸 성리학의 높은 학문을 실천으로 옮긴 학자였다. 기정진은 69세이던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을 역설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논의가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和議)를 이루자며 전쟁을 피하자던 주장이 대세를 이루던 때에, 기정진은 결사반대하고 전쟁을 위한 군비강화책을 열거하고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이른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국내 최초로 폈던 인물이다. 그의 척사위정론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되어, 의병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다.
한말 호남을 무대로
조직적인 의병전쟁 시작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기우만은 1896년 2월 7일(음력) 장성향교에서 거병했다. 장성의병이 그것이다. 장성은 노사학파의 본고장이다.
노사 등 행주 기씨가 장성과 인연을 맺은 것은 기묘사화(1519년)와 관련이 있다. 한원당 김굉필의 문인이었던 기준(奇遵)은 조광조와 함께 도학정치에 뜻을 두고 정치개혁을 추진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된다. 기준의 형인 기진(寄進)과 기원(奇遠)은 화를 피해 광주와 장성에 정착하였는데, 퇴계와 사단칠정논쟁으로 유명한 기대승은 기진의 아들이며, 노사 기정진은 기원의 후손이다.
기우만이 장성에서 거의할 때 기삼연은 스스로 군무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백마장군이라 하였다. 군사들을 훈련시키는데 놀랍게 능숙하여, “글이나 읽던 선비가 어느 겨를에 군사의 일을 익혔을까?” 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나주로 행군한 장성의병은 같은 해 2월 2일, 이학상이 의병장이 되어 거병한 나주의병과 함께 호남 각 지역을 점거하고 북상하려는 개혁을 세운다. 그러나 전 학부대신 신기선이 사령관 이겸제와 관병 500명을 이끌고 와 임금의 해산명령을 전하자, 나주의병에 이어 장성의병마저 해산하고 만다. 앞에서 언급한 기삼연의 “유생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라는 탄식은 바로 장성의병이 해산될 때 한 말이다.
이후 장성의병을 주도한 기우만은 1909년에 『호남의사열전』을 저술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노모의 봉양 때문에 의병에 나설 수 없었던 노사의 제자인 오준선은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의병전』을 남긴다. 이제 이 글들을 저본으로 하여 성재의 삶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기우만은 문장을 잘하고 필법 또한 절묘하였으나, 젊은 시절부터 독서할 때 병서(兵書)를 함께 읽었다. 을미년에 국모 시역(弑逆)의 변고가 있었고, 이어서 단발을 하라는 위협이 있었을 때, 기우만이 왜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격문을 전하여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자 기삼연이 가장 먼저 와서 군무(軍務)를 스스로 맡으며 말하기를 “병서를 읽은 것은 바로 오늘에 쓰기 위한 것입니다” 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학부대신 신기선 등이 의병을 중단하도록 국왕의 뜻을 전하자 부득이 하게 의병을 해산하게 되었고 이 때, 기삼연은 분통을 터뜨리며 은밀히 의병의 일을 도모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갇힌 지 달포 만에 옥리가 밤에 문을 열어주어 나왔다. 감옥에서 나와 명산을 유람하다 여러 달 만에 돌아왔다.
가족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가 살다가, 1907년 가을 의병을 규합하여 [장성 수연산] 석수암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어 책(柵)을 만들어 전술을 연마한 후 영광 고창 등지로 나가 적을 만나 모두 물리쳤다. 동학과 서학의 잔당으로서 머리를 깎고 적의 사냥개 노릇을 하는 자는 만나면 반드시 죽이고, 부유한 자로 적에게 빌붙어 사는 자는 재물과 곡식을 빼앗아 군용으로 충당하였다.
고창 문수암에 주둔해 있었는데 적이 뒤를 밟아 와서 교전하여 적 수십 명을 죽였다. 이때 고창의 향리와 백성들이 의병의 편이 되어 무기를 많이 공급해주고 기밀을 자세히 알려주어 곧장 성 안으로 들어가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출병할 때마다 군량이 부족하였는데 영광 법성포에 왜적이 인근 군으로부터 조세를 받아 쌓아둔 것이 많다는 것을 듣고 “이것이 나라에 바치는 것이라면 빼앗아 사용해서는 안 되겠지만, 왜적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라면 가져다 써야겠다”며, 밤중에 들어가 왜적의 두목 두어 놈을 죽이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하였다. 의병들에게 재물을 갖게 하고 나머지는 주민들에게 가져가도록 하였다.
몇 차례 교전 후에 동짓날 영광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왜적이 알고 방비하여, 의병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추위에 병이 많이 생겼다. 이에 서우산에서 의병들을 쉬게 한 후 나주의 고막원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 군대를 철수하였다. 기삼연은 의병을 이끌고 담양 금성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험준한 곳이어서 거기서 새해를 맞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밤에 큰 비가 내려 노숙하는 의병들이 다 젖어 얼어 죽을 지경이라 수비가 허술하였다. 적의 공격을 받아 의병이 많이 죽었다. 기삼연은 의관을 정제하고 최후를 준비하였는데 갑자기 안개가 깔려와 요행히 탈출할 수 있었다.

담양에서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가마를 메고 가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잘 가지 못했다. 당시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김태원이 담양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장 요시다(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들을 추격하다 기삼연 대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태원 부대원들이 대장을 구하기 위해 경양역까지 쫓아오지만, 기삼연은 이미 광주헌병대에 수감 된 뒤였다. 일군은 의병들이 기삼연을 구하기 위해 광주헌병대를 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튿날인 2월 3일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재판 없이 처형하고 만다.
역사를 통해 기삼연이 꾸었던 꿈

기우만은 죽음에 나아가면서도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책을 읽은 유자로서 시 한 수를 남기고 갔는데 그 시를 들은 사람이 다 기억을 못하고 아래 두 구절만 전해주고 있다.
거의를 하였으나 적을 치지 못하고
이 몸이 먼저 죽으니(出師未捷先死)
일찍이 해를 삼켰던 나의 꿈은
또한 헛것이란 말인가(呑日曾年夢亦虛)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 사후에 부장이었던 김태원, 전해산, 이석용, 심남일, 박도경 등이 남도 의병을 이끄는 독립의병 부대로 분화, 발전한다. 그리고 이들 의병부대의 맹렬한 저항에,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 이름 붙은 ‘전라도 의병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고, 전라도는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장면, 기삼연이 처형 당한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은 10년 뒤 ‘조선독립 만세’ 소리로 가득 찬 광주 3·1운동의 발발지가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우리가 만들어 왔고 또 만들어 갈 역사를 통해 기삼연이 꾸었던 그 꿈은 실현되었고, 그의 해몽은 정확했다고 이제 우리가 그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