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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3]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안창호(安昌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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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우선 통일주의 주창 


자신을 모두 희생한 

진정한 실천가


글 | 편집부


  이처럼 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중략) 다만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 동아일보 1925년 1월 25일자,  
선생의 글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 중에서




핵심공적

초기 상해 임시정부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며 독립항쟁세력의 통합과 통일을 위해 노력


주요약력

●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 출생

● 1905년    공립협회 설립 계몽운동

● 1907년    신민회 설립 국권회복운동

● 1919년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 1923년    국민대표회의 부의장

●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 1938년 3월 10일(59세)   수감 중, 병보석 상태에서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에서 태어났다. 8살에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슬하에서 교육받았다. 1894년 16세의 청년 도산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청일전쟁을 피해 서울로 간 안창호 선생은 서울 정동거리에서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선교사 밀러를 만나 밀러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밀러학당에서 공부를 한 3년은 그의 세계관을 크게 넓혀 주었다. 밀러학당 졸업 후 독립협회 민권운동에 참여한 안창호 선생은 평양의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받았고 이후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줬다.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점진학교와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교육자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 본격적인 교육학을 배우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한인공동체 지도자가 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를 시작한 안창호 선생이 본 것은 구심점 없이 흩어져 있는 동포들이었다. 타국에서 천시받지 않고 권익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한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만들었다.


1904년에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안창호 선생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해 그 지역 한인들의 믿음을 얻어 한인공동체의 지도자가 됐다.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모두와 공유하자 지역의 미국인들로부터도 신용을 얻었고 교민들은 리버사이드 한인공동체를 ‘도산의 공화국’이라 불렀다.


한인사회가 자리 잡아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안창호 선생은 조국 광복을 목표로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하지만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이 재외동포를 보호하지 못하고, 양반집권층이 국권을 지킬 의지도 없자 국민을 새롭게 하여 국민의 힘으로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했다.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2월 20일에 국내로 귀국하자마자 신민회 조직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본격적인 항일투쟁 준비를 시작하다


귀국한 안창호 선생은 서북학회 활동과 함께 평양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하고 가옥 개량, 모범농장 건설, 여성교육의 필요성 제창, 국가(國歌) 보급운동 등 다양한 국민운동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를 해갔다.


하지만 일제는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식민통치를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안창호 선생에게 내각 구성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안창호 선생은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본격적인 항일투쟁 준비를 시작했다.


다시 미국으로 간 안창호 선생은 재미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일본 정부에 대항하고 멕시코와 쿠바, 필리핀까지 지방회 조직을 둔 세계 한인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전 세계 한인네트워크 구축이 어렵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선생은 외교활동과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떠났고 6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했다.



독립항쟁 구심점,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다


  당시는 임시정부가 3곳이 있었으며 독립군 조직들도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안창호 선생은 정통성을 가진 민족정권을 수립하고 통일된 독립항쟁을 수행하고자 9월 11일 3개의 임시정부 통합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조건들이 다른 다양한 독립항쟁세력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독립세력의 수평적 연대인 대독립당 건설과 독립항쟁의 기지이자 정신적 문화적 구심점이 될 이상촌 건설을 추진해갔다.


극우·극좌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던 그였지만 1927년 만주 각지를 돌며 불굴의 의지로 대동단결을 호소하여 결국 상해·광동·무한·남경 등지에 한국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됐다. 안창호 선생은 민족평등·정치평등·경제평등·교육평등을 제시하고 민족 간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우선의 통일주의를 주창하여 좌·우 양쪽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을 추진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민단장이라 오인 받아 국내로 잡혀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일제가 조작한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됐다. 오랜 감옥생활로 결국 결핵을 얻어 1938년 3월 10일,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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